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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화 〉 #177 문제 해결 (181/200)

〈 181화 〉 #177 문제 해결

* * *

***

"후우."

"왜 그래? 왜 그렇게 한숨이야?"

내가 땅이 꺼져라 숨을 쉬어대자, 도향이 뭔 일이냐며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별 거 아니라며 대충 둘러댔다.

"그냥··· 내 여자를 다른 남자들에게 돌릴 걸 생각하니 기분이 영 별로라···."

"하긴. 서후 넌 그걸 정말 싫어했지. 사실 그것 때문에 스승 울타리에서 벗어난 거 아냐? 이 예쁜 언니를 보쌈해서 말이지."

"그랬었지."

아마 그때 도향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내기에서 져 스승이 원하는 대로 자라야만 했을 것이다.

약 20년 전.

내가 독립하기를 원하자, 스승은 실력검증을 이유로 자신의 여자 하나를 꼬드겨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심사해 보겠다 선언했다.

그때 타깃이 된 여자가 바로 도향이었는데, 그녀는 내 편이 되어주었고 쉽게 말해 승부조작을 해 내게 승리를 거머쥐어 주었다.

"근데 당시 무슨 이유로 그랬던 거야?"

"어떤 거?"

"왜 날 도와준 거냐고."

"아아. 그거? 그건 비밀···!"

그 뒤로 계속 물었지만 그녀는 내게 본심을 숨겨왔다.

때가 되면 가르쳐 준다고는 했는데, 아직도 말을 못하는 걸 보면 죽을 때에나 가르쳐 줄 생각인 모양이다.

도향이 윙크를 하며 혀를 슬쩍 내민다.

"그럼 누님은 이만 간다. 힘내! 우리 서후. 쪽쪽♥"

"어, 그래."

나는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타깃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난 이 여자를 사랑하는 건가?'

약 20년 가까이···. 정확히 말하면 25년 정도 잊고 있었던 감정.

성욕은 아니다.

성욕과는 뭔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보다는 조금 더 진한···. 휘발적이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마치 광기나 집착에 유사한 감정.'

나는 착잡한 얼굴로 사라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 날 맞이하는 진갈색 미녀의 얼굴.

"서후. 나랑 잠깐 이야기 좀···. 응? 서후, 너 얼굴이 왜 그래? 회사 일 잘 안 된 거야?"

"어? 아아···. 아무것도 아냐. 하핫."

사라의 얼굴에 걱정스런 감정이 떠오른다.

분명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

그에 나도 모르게 더욱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위였기에.

'왜 이 순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는 건지···.'

사랑하는 아내를 끝까지 믿고, 결국 못 잊다 죽어간 멍청한 인간.

그래서 난 '그 여자'를 싫어한다. 혐오한다.

나는 그녀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지금의 난 그녀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후?"

"어? 으응."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고, 내 앞으로 놓여 있는 찻잔.

사라가 푹 한숨을 내쉬고는 말한다.

"서후, 무슨 일인데 그래? 내게 이야기 해줄 수 있어?"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맞다. 그러고 보니, 너 나한테 할 이야기 있다고 했지? 뭐야?"

그러나 내 질문에 입술을 짓씹을 뿐 여인이 말을 못한다.

뭐지? 뭐 때문에 주저하는 거지?

손을 뻗는다.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있는 손등 위에 살포시 올린다.

그러자 몸을 움찔 떠는 그녀.

그 행동을 보는 순간, 난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백마의 얼굴을 빠르게 살핀다.

굉장히 불안정해 보이고 나에 대한 호감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대체···내가 잠깐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의뢰자나 지휘통제실에 연락을 해 확인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아쉽게도 타깃이 무게를 잡고 있는 상황.

이곳을 벗어났다간 상황이 크게 악화될 걸 직감한 나는 그녀에게 최대한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사라, 말을 해줘. 지금 왜 불안해하고 있는 건지."

"아···. 느낀 거야?"

"너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내가 못 느낄 리 없잖아? 방금 전 네가 날 느낀 것처럼."

"그, 그렇구나. 왠지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네."

사라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어린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럼··· 서후 너도 지금 힘들겠지만 좀 물어볼게. 내 성격상 질질 끄는 건 영 성미가 안 맞아서 말이야."

"물어봐."

"서후. 혹시 너 계획적으로 나한테 접근한 거야?"

어? 그걸 이 여자가 어떻게?

"그 한예림이란 애도 네 목적을 위해 가담한 거고?"

생각보다 정교한 추궁에 난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아주 내부 고발자가 있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걸 본 사라가 곧바로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한다. 매서운 말은 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대체 서후 네가 왜 나에게···?! 어? 난 널 믿었는데! 널 믿었는데!!"

"엄마? 왜 그래?"

딸 엘리스가 계단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묻는다.

난 잠깐 물러나 달라고 손짓을 하고, 똑똑한 아이답게 그녀는 곧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현재 타깃은 내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에 굉장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그 정도라면 정보를 준 이가 보통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

그리고 그런 상대라면 내부 고발자인 건 확실.

서후는 얼마 전 자신 앞에 나타났던 백인 남성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그라는 가정 하에 대응책을 빠르게 세웠다.

'일단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타깃이 들을 준비가 되면 그때 말한다.'

사라의 추궁이 지속됐다.

"어?! 내게 뭘 얻을 게 있다고! 서후, 너도 다른 남자들처럼 내 얼굴이랑 몸 보고 접근한 거야? 그런 거야?"

"······."

"아니면 돈?! 이런 유부녀를 좋아한다고 접근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

"뭐라 말을 좀 해봐! 변명이라도···. 흑흑."

화를 내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그녀.

난 드디어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그에 함부로 그녀에게 손대지 않고, 찬찬히 목소리를 내리 깔아 이야기했다.

"사라. 네가 누구에게 뭔 이야기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야."

"그럴 리가!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우리 집을 경호해 주는 사람이라고! 무려 5년 넘게 말이야!"

역시 잭이란 남자가 맞구만.

예상이 맞았음에 여유가 생긴다. 계획을 실행하는데 탄력을 더욱 받는다.

"어? 대체 무얼 원하기에 그리 완벽하게 속일 수 있어? 응? 과거 가족 이야기도 꾸민 이야기야? 이상형도 그렇고? 공감을 사기 위해서?"

계속 들어준다. 어중간한 반박거리들 말고, 제대로 반격할 수 있는 게 튀어 나올 때까지.

"하와이에서의 만남도 계획된 거였냐고!!"

나왔다. 제대로 된 것.

"사라."

"흑흑···."

"사라. 한 번 잘 생각해봐. 하와이에서의 그 일이 정말 계획된 일이라고 할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사라가 울면서 날 바라본다.

난 그녀에게 티 나지 않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당시 그때는 급박한 상황이었어. 까딱하면 나조차도 트럭에 치일 뻔했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했어?"

"에, 엘리스를 구하고···."

"구하고?"

"그냥··· 가버렸어."

"그래. 그냥 가버렸지. 만약 내가 계획적으로 네게 접근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번호라도 주지 않았을까? 하와이를 떠나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어떻게든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그제야 사라의 울음이 멎기 시작했다.

그 눈빛엔 나에 대한 신뢰가 다시금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난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는 도리어 화를 냈다.

"나 솔직히···. 지금 굉장히 어이없어."

"아니, 난 그게···."

"하와이에서 만난 인연이 이곳에서 이어졌을 때, 처음에는 굉장히 신기했어. 호기심도 일었고. 그러다 초대받아 널 본 이후에는 가슴이 쿵쿵 뛰었어. 몸을 섞은 뒤에는 상성이 좋다 생각했고.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까지 맞는 걸 보며 천생연분이라 확신했어."

난 내가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진실 됨에 사라는 그저 어버버 거릴 수밖에 없었다.

"서, 서후···."

"그런데 그건 오로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표정은 바짝 굳힌 채로.

"서, 서후! 미안해···! 내가 제대로 사실 확인도 안 해보고 이런 실수를···.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나를 오랫동안 지켜준 사람이 하는 이야기니까···. 그냥 그 순간 마음이 흔들려서···."

"그럼 너에게 난 그 정도밖엔 안 되는 거였단 이야기였네."

"절대 그, 그런 뜻은···. 서후? 서후!"

날 불러 세우는 그녀를 무시해 현관으로 향한다.

이쯤 되자, 사라는 절박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러댔다.

그래도 멈추지 않자 날 앞질러 가 문 앞에 진을 치는 그녀.

"뭐하는 거야. 비켜."

"싫어. 절대 싫어!"

"애 같이 왜 이래?"

"바, 방금은 내 실수니까 제발··· 용서해줘···!"

"이미 그 정도 오해를 했으면 끝난 거 아냐? 아까 그 일로 인해 넌 사랑의 확신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반대로 내 사랑은 갈가리 찢어졌어. 사람을 범죄자로 몰다니. 비켜!"

내가 다가서자 여인이 날 끌어안고는 버틴다.

난 여자에게 비폭력주의라 그녀에게 안긴 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귓가로 그녀의 애절하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엉엉. 미안해. 서후 내가 미안해. 다, 다시는···. 흑흑. 이런 일 없게 할게. 그러니 제발···. 흑흑."

"맞아요오, 아저씨···! 가지 마세요오. 후에엥···."

얜 또 언제 왔데.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금발의 꼬맹이가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는 모습이 보인다.

'후우. 뭐 이쯤 하면 된 건가?'

솔직히 이 상태에서 한 번 더 튕겨준 뒤, 전화로 사과 받고 내일 저녁 즈음 나타나는 게 최상이다.

이미 그러하기로 계획도 했고.

그러나··· 사라의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 난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알았어. 그만. 그만···! 안 나갈 테니 둘 다 진정해."

"저, 정말?"

"정말요?"

"그래. 뭐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그러잖아. 방금은 순간 너무 어이없어서 나도 홧김에 행동하긴 했는데···."

나는 사라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사실 나도 이 여자 떠나서 살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거든. 아마 나갔다 해도 한 시간도 안 돼서 돌아왔을 거야."

"정말이지···. 서후, 정말 사랑해!"

사라가 내게 안기며 입을 맞춰온다.

난 그런 그녀와 진한 키스를 나누며 머릿속으로 한 인간을 떠올렸다.

하하호호 매일 웃어도 모자란 이 집에 슬픔을 몰고 온 주범인 잭이란 남성을.

'하아···. 그 새끼. 어떻게 조져야 속 시원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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