소설리스트

〈 184화 〉 #180 고백 (184/200)

〈 184화 〉 #180 고백

* * *

***

"아저씨!"

"응."

"남자들은 다 아저씨 거처럼 커요?"

"쿨럭."

첫날 크림 스파게티 이후로 계속 배달만 시켜 먹던 우리.

사라가 오늘은 꼭 저녁을 직접 해 먹인다며 주방 따라오지 말고 딸과 놀아달라고 엄포를 놓아, 난 엘리스와 함께 방에서 뒹굴뒹굴 뒹굴었다.

그런데 이건 놀아주는 건지, 취조를 받는 건지 모르겠다.

"글쎄···. 다른 사람 건 얼마난지 잘 모르겠는 걸?"

"근데 진짜 신기하네용. 어떻게 그 큰 게 바지에 감쪽같이 숨어 있을 수 있는 거지?"

"뭐가 신기해. 너희 엄마도 요만한 걸 상의에 숨기고 다니잖아?"

사라의 가슴은 진짜 크다.

키도 큰데다 허리는 개미 같으니 체감 상으론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래도 어찌됐든 옷에 잘 숨기고 다니지 않느냔 말이지.

"그런가? 훔···."

볼을 크게 부풀리고는 미간을 좁히는 금발의 꼬맹이.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고 애교가 넘치는 게, 누가 될 진 몰라도 남편은 복 받았구만.

그때 갑자기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하여 본다.

여우다.

"여보세요?"

­ 아, 아저씨!

"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얘가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할 리가 없는데?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난 엘리스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는 방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 여어. 오랜만이야?

"누구?"

­ 나야 나. 잭. 네가 아주 제대로 엿 먹인 탓에, 졸지에 여자 몸이나 음란하게 훑는 변태가 된 놈.

느낌이 싸하다.

왜 이 녀석이 여우랑 같이 있는 거지?

­ 왜 내가 요 동양 여자애랑 함께 있는지 궁금하겠지. 안 그래?

"그래. 원하는 게 뭐지?"

­ 큭큭. 눈치가 아주 빨라? 그럼 간단히 말하지. 잘못된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거야.

"되돌려? 그게 무슨 뜻이야?"

수화기 너머로 잭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말 그대로야. 네가 사라 앞에 나타나기 전으로 되돌려 놓으란 뜻이야.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님을 알 텐데?"

­ 못하면 여기 있는 얜 죽어. 그리고 함께 있는 그 언니도 죽고.

"언니라니?"

­ 도, 도향언니도 함께 있어요, 아저씨···.

하아···. 젠장.

역시 사라 말을 따를 게 아니라 그냥 링링에게 바로 이야기 했어야 하는 건데.

뻔히 사고를 칠 인간을 가만 놔두다니···.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를 후회한들 의미 없었다.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난 바로 현재에 집중했다.

"우리 좀 현실적으로 가자고. 말도 안 되는 요구하지 말고,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 좋아.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

폰 너머로 남자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차를 운전 중인지,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다른 차량의 경적 소리도 들려온다.

난 남자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재빨리 폰을 두드려 링링에게 문자를 넣었다.

나 : 토끼 여우, 미스터 홍 부하에게 인질로 잡힘

'일단 어떻게든 내 선에서 시간을 끌어야 해.'

두 사람 주위로 경호원들이 함께 있으니, 버티다보면 구출의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보고 답을 주지 않는 링링.

그 순간 서늘한 가능성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사실 스승 입장에선 도향과 여우는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내가 시간을 끌어본들 스승이 움직일까?

그 누구보다 스승의 모든 걸 배운 사람으로서 확신하건대 절대로 '아니오'였다.

그때 다시 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아. 이렇게 하지. 내가 진짜 많이 양보한 거야. 넌 그걸 알아야 해. 나도 내 손에 피 묻히긴 싫거든. 그래야 사라랑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미친놈처럼 중얼 거리던 녀석이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는 내게 명령했다.

­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 보스의 의뢰를 받고, 그걸 위해 몇 날 며칠을 주변을 돌며 계획을 세운 것부터 해서 사라의 호감을 사기 위해 한 모든 행동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사라는 네게 마음이 없어. 내가 사실을 말하고 나와 갈라선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 좆까! 네가 뭘 알아?!

"이건 전문가로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여자가 한 번 아니라고 마음먹은 것을 바꾸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거라고."

그러나 녀석은 진지한 내 조언에도 콧방귀를 끼었다.

­ 이 여자들 살리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나 해! 헤어지고 난 뒤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

­ 내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폰 상태로 해. 대신 이쪽 소리 안 들리게 하고.

원하는 대로 해준다.

그때 갑자기 링링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링링 : 녀석의 요구를 무시하세요 저희 쪽에서 해결 하겠습니다

통화 내용을 들은 건가?

그에 난 물었다.

나 : 확실히 두 사람 구출할 수 있습니까?

링링 : 걱정 마십시오 이미 해당 차량은 포위 중입니다

그러나 난 링링을 안다.

그녀는 스승의 개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는 개.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사람을 죽이고, 통조림해서 바다에 내던진 수만 네 자리수다.

그런 그녀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아까부터 든 의구심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내 스승은 사람을 도구로 아는 인물이야. 쓰고 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지.'

특히나 일을 하는데 있어 발목을 잡는다면 가차 없이 쳐내곤 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상의 주머니에 넣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내 발길이 닿은 곳에는 진갈색 머리의 여인이 분주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흐응흐응~"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의 맛을 내고 있는 그녀.

사라에게 사실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날 아주 개새끼 보듯 할까? 저번에 아니라고 반대로 화까지 냈었는데, 날 또라이 취급하진 않을까?

아니, 그보단··· 그녀가 크게 상처받진 않을까.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사실을 말하면 내 여자 두 명을 살릴 수 있다.

난 도향과 예림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사라와 갈라지는 게 싫었다.

그녀는 뭐랄까···. 내 20년 넘는 세월 동안 잊고 있었던 뜨겁고 뭉클한 감정을 일깨워준 여인이었으니까.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냥 사실대로 다 말하고 싶다.'

의뢰를 받아,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부터 해서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 와중에 내 마음은 어떤 식으로 변해, 지금은 어떠한지···.

"응? 서후? 거기서 뭐해?"

"어? 아아···. 그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 걱정스레 살피는 여인.

이런 여자에게 다시 상처를 주어야 한다니···.

그러나 잭의 욕망에 물든 눈빛을 기억한 난 결정했다. 모든 걸 말하기로.

그래야···. 그래야 도향과 여우가 살 수 있으니까.

"사라.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뭔데 그리 무게를 잡아? 참네. 누가 보면 청혼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네. 후훗."

아마 그게 그녀의 본심이리라.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녀가 진정으로 내게 바라는 것.

그러나 난 그걸 들어줄 처지가 못 됐다.

"실은 말이야. 나 너에게 거짓말 했어. 널 속였어."

"그게··· 무슨 말이야?"

"전에 잭이란 사람이 그랬다 했지? 내가 네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거 말이야. 그 말··· 사실이야."

"뭐···?"

충격을 먹은 표정이 사라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녀의 눈은 좌우로 거칠게 흔들거렸다.

입술은 파르르 떨렸고, 몸은 마치 바람 앞에 선 촛불 마냥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아니, 어쩌면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휘청거린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 그럼 그 말이 모두 사실이란 말이야?"

"그게 전부는 아니야."

난 그녀의 오빠로부터 의뢰를 받은 것부터 시작해 모든 걸 그녀에게 다 털어놓았다.

어쩌면 그녀에게만큼은 비밀 하나 남겨두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이야기해주고픈 마음 일렀는지도 몰랐다.

"오빠가···. 그랬구나."

"미안. 정말 미안해, 사라."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던 사라가 두 다리를 모으고는 양팔로 끌어안는다.

그녀는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어린 아이가 기댈 곳이 없어, 두 다리를 끌어안고는 혼자 슬픔을 삭이듯.

그리고 난 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대기했다.

마치 죄인이 형벌을 선고 받기 위해 기다리듯이.

"서후.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있잖아."

"하와이?"

"응. 그때도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야?"

"아니. 그때 난 아는 이들과 여름휴가 간 거였어. 식당에서 밥 먹고 담배피고 돌아가던 중, 웬 꼬마아이가 차로로 들어서는 걸 보고는 그냥··· 그래. 그냥 급하게 뛰어들었던 것뿐."

"그래? 다행···이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는 사라.

인생을 살다보면 잘 통하는 사람이 있다.

함께하다보면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된다.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딱히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전달되는 그런 사람.

난 사라를 보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너··· 다 알고 있었어?"

"응."

"내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 알고 있었던 거야?"

사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잭의 이야기를 듣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했어. 주위 상황이 너무 딱 들어맞잖아?"

"하, 하핫···. 그럼 의뢰자는?"

"오빠의 마음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 다만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된 것도 있어. 바로 오빠가 내 남편을 죽였다는 것. 그동안은 심증만 있었는데, 이런 짓까지 할 정도라면 볼 것도 없겠지."

그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라였다.

"서후. 난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푹 빠졌어. 하와이에서부터 말이야. 너를 보는 순간 뭐라고 할까. 흑백의 세상에 색이 입혀진 것 같았다고 할까? 그전까진 사는 게 허무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정말 딸 때문에 억지로 하루하루 살아갔는데···."

진갈색 머리의 여인이 한 걸음 다가온다.

"널 보는 순간 살고 싶어졌어. 없어졌던 식욕도 돌아왔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랑 엘리스랑 셋이서 함께."

여인의 푸른 눈이 날 포근히 감싸 안는다.

사라는 내 품에 꼬옥 안겨왔다.

"그래서 네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상관없었어. 이유야 어찌됐든 결론은 너와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단 거니까."

"사라···."

"서후, 네 생각을 듣고 싶어. 네 진심을 알고 싶어. 나··· 사랑해?"

난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 이미 내 마음이 어떤지."

"그래도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래. 말해줘. 네 입으로."

그에 말해주었다.

아직은 모호하지만 묘하게 드는 내 감정을.

"사라, 사랑해."

그리고 그 순간, 줄곧 확신이 없었던 내 사랑의 감정은 확고해졌다.

난 그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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