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3화 〉 #179 납치 (183/200)

〈 183화 〉 #179 납치

* * *

***

­ 잭. 솔직히 말해요. 제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은 잭이죠?

­ 이 사실 하나는 기억하세요. 전 당신의 마음 따위 받을 생각 추호도 없어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는 더더욱요.

'왜···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 만날 때마다 몸을 음흉하게 훑는데 어느 여자가 좋아할까요?

"하아···."

남자의 한숨 소리가 허공에 나직이 울려 퍼진다.

잭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는 그대로 무거운 침묵을 유지했다.

그걸 지나가면서 본 마이클이 그를 불렀다.

"이봐, 잭. 무슨 일 있어? 왜 대낮부터 푹푹 한숨이야?"

"···아무것도 아냐."

"정말로? 그런 것 치고는 지금 네 얼굴 완전 엉망이라고. 아···. 간밤에 너무 달려서 그런 건가?"

대답은커녕 침묵을 유지하는 잭.

그걸 숙취 때문이라 오해한 마이클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며 말했다.

"하핫. 잭. 자네도 많이 죽었군. 전에는 아무리 달려도 끄떡없던 자네가 이리 망가지다니 말이야! 영 뭐하면 좀 쉬시게. 오전은 내가 대신 나갈 테···."

그러나 마이클은 그 말을 맺지 못했다.

돌연 잭이 성을 낸 까닭이다.

"그런 거 아니라고! 당신이 뭘 알아, 씨발."

"어어?"

잭이 화를 내고는 성큼성큼 걸어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눈은 강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씨발. 씹어 먹을 동양인 새끼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잭은 화를 가눌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러나 그보다 더 제어하기 힘든 건, 사라를 향한 욕망이었다.

그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는 곧바로 차를 몰고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그의 보스인 찰스 밀러의 경쟁자, 크리스토퍼 자크가 있는 곳이었다.

"보스. 누가 좀 만나고 싶다는데요?"

"누군데?"

"찰스 밀러 쪽 개입니다."

"그냥 죽여서 대가리만 돌려보내."

"그게··· 큰 건을 물고 왔답니다. 혹시 거래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더군요."

"거래? 흥미롭군. 들어와 보라고 해봐."

자크의 지시에 비서가 연락을 넣는다.

조금 있자, 부하 넷이 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난다.

잭은 그의 앞에 서서 당당히 요구했다.

"제가 저희 보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기겠습니다. 그러니 좀 도와주십시오."

"모든 걸 넘긴다라···. 흥미롭군. 만약 내가 듣고 입 싹 닫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도와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도와주시면 제가 보스의 목을 직접 따 드릴 테니까요. 그보다 확실한 건 없겠죠."

"호오···. 그것 참 흥미 당기는 제안이로군."

40대 중반. 얼굴에 짙은 주름이 가득한 백발의 남자가 책상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시가를 입에 문다.

뿌연 연기가 담배를 뒤덮고 위로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그래. 우리 전향자께서는 무얼 원하시는가?"

"보스의 동생, 사라 밀러를 원합니다. 제가 가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아하! 그렇군. 그렇게 된 것이었구만. 사랑이라···! 참으로 좋은 것이지."

"거래를 하실 겁니까, 안 하실 겁니까?"

크리스토퍼 자크가 자신의 왼쪽 눈을 매만진다.

그의 손이 닿는 곳에는 기다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상처를 만들어 준 이가 누군지 아나?"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할지 말지 결정하십시오."

"거 참. 성질 급한 친구로군. 인생이 재미가 없겠어."

말을 자른 것이 자못 기분이 나쁠 만하건만, 자크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 거래를 하지. 자네가 원하는 건 사라 밀러. 그건 확실히 챙겨주겠네."

"좋습니다. 전 보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드리도록 하지요. 인력 배치되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를 포함 모든 것을요."

"그래그래. 대신. 목을 가져오는 건 잊으면 안 되네."

"직접 들고 오지 않고 다른 식으로 처리해도 되겠지요?"

"물론."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다.

그렇게 은밀한 거래는 성사되었다.

모든 걸 전해 듣고 계획까지 다 세운 뒤 잭이 물러나자, 지금껏 가만히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보스에게 물었다.

"보스. 저 새끼 말이 사실일까요? 혹시 함정 아닐까요?"

"아니. 그러기엔 눈빛이 정상이 아니야. 말한 것들도 굉장히 구체적이고."

"그래도···."

"자네···. 젊은 것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나?"

보스의 질문에,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토퍼 자크가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젊은이들은 뛰어난 체력과 열정, 행동력으로 많은 걸 이루어내지. 그것엔 연륜을 넘어서는 힘이 있기에, 때론 세상을 놀래킬 만한 것들을 이루기까지 한다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보스?"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한단 거야. 젊은 혈기에 스스로 먹혀 활활 타버리고 마는 거지. 그동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과 함께. 그 중 제일은 도박이요, 그 바로 아래는 사랑이라···!"

자크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15년 전 일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는 살며시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흉터를 매만졌다.

'잭. 이건 자네의 보스이자, 한땐 내 동료였던 찰스 밀러가 만들어준 것이라네. 그래서 난 늘 떠올리고 상상했지. 날 배신한 그놈에게 복수를 하는 순간을 말이야.'

그러면서도 15년간 꾸준히 행해온 게 있다.

바로 눈에 보이는 족족 배신자들을 처단한 것.

'활활 타오르시게. 모든 걸 다 이루었다 생각한 순간,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말이야···!'

***

"여우야~"

"네, 언니."

"우리 오늘 바람이나 쐬러 갈까?"

"좋아용."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 물품을 주섬주섬 챙기는 두 사람.

준비를 마친 도향이 링링에게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럼 나랑 여우는 잠깐 나갔다 올게. 있다 보자, 오.동.통.한. 양.씨."

"윽···. 그냥 나가 죽으시고, 돌아오지 마십시오."

"가자, 여우야!"

"네~"

요 근래 서후의 일로 힘든 탓에 도향을 많이 의지하게 된 한예림.

그래서인지 그녀는 도향과 함께 바람을 쐬고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물론 그 대부분의 코스는 바다 혹은 식물원이었지만.

"오늘은 어디 갈래?"

"전 언니 가는데 따라갈래용."

"그럼 우리 애기들 보러 가자!"

한 여름날 태양 아래 있는 것 마냥 온기로 가득한 식물원.

사방에 자리한 크고 작은 식물들이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색을 뽐낸다.

도향은 찬찬히 발걸음을 옮기며, 우측에서부터 식물 하나하나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 잘 있었니?"

"어머. 오늘 넌 참 예쁘구나!"

"후훗. 귀여운 녀석."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예림이가 웃으며 묻는다.

"언니. 진짜 거의 매일매일 보는데 안 질리세용?"

"응. 보는 재미가 있잖아."

"엑···. 정말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는 여우에게 도향이 웃으며 부연설명을 했다.

"지금 이 아이를 보면, 어제만 해도 요만 했거든. 아직 이쪽은 덜 자랐었고. 그런데 지금은 거의 다 모양을 갖추었지? 그에 보는 재미가 있는 거지."

"크는 걸 지켜보는··· 재미인 건가요?"

"뭐 그렇지. 지금 이 녀석을 봐봐. 난 얘를 딱 보면 앞으로 어떻게 크겠구나라는 게 보여. 이쪽 이파리는 이런 식으로 휘고, 이쪽 꽃봉오리는 어느 각도로 기울겠구나 뭐 그런 거."

도향이 한 쪽에 자리한 푸른 꽃을 톡톡 건드린다.

그러자 녀석이 몸을 좌우로 흔들어댄다.

마치 어미에게 애교를 부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다.

"처음에는 내 예상이 맞는지 틀린지, 그걸 맞춰가는 재미로 봤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하더라."

"어떤 건데용?"

"어떻게 하면 얘가 가장 아름답게 자랄 수 있는지. 수많은 아이들 중 가장 아름다워지려면 어떤 식으로 자라야 하는지. 그때부턴 식물들을 사서 기르기 시작했어. 미리 자랄 길을 잡아주고, 정말 내 예상대로 예쁘게 자라는지 지켜보았지. 그게 성공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도향이 다시금 손가락으로 푸른 꽃을 톡톡 두드린다.

온몸을 잘게 떠는 게, 마치 기분이 좋은 걸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데 그건 무슨 꽃이에요?"

"이건 물망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중 하나야."

"왜요?"

"꽃말이 마음에 들어서."

꽃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려던 예림이는 그냥 입을 닫았다.

도향이 꽤나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식물원에서 즐겁게 즐기고 나온 두 사람.

그때 그들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잭이었다.

사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누구를 인질로 잡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그 타깃을 예림이로 잡았고, 지금 이렇게 그들 뒤를 잡은 것이었다.

"누구세···."

"가만히 있어. 몸에 구멍 나기 싫으면 말이야. 옆에 언니 쪽도 마찬가지야."

도향이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다.

눈에 익은 얼굴이다.

찰스 밀러 쪽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총···?'

도향의 미간이 작게 좁혔다.

"왜 찰스 밀러 밑에서 일하는 분이 저희에게 총을 겨누는 거죠?"

"잔말 말고 이쪽으로 따라와."

잭이 두 사람 뒤로 딱 붙어 사방을 경계한다.

그들 주위로 알게 모르게 경호하는 인력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질이 둘이나 잡혀 있는 만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세 사람의 뒤를 조용히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길가다 우연히 발견하곤 따라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아저씨! 림에게 빨리 좀 따라붙어 봐요!"

"진짜 조용히 계셔야 합니다, 아가씨들! 잘못하면 두 사람이 위험해지니···."

"걱정 마요. 우리가 애도 아니고. 빨리 가요, 빨리 가!"

"알겠습니다."

임서연, 임하나, 그리고 김민아 세 아이는 경호하는 이들 차량에 탄 채 조용히 그들을 뒤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