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169 타깃과의 밀당
* * *
"응? 서후? 여긴 웬일입니까?"
호텔 지휘통제실에 들어서니 링링하고 스승이 있었다.
평온한 스승과는 달리 링링의 얼굴엔 약간의 피로가 엿보였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 잠이 줄어든 스승을 따라다니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난 별 일 아니라며 가볍게 대꾸했다.
"도망 왔습니다."
"네? 도망... 말입니까?"
링링, 이해 못하겠단 얼굴.
그러나 스승이 옆에서 한마디 하자 바로 고개를 주억인다.
"허허. 아무리 너라도 젊은 애 4명은 감당하기 힘든가 보구나."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착정을 해대니... 더는 안 되겠더군요."
"그래서 여기로 잠을 자러 온 거로군요, 서후."
링링이 눈을 가늘게 뜬다.
왜 나타나서 스승과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느냐는 의미다.
그런 그녀에게 두 손을 모아 표정으로 말한다.
'미안합니다.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냥 나가 죽으십시오.'
후우. 여전히 변함없이 쌀쌀한 링링이다.
그렇게 난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이틀간 힘을 충전했다.
***
"부우..."
금발의 아이가 볼을 크게 부풀리곤 주둥이를 길게 내뺀다.
그 옆에서 진갈색 머리의 엄마는 어깨가 축 쳐져있다.
엘리스는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투덜거렸다.
"아저씨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도 진짜 바쁘다고 하니 어떡하니. 후우..."
"아니, 그래도 연락은 해야지!"
"그... 연락은 매일 와."
"내 말은 아침, 점심, 저녁, 잠자기 직전 이렇게 4번은 와야 한단 뜻이야!"
그 말에 사라는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그녀의 바람 또한 딱 그러했기에.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늘 괴리감이 있는 법이다.
사람은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하니, 그 부분은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아빠도 가끔은 일하느라 집에 못 들어오는 날도 있었잖니?"
"훔... 그래도 이틀은 안 넘긴 것 같은데."
"그것도 그러네."
다시 축 쳐진 사라.
그리고 입을 삐죽 내민 딸 엘리스.
그때 전화가 왔다. 누군가 하여 보니 서후다.
"어? 아저씨다!"
"정말?! 어서 폰 이리..."
그러나 손을 내미는 엄마를 무시하고는 직접 전화를 받는 엘리스.
사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딸아이의 대사를 듣고는 더더욱.
"여보세요. 아저씨! 다 큰 남자가 5일 동안 여자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게 말이 돼요!"
"에, 엘리스... 엄마에게 폰을 어서 넘겨주렴..."
"바빴다구요? 그건 변명이죠! 1분 얼굴 보고 가는 게 그렇게 힘든가?!"
"딸...? 제발 전화 좀..."
"집에 올 생각 없으시면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뚝.
사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는 그대로 통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허공에 들려 있는 사라의 손이 하강해 바닥에 툭 떨어진다.
"엄마 걱정 마. 아저씨 아마 오늘은 오실 거야."
"에...?"
"예전에 낸시네 엄마가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남녀 간에는 밀당이 중요하댔어."
"딸... 그건..."
"걱정 마. 진짜 올 거라니깐?"
팔짱을 끼고는 자신만만해 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사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팔을 끌어 모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으나 밀당도 타이밍이 있는 법이다.
생계가 걸린 일을 가지고 밀당을 하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엘리스. 아직 우리 딸이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똑 부러질 만큼 영리하지만 아직 7살밖에 안 된 어린 딸아이에게, 사라는 어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연애도 중요하지만, 결국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다들 일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후엥...?"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똑똑한 만큼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른 건지 깨달은 것이다.
"그, 그럼 어떡해 엄마? 그... 내가 다시 연락을 해볼게!"
"아냐. 엄마가 할게."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아이가 오줌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 대는 걸 보며, 사라는 엘리스가 서후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계속 연락을 안 받는다.
"어떡해. 나 때문에 아저씨 화났나봐. 후에엥..."
"아니야. 아저씨가 지금 바빠서 그런 걸 거야."
"...정말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묻는 질문에 사라는 밝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속은 타들어갔으니...
'어떡하지. 정말 화가 난 걸까?'
숨이 턱 막힌다.
뭔가 급체를 한 것처럼, 가슴에 응어리진 게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로 인해 점점 말이 없어지는 두 사람.
그렇게 두 모녀가 의기소침해져 무거운 침묵을 유지할 때였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린다.
"예에... 누구시죠?"
"서후야."
"에? 서후?!"
"아저씨?!"
아니, 이 남자가 왜 이 시간에?
기쁜 마음으로 현관으로 달려가니, 한 발 먼저 도착해 문을 열고 있는 딸아이가 보인다.
철컥. 문이 열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이마에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엘리스는 그의 품에 폭 안기었다.
"아저씨! 후에엥. 미안해요... 제가 아저씨께 막 말한 거 그거 사실이 아녜요오..."
"하핫. 안다. 엘리스가 아저씨 놀려주려고 그런 거잖니?"
"히잉.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전화를 안 받아요!"
"아저씨도 엘리스 놀려주려고 그랬지!"
"에엑?!"
엘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주먹으로 남자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키가 작아 아이의 주먹질은 그의 고간을 계속 가격해댔다.
"야! 에, 엘리스. 잠만! 거긴 때리는 거 아냐!"
"뭐래요! 놀릴 게 있고 놀리지 말아야할 게 있죠! 익! 이익!"
그러나 그런 둘의 투닥거림은 이내 멈추었으니...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던 사라가 엄한 목소리로 엘리스를 꾸짖었다.
"엘리스 그만 하렴. 아저씨에게 그 무슨 버릇이니?"
"아, 아니... 그게..."
"엘리스?"
아이가 몸을 축 늘어뜨린다.
그녀의 엄마가 저리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 그녀는 아저씨에게서 떨어져 흘끔흘끔 눈치를 봤다.
사라가 굳은 얼굴로 남자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일 때문에 바쁘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근데 요 며칠 계속 생각해봤어. 일이 우선인지, 아니면 지금 만나는 인연이 먼저일지."
"에에? 그게 무슨...?"
남자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눈빛이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그는 찬찬히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걸 선택해야 할지를 말이야. 그러던 중, 아까 엘리스와 통화하며 깨달았어. 지금 그녀를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고."
사라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손을 가슴 위에 올려 진정시켰으나, 그녀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대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사라?"
"그... 일은 어떻게 하고?"
"휴가 좀 보낸다고 통보하고 왔어."
"에에? 그러다가 퇴사 당하면 어쩌려고?!"
"잘리면 뭐 별 수 없지.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이런 예쁜 미녀와 귀여운 아가씨와 맺어질 수 있다면 말이야."
"서후..."
사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곧바로 딸아이와 함께 남자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사랑해!"
"아저씨 저두요!"
"그래그래."
남자는 두 모녀를 끌어안아 등을 토닥토닥 해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굉장히 복잡 미묘했다.
***
약 30분 전.
'후우. 그럼 시작해볼까.'
난 타깃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제 슬슬 밀당을 할 때가 다가왔다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여보세요.
응? 이 목소리를 엘리스?
요 대응하기 곤란한 꼬맹이가 사라 대신 연락을?
뭔가 폭풍이 밀려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그건 곧 현실로 이루어졌다.
아저씨! 다 큰 남자가 5일 동안 여자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게 말이 돼요!
"아, 아니... 그건 아저씨가 일하느라 바빠서..."
바빴다구요? 그건 변명이죠! 1분 얼굴 보고 가는 게 그렇게 힘든가?!
"그건 그렇긴 한데... 거기에는 다 사정이..."
집에 올 생각 없으시면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뚝.
"......."
연락이 끊겼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심히 고민이 든다.
타깃의 심경에 변화가 찾아온 건가? 그래서 날 밀어낼 생각으로 딸에게 전화를 받게 한 거고?
'아냐. 절대 그럴 리 없어.'
내 오랜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타깃은 똥줄을 타고 있을 거라고.
특히 어제까지도 사랑과 애틋함이 넘치는 통화를 주고받았다.
현재 타깃은 우발적인 행동을 보일 단계 또한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꼬맹이 녀석. 장난을 친 거로구만.'
그걸 증명하듯 조금 있으니 걸려오는 전화.
누군가 하여본즉... 역시나 사라다.
그러나 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꼬맹이 좀 골려 줄 겸. 그리고 겸사겸사 잡아당기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밀치기 위해.
'조금은 쇼맨십을 부려볼까?'
일부러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내려, 타깃이 있는 집까지 전력으로 뛴다.
그렇게 약 5분가량을 뛰자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초인종을 누르면...
"아저씨! 후에엥. 미안해요... 제가 아저씨께 막 말한 거 그거 사실이 아녜요오..."
날 격하게 반겨주는 엘리스와 말은 안 하지만 표정으로 반가움을 표하고 있는 사라.
설마 내가 올 거라곤 생각을 못했는지, 두 모녀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작전은 이로써 거의 성공.'
이제 마지막만 남았다.
사라를 세차게 밀어냈으니 훅 잡아당길 일만.
난 매우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미 수많은 여인들을 섭렵해본 내게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걸 선택해야 할지를 말이야. 그러던 중, 아까 엘리스와 통화하며 깨달았어. 지금 그녀를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고."
사라의 얼굴에 감동이 떠오른다.
그걸 보며 확신했다.
이제 이 여자,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할 것이라고.
"혹시...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사라?"
"서후 사랑해!"
고혹적인 백인 미녀가 진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내게 안긴다.
그녀의 딸인 금발 꼬맹이 또한 한 쪽 다리에 매달린다.
그런 두 모녀를 꼬옥 안아 토닥토닥해준다.
'...순조롭군.'
모든 게 잘 진행되고 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매끄럽고 더 나은 방향으로.
다만 문제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