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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화 〉 #164 복잡한 감정 (168/200)

〈 168화 〉 #164 복잡한 감정

* * *

"그럼 나 이만 갈게."

"응. 사랑해, 서후!"

"아저씨, 또 와요!"

"그래."

사라의 진한 키스를 받고, 엘리스와 포옹 한 번 한 뒤 그 집을 나선다.

그런 내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다.

'대체 뭐지. 이 감정은...'

나는 나란 인간을 안다.

아마 대부분 사십 이상 산 사람들이라면 스스로에 대해 잘 알 것이다.

자신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지금 본인의 상태는 어떠하며, 오늘의 컨디션은 어떤지 등등.

일이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임무 지역에서 퇴근하는 것인 만큼 홀가분함을 느껴야 하건만... 지금의 내 심정은 매우 복잡하기만 했다.

'분명 시작은 그 때였어.'

민아네 엄마가 겹쳐 보이고 옛 과거의 상처를 꺼낸 순간부터일 거다.

마음에 응어리 진 것 마냥 찜찜한 이 기분이 드는 건.

그러나 그런 것에 빠져드는 건 나와는 맞지 않아, 바로 훌훌 털어버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일행들이 있는 호텔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아저씨!"

"하하핫. 그래."

여우가 폴짝폴짝 뛰며 내 품으로 안겨 온다.

얼굴에 완전히 꽃이 핀 게, 얼마나 날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았다.

"수고했어, 서후."

"수고했습니다."

도향은 손을 흔들고, 링링은 고개를 까딱. 스승은 어서 오라며 고개를 주억인다.

"근데 어째 나만 열심히 일한 것 같은 기분은 뭐지? 다들 피부가 좋은데?"

"그럴리가용! 아저씨, 저 봐보세요. 어서용!"

여우가 얼굴을 들이민다.

내 걱정에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단다.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됐느냐."

"일단은 기회가 됐기에 진도를 좀 빼 두었습니다. 벽을 좀 허물어 뒀어요."

"그래. 그리고?"

"호감은 따로 올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도향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해 버려서."

도향이 짠 시나리오 중에 이번 일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게 있었다.

질투 많은 의뢰자가 타깃 주변에 남자가 얼씬도 못하게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내가 다가서는 순간 홀라당 빠져들 것이라고.

도향이 씨익 웃는다.

"내가 뭐랬어.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니깐?"

"언니, 정말 대단해요!"

"별거 아냐. 그냥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되는 문제야. 특히 인과관계. 어떤 행동이 취해졌을 때, 그로 인한 결과가 반드시 되돌아올 거란 걸 늘 염두에 두면 예측하기 쉽지."

그렇다.

이 세상은 인과율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

내가 가볍게 취한 행동 하나하나도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도출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냐?"

팀과 정보 교류도 없이 단독으로 3일간 타깃과 붙어 다녔다.

이럴 경우, 보통 그 사람의 의견을 최우선시 한다.

"글쎄요. 일단 일주일 정도 호감을 다져놓고, 한창 달아올랐을 때 거리를 벌릴 생각입니다."

"껄껄. 애 태우겠단 뜻이로군.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차례 울리는 진동.

누군가 본다. 사라다.

사라 : 숙소에 잘 도착했어?

나 : 응. 이제 막.

사라 : 근데 나 어쩌지?

나 : 왜?

사라 : 나 피임약 먹는 거 깜빡했어...

결국은 내 의도대로 된 건가.

아침저녁으로 정액을 주입해줬다. 자궁에 직접 넣어주고, 그런 뒤 최소 30분은 씻지 못하게 붙들어 뒀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임신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난 문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답장을 바로 보내지 않고 살짝 기다렸다.

"아저씨? 뭐해용? 폰을 가만 바라만 보고?"

"...잠깐만."

아마 내 예상대로라면, 사라는 자신이 피임에 실패했단 문자를 보낸 뒤 계속 폰 화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것도 확인했을 것이고.

슬슬 왜 답장이 없나 똥줄이 타기 시작하겠지.

그렇게 2분.

안 좋은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올 즈음 답장을 보내준다.

나 : 사라, 사랑해! 만약 임신을 하게 되면 꼭 낳아줬으면 좋겠어. 앞으로 너와 나, 그리고 엘리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역시. 보내자마자 바로 읽음 표시가 뜬다.

그러고 답장은 약 1분가량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감동을 해, 울먹거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고 돌아온 답변은 이러했다.

사라 : 정말 그래도 돼?

나 : 응. 책임질 테니까. 지금 만날래?

사라 : 아냐. 서후도 할 일이 있잖아. 일 다 마치고 와.

나 : 그래. 빨리 끝내고 갈게.

그것으로 문자는 끝이 났다.

"후우."

"왜 그러느냐?"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생각보다 타깃의 호감도가 너무 높네요. 바로 보고 싶어 하는군요."

"좋은 현상이지. 다만 오늘 하루는 돌아가지 않는 게 좋겠구나."

"제 생각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원한다고 넙죽넙죽 주면 불은 오히려 꺼지기 마련.

불이 잘 타오를 수 있게 적당히 재료를 넣어주면서, 바람을 때려줘야 오히려 활활 불태우는 법이다.

'어찌됐든 오늘은 휴식인가?'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걸 덥석 집어가는 여우.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능숙하게 내 잠금을 해제한다.

"어? 야. 너 내 꺼 잠금 비번 어떻게 알았어?"

"흥. 제가 아저씨에 대해 모르는 걸 찾는 게 오히려 더 빠를 걸용?"

"뭘 보려고 그래?"

"그야 당연히 문자내용을 확인..."

그러나 여우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옆에서 도향이 쏙 빼갔기 때문이다.

"아앗! 언니!"

"야, 시끄러. 언니 애 떨어지게 그리 소리 질러야겠니?"

"언니! 저 아직 못 봤단 말이에요!"

"나도 알거든? 근데 너 이거 보고 배 안 아플 자신 있어?"

소파에 누워, 머리 위 방향으로 폰을 쥔 팔을 쭉 내뻗은 도향.

그 위에 올라타 똑같이 팔을 쭉 뻗어 그걸 되찾으려는 여우.

도향의 물음에 여우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선다.

도향은 눈을 반만 뜨고는 그녀를 몰아세웠다.

"이 언니가 요새 너 때문에 얼굴 주름이 는 거 아니?"

"......."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지어 새벽 내내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꼴에 아주 죽을 맛이다. 그런데 이것까지 본다? 여우야. 언니가 아까 말했지? 인과관계."

...끄덕끄덕.

"너 이 문자 내용 봤다간 언니 따로 숙소 잡아야 할지도 몰라. 나뿐만 아니라, 저기 링링이랑 영감도. 그러니 그냥 포기하자. 오케이?"

"네에..."

여우의 팔이 힘없이 밑으로 하강한다.

똑똑한 아이인 만큼, 지금 도향이 자신을 걱정해 하는 이야기라는 걸 이해한 것이다.

"그렇게 우울해 할 시간에 저 녀석이랑 빨리 밖으로 나가! 망부석 마냥 여태 기다려놓고, 폰에 정신 쏟지 말고."

"헤헷. 알겠어용, 언니!"

그래도 내가 있단 사실에 바로 힘을 되찾은 여우.

내 곁에 찰싹 붙어 좌중을 살피자, 다들 어서 가라며 손을 흔들어준다.

그에 신이 난 여우가 방방 뛰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럼 저 이만 먼저 퇴근할게용!"

"아저씨, 여기로 가요. 여기용!"

겨우 내 가슴팍에 오는 쪼그마한 꼬맹이에게 잡혀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여우는 마치 요 3일간 받은 스트레스를 모조리 풀겠다는 듯, 뉴욕 시내를 아주 휩쓸고 다녔다.

'인과응보로군.'

어떤 행동이든 반드시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다.

난 그걸 아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새삼 스승의 심정이 좀 이해가 되긴 하네.'

종종 스승이 링링에게 질렸단 표정을 지을 때가 있는데, 오늘에서야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카페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4시간 만에 주어진 휴식을 만끽하며, 내 옆에서 행복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있는 여우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 걔들은 뭐하고 있데?"

"누구용?"

"갸들 있자나. 너 닮은 꼬맹이 셋."

"에엑. 안 닮았거든요!"

"글쎄. 내가 봤을 땐 너무 닮았는데."

민아, 여우, 하나, 서연.

가만 보면 하나 같이 초딩스럽다.

민아는 순수하다 못해 좀 맹한 구석이 있고.

여우는 애교를 넘어 떼를 쓴다.

하나는 오직 그 생각 외엔 머리가 텅 빈 것 같고.

서연은 은근 소심해 잘 삐진다.

즉, 말과 행동이 모두 유치찬란해 초딩답다는 것.

"아저씨!"

"응?"

"방금 무슨 생각했어요? 설마 저희들보고 막 초딩 같다고 생각한 거 아니죠?"

뜨끔.

...의외로 잘 알고 있네?

그래도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다.

아니라고 둘러댄다.

"아냐. 그런 생각 안 했어."

"정말요?"

뭔가 굉장히 찜찜하단 얼굴로 바라보기에, 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

여우의 입에서 곧바로 기분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헤헤..."

특히나 이런 단순한 행동이 더 그렇게 보이도록 하긴 하지.

아무튼 걔들도 이곳에 데리고 왔으니 관리를 하긴 해야 하겠는데...

놓아줘도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우를 보며 묻는다.

"예림아. 이렇게 단둘이 노는 것도 좋지만, 애들 불러서 같이 노는 게 낫지 않을까?"

"힝. 설마 저로 만족 못하는 거예용?"

"그게 아니라, 일단 민아만 봐도 혼자 겉돌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서 그래."

"하긴.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한예림.

어릴 적 만난 인연으로 내게 푹 빠져든 아이.

그러다 그 감정이 뒤틀려 집착까지 하게 된 여인.

집착녀 또한 사람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매우 순수하고 깨끗한.

그래서 그 대부분은 굉장히 착하다.

각성하기 전후를 비교하면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좋아용. 민아에게 연락해 볼게요!"

여우가 손을 바삐 움직인다.

그러고 조금 있으니 울리는 벨소리.

"응, 민! 어디야!"

"그래? 오늘 아저씨 쉰다는데 같이 놀랭?"

"응. 여기가 어디냐면..."

여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러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친다.

바로 눈웃음을 치는 아이. 얼마 전 그녀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 만약 아저씨가 나이 들어 이 일을 그만두면, 그땐 절 선택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런 날이 올수도.

다만 그때 정말 이 아이를 선택할 수 있을까.

수많은 여인들 중, 과연 난 이 아이를 선택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

눈앞으로 한 인영이 어른거린다.

오늘 아침까지 함께 있던 진갈색 머리의 백인 여성이.

­ 굉장히 슬퍼보였어. 얼굴은 웃고 있는데 안의 내면은 울고 있었다고 할까?

­ 아냐. 내가 더 고맙지. 그런 이야기를 해줄 만큼 날 믿고 있단 뜻이니까.

­ Don't worry, Be happy.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져.)

후우... 복잡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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