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165 은거노인의 사생아
* * *
민아는 생각보다 아주 잘 놀고 있었다.
걱정한 게 무색하게 애들하고 굉장히 친해져 있었다고 할까.
도리어 나랑 함께하느라 따로 떨어져 있던 여우가 어색해할 정도였다.
'아마 약간은 맹하고 순수한 그런 부분이 좋게 작용한 거겠지.'
임하나 또한 단순하니 척척 맞았을 것이고, 서연의 경우엔 그동안 주변에 순수한 의도로 붙어 있던 애들이 없었던 탓인지 제법 신선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여우도 빠르게 적응해 나간다.
본래 눈치가 빠삭하고 연기를 잘 하니 금세 무리에 파고든다.
"그럼 아저씨랑 예림이도 왔으니까 우리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오케이!"
"애들아. 그냥 우리 어디서 좀 쉬면..."
그러나 알짤 없다.
"아저씨 빨리 가요!"
"고고!"
***
고요한 방안.
마치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한 착각마저 드는 어느 사무실에 한 남자가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얼굴에 자리한 수많은 주름들은 그가 겪어온 세월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고요함을 깨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꾸벅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중년 남자에게 보고를 올렸다.
"회장님. 차지욱이 움직였습니다."
"차지욱... 차지욱..."
남자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자신이 떠올린 인물이 맞는지 되묻는다.
"동생의 사생아 말인가?"
"예. 아무래도 미국에 계신 걸 알아채고 접근하려는 것 같습니다."
"...매를 버는군."
대한민국을 이끄는 기업, 한성그룹의 총수 강 회장은 과거를 떠올렸다.
약 20년 전.
그의 동생을 제일 가까이서 경호하고 보조하던 여인이 임신을 했다.
그녀는 그걸 몰래 숨기고 은퇴를 했었는데, 당시 강 회장은 그녀에게 경고했었다.
평생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의 돈은 주겠다. 그러니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는 잊고 살 거라.
그동안 동생 곁에서 고생한 것도 있고 해서, 약 100억 원의 돈을 주고 그녀를 내보냈다.
그리곤 은밀히 감시를 붙였다.
비밀을 잘 간수하고 있는지, 그리고 혹 아이가 빼어나다면 반대로 데려오기 위해서.
그러나 아이는 정말 별 볼일 없었다.
재능은 있으나 제 어미를 닮아 욕심이 많았다.
지금 그의 동생인 2인자의 포지션을 잇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했는데, 녀석은 하는 일마다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 만큼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결국 우려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한 년이 한성그룹에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지욱아. 잘 듣거라. 넌 한성 그룹의 2인자이신 은거 노인 강태백님의 사생아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그 어미 때처럼 일단 잡아올까요?"
"...일단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그래도 명색이 한성그룹의 핏줄이니, 함부로 피를 흘리진 말아야지.
'그러나 일을 망치려 든다면...'
강 회장은 3년 전 그 어미를 떠올렸다.
제발 살려달라며. 자신이 말실수 한 것이니 제발 아들과 자신을 살려달라며 용서를 구하던 한 여인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 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
아이들과 놀고.
사라와 엘리스를 만나고.
그렇게 일주일은 금방 흘러갔다.
하루 쉬고는 매일 같이 찾아가서 그럴까.
타깃은 이제 나와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슬슬 작전을 시작할 때로군.'
가까워졌으니 이제는 거리를 벌리며 애태울 차례.
난 바쁠 거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집에 발을 뚝 끊었다.
그러고 3일째 되는 날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서후. 나야, 사라.
"응. 간밤엔 잘 잤어?"
응!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그게... 혹시 오늘은 올 수 있나 해서. 엘리스가 서후 보고 싶데. 우리 얼굴 못 본지 꽤 됐잖아? 그... 나도 보고 싶고.
"미안.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아, 아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폰 너머로 사라의 감정이 느껴진다.
속상함과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전달되어 온다.
그러면서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깨가 축 처져 의기소침해 하고 있을 모습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거리를 벌려야 한다.
머리를 차갑게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사라의 슬픔이 전달돼 오자, 그게 쉽지가 않았다.
후우. 결국 칼같이 끊어야 하건만, 난 조금의 여지를 건네주고 말았다.
"일 끝나고 나면 바로 달려갈게. 좀만 기다려줘."
"응! 기다릴게...!"
전화를 끊었다.
왜 그랬나 후회가 든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은 두근두근 뛴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게 대체 얼마만인 거지?'
***
그를 만난 순간, 사라는 그가 바로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임을 느꼈다.
첫 만남부터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위험했던 딸아이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것부터가.
그를 만난 뒤로는 흑백의 세상이 제 빛을 찾아갔고.
암울하기만 하던 그녀의 인생 또한 다시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라는 그에게 금세 푹 빠져들었다.
그와 두 번째 만남을 가지기 전부터.
'만난 이후로는 더 빠져들었지.'
마치 서로 다른 전극이 만나는 것 같았다.
덜렁대는 자신의 성격과는 반대로 세심한 성격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러면서도 남자다운 자신감에 매료되었다.
잘 생긴 얼굴은 덤. 심지어...
'대박. 이게 남자 물건이라고...?'
야한 영상에서나 볼 법한 물건을 달고 있는 걸 본 사라의 눈은 단숨에 크게 뜨였고. 실제로 그 좆맛을 본 이후로는 그것만 봐도 아랫도리가 찡하고 울릴 정도였다.
그 거근이 들락날락 할 때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입 사이로 터져 나오는 앙앙대는 신음 소리를 최대한 낮추는 것뿐이었다.
그게 너무도 대단해, 순간순간 딸아이가 있는 것도 잊은 채 푹 빠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미쳤지 정말.'
딸이 바로 뒤에서 TV를 보는데 거기서 가슴을 내놓고 좆을 빨다니...
다시 생각해봐도 잠깐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시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는 서후라는 남자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요 근래 바쁜지 계속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
사라는 그것이 못내 속상했다.
연락이라도 좀 주면 이 아픈 마음이 조금은 덜 하겠건만, 정말로 바쁜 건지 요 3일간 문자 한 통도 주지 않았다.
'그냥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까?'
근데 망설여진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항상 쿨하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해온 그녀였건만, 왠지 그 앞에서는 심술이 났다.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안 하자니 똥줄이 탄다.
하루 종일 계속 서후는 뭐하고 있나 생각이 들고.
그에 결국 사라는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그런 그녀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쿵쿵 거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서후. 나야, 사라."
응. 간밤엔 잘 잤어?
"응!"
그런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연락을 한 거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몰라주는 그가 미운 사라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존심을 굽히고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 마음이 전달이 돼, 그가 자신의 집으로 오길 바라며.
"아, 그게... 혹시 오늘은 올 수 있나 해서. 엘리스가 서후 보고 싶데. 우리 얼굴 못 본지 꽤 됐잖아? 그... 나도 보고 싶고."
그러나 그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미안.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아, 아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걸 알지만,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애처럼 왜 이러지.
서후는 일 때문에 바쁜 건데.
고작 이제 3일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사라는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에서 눈물이 났다.
'그냥 말이라도 좀 해주면 안 돼? 일 끝나는 대로 바로 달려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따스하게 말 한마디 해주면 안 돼?'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달이 된 걸까?
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일 끝나고 나면 바로 달려갈게. 좀만 기다려줘."
아... 그 순간 찾아오는 평안함.
사라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기다릴게...!"
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다.
물론 연락 전후로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그는 바빠서 오지 못하고, 사라는 그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마지막 한마디로 인해, 최근 황폐했던 그녀의 마음은 단번에 풍족해졌다.
철컥.
방문이 열린다.
그리고는 그녀의 딸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묻는다.
"엄마? 아저씨 오늘도 못 온데?"
"응. 아직은 바쁘다고 하시네."
"흥.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아내에게 하루 세 번 연락은 에티켓 아니양?"
"아, 아내라니. 너도 참..."
사라가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엘리스, 눈을 크게 뜨고는 쪼르르 달려와 추궁.
"어? 엄마, 지금 운거야?"
"아냐. 엄마가 울긴 왜 울어?"
"우이씽. 여자를 울게 만들다니! 매너가 똥이네. 아저씨 오시면 내가 뭐라고 해야겠엉!"
"후훗. 고마워, 우리 딸!"
엘리스가 사라의 품에 안긴다.
사라는 자신의 딸아이를 끌어안으며 가만히 남자를 떠올린다.
하루 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자리한 한 동양인 남자를.
"아저씨 빨리 왔으면 좋겠당."
"엄마두."
"이번에 아저씨 오면 엄마는 가만히 있어. 뭐라고 하는 건 내가 맡을게!"
"그래. 우리 딸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