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151 스승의 과거와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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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앞에서 보인 반응이 꽤나 격렬했기에 바로 그 날 올 줄 알았던 연락은 그로부터 무려 이틀이 지난 뒤에야 왔다.
심지어 통화가 아닌 문자로 먼저 왔었는데, 그걸로 봤을 때...
"볼 것도 없네. 서후 네게 꽤 마음이 있나 본데?"
"그런 것 같아."
물론 100%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나와 도향의 대화를 이해 못한 여우가 끼어들며 질문.
"왜용? 호감이 있으면 더 빨리 연락 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일반적으로는 그게 쉽지 않아. 타깃이랑 서후는 접점이 굉장히 단편적이잖아? 본인은 고마움을 크게 느끼고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정작 연락하려고 보니 상대는 그녀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상황인 거지."
"음... 잘못하면 혼자 설레발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있다 그 말이군용."
"그래. 사실 그냥 감사 인사 한 번 하는 거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렇잖아? 그런데 매우 기뻐하면서도 정작 번호를 받고 몸을 움츠렸다? 그럼 경우의 수가 몇 없지."
"흠... 생각과 실제 행동엔 뭔가 괴리감이 상당하네요."
난 다시금 스마트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사라 : 안녕하세요. 저 혹시 서후씨 번호 맞으신가요?
나 : 네, 맞습니다만.
사라 : 전 사라 밀러라고 합니다. 그 예전에 하와이에서 딸이 다칠 뻔한 걸 구해주셨었는데...
나 : 아... 그때 보신 갈색 머리의 아리따운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하와이 여행 잘 즐기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사라 : 네. 딸아이와 잘 놀다가 지금은 뉴욕에 와 있어요. 뉴욕에 살거든요.
나 : 아, 정말요? 저도 지금 뉴욕에 있는데. 그것 참 우연이네요.
사라 : 저어... 그 때 그 일로 감사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저녁식사 대접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답장은 당연히 '예.'라고 보냈다.
그 이후로는 아직 답장이 오지 않은 상태다.
아마 날짜라든지 시간이라든지 계획하고 있는 것이겠지.
"분명 활기차고 적극적인 성격인데... 아무래도 남편 일이 충격이 크긴 컸나봐. 생각보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네."
도향의 한마디에 스승과 링링, 여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타깃의 과거 기록들을 조사해 봐도, 학교서든 동아리서든 사회활동이든 굉장히 열정적으로 움직였음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문자를 보내면 10초도 안 돼서 읽으나, 답장이 오기까지는 몇 분씩 걸리는 상황.
"끄으으...! 일단은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
도향이 기지개를 늘어지게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나와 일행들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난 요 앞 수목원에 잠깐 갔다 올 테니까, 뭔 일 있음 연락해!"
"허허.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오게나."
"오케이~"
그렇게 도향이 사라지고.
날 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승.
"그럼 식사까지 1시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모처럼 단둘이 이야기나 좀 하겠느냐?"
불편하기도 하고. 링링의 따끔한 시선이 있어 피하고는 싶으나, 불시의 질문에 딱히 변명거리가 없던 난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
의도치 않게 하나둘 흩어지고.
호텔 방안으로 단둘이 남게 된 예림과 링링.
링링은 그 주인을 바로 따라 나서려 했으나, 따라오지 말라는 수신호에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애꿎은 화분의 식물을 톡톡 손가락으로 때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것은 방안이 너무 칙칙하다며 도향이 밖에서 장만해온 허브 중 하나였다.
'아니, 대체 서후는 무얼 하는 겁니까? 멍 때리고 앉아 있다 제대로 변명도 못하고 주인님을 따라가는 꼴이라니요...!'
서후는 그 스승을 싫어한다.
혐오나 그런 의미는 아니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자를 물건 다루듯 하는 행태에 뭔가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스승을 아버지처럼 생각은 하나, 상대하기는 꺼려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저런 변명을 해대며 피하는 게 보통이었으나, 아까 대체 뭔 생각 중인지는 몰라도 그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에게서 주인님과의 오붓한 시간을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툭. 툭툭. 툭툭툭.
그 답답함에 마구 식물을 때려댄다.
식물의 고개가 숙였다 일어서길 계속 반복한다.
"링링 언니?"
"으음? 아, 예림 양."
"그냥 편하게 예림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녀를 올려다보는 조그마한 소녀를 바라보며, 링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예림."
여우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다.
링링은 직감적으로 이 소녀가 무언가 고민이 있고, 지금 그걸 그녀 자신에게 상담하려 한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고민이란 아마도 서후와 관련된 것일 테지요.'
하지만 아직 그녀 자신의 연애도 성적이 저조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남을 상담해 주는 게 맞긴 하는지 약간 혼란스럽다.
그리고 소녀는 예상대로 그녀에게 자신의 고민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그... 아저씨에게 들었어요. 링링 언니에 대해서요."
"무얼 말입니까?"
"언니, 할아버지 좋아하셔서 오랜 시간 따라다녔다면서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었으나, 링링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넘게 사랑하는 이 옆에서 감정을 다스려온 그녀에겐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의문은 들었다.
대체 무엇을 물어보려고 이런 운을 띄우는 걸까.
링링이 소녀를 가만 바라보자, 아이가 머뭇머뭇 하더니 조용히 묻는다.
"혹시 지치거나 하시진 않았나요?"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은 혼돈 그 자체로... 겉만 멀쩡했지 안의 내면은 완전히 너덜너덜한 상태였으니까.
'왜 아니 지칠까요.'
아주 기나긴 시간을 따라다녔다.
그로 인해 결국 그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었으나, 사랑은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애정을 달라고 간구할 수도, 그 감정을 내비치지도 못하는 자리였다.
그녀가 아는 주인은 그런 걸 비칠 경우 가차 없이 그녀를 내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종종 더 힘든 건, 사랑하는 이가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성적으로 봉사하고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언젠가를 그녀를 돌아봐줄 거라는 생각에.
'지금은 그 생각조차도 크게 흔들리고 있지만...'
소녀를 내려다본다. 그리곤 묻는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차가워졌기 때문일까.
소녀가 움찔 몸을 움츠린다.
그에 링링은 오해 말라며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소녀는 조심스레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냥 저도 같은 처지가 된 것 같아서요. 미래가 걱정도 되고. 언니는 어떻게 버텼나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얼마 전. 처음 임무에서 대박을 쳤을 때, 예림이는 하늘로 날아갈 듯 매우 기뻤다.
첫 무대에서 한 건 제대로 했다는 생각에.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었지만, 운도 결국엔 실력 아닌가?
그러나 그 열기가 차차 식고.
정작 아저씨가 다른 여자와 문자를 나누고 만날 계획을 잡는 걸 보니, 내가 뭐 때문에 그리 노력하고 기뻐했나 싶은 기분이 드는 그녀였다.
"그래서 언니에게 조언을 받고 싶어서요. 참을 만 하다가도... 한 번씩 머리가 하얘지면서 막... 그...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 때 있잖아요...? 흑... 진짜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흑흑... 전혀 모르겠어요..."
소녀가 눈물을 흘린다.
링링은 그 눈물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보다 무려 십여 년을 먼저 겪어왔었기에.
그에 가만히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고 다독여 주었다.
희망적인 말로.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로.
"걱정 마십시오, 예림. 서후는 좋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여자가 심적으로 고통 받는 걸 즐기지도, 여자를 도구처럼 사용하지도 않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믿고 기다려도 됩니다. 믿고 기다려도 돼요."
"저, 정말 그럴까요? 훌쩍... 링링 언니...?"
"네.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지금 하는 건 어디까지나 일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흑흑. 고마워요, 언니. 고마워요..."
소녀가 여인의 품에 안겨 목놓아 운다.
링링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전 예림이 부럽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그러나 저와 주인님은...'
링링은 코앞으로 다가온 냉혹한 현실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선 그녀답지 않게 한 줄기 물방울이 쪼르르 흘러 내렸다.
***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울리는 도심.
스승이 조용한 곳을 원할 것 같아, 난 차를 이끌고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 또한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전혀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마약을 하고 쓰러져 있는 이들과 돈이 없어 구걸하는 거지들이 즐비하다.
그에 난 차를 몰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해안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스승 또한 마음에 들었는지 먼저 차문을 열고 내리기 시작했다.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스승의 옆을 걸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따라온 경호 인력들이 넓게 포진해 사주를 경계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대기업의 2인자.
사실상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한다는 실세 중 하나.
그가 이런 평범한 늙은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마 극히 드물 것이리라.
그는 백사장. 바닷물이 가까이 닿는 그 근처까지 가, 밀려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물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 말이다.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래. 몸이 안 좋아서 대략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학교도 제대로 가질 못했지. 그래서 늘 병실이나 방에 앉아 있기가 일쑤였다."
스승을 오래 따라다녔지만,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그는 찬찬히 자신의 과거를 풀어나갔다.
"그래서 늘 생각했다.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난 이 세계를 살아가며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뭐 그런 것들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간호하는 이들 중엔 성격에 결함이 있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단다.
그녀는 스승의 부모가 있는 앞에서는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스승을 잘 보살피는 척 했으나, 그들이나 식모가 자리를 비우고 나면 자신의 일을 제대로 안 하고 빈둥빈둥 시간이나 때우는 참으로 쓸모없는 년이라 했다.
"한 번은 목이 말라 물 좀 가져다 달라 했는데, 알아서 가져다 마시라며 콧방귀를 끼더군."
"그걸 가만 놔뒀습니까?"
"당시 난 말이 없는 아이였다. 참을성이 있는 아이였지. 그녀도 얼마나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까 싶어 가만 나뒀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그년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마치 본인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굴곤 했었다."
근데 문제는 그게 너무 지나쳤고. 그날 8시간동안 물을 한 모금도 못 마신 스승은 그대로 상태가 악화돼 무려 일주일을 기절하듯 쓰러지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고 깨어났을 때 스승은 보았단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싹싹 빌며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비는 여간호사를.
"그 때였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여자란 생물을 내 마음대로 다루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고. 그러고 달려오기를 벌써 약 40년이로구먼."
노인이 바다 끝 지평선을 가만 바라본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붉은 황혼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오늘따라 스승의 주름이 더욱 깊어 보인다.
"난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몰라 하나하나 정리하는 중이다."
"그게 무슨..."
"전에 내가 부탁한 것 기억나느냐? 네게 내 모든 걸 맡길 터이니, 혹시라도 이후에 내 유지를 이어줄 적합자를 만나거든 물려주기로 한 것 말이다."
"예."
노인이 고개를 천천히 주억인다.
마치 그게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는 방법이라도 되듯.
"...링링을 부탁한다. 그 아인 예외다. 네가 맡아줬으면 한다."
"스승님. 그건 당사자 의견을..."
"그녀 또한 동의한 부분이다. 너와 링링. 각각 내 상속분의 5%씩 가져간다면 앞으로 생활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없겠지."
그 링링이...?
차마 믿기지 않지만, 스승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사실은 사실일 것이다.
"널 잘 서포트 해주고, 그 예림이란 아이의 적절한 스승 또한 되어줄 것이다."
스승의 고개가 내게로 돌아온다.
그 뒤로는 어느덧 붉게 타오르는 빛은 꺼져가고 어스름한 땅거미가 세상에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뭔가 깨달음이 온 난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스승님은 정정하시니 기억만 해두겠습니다. 그 사이 링링이의 생각도 바뀔 수도 있고요. 혹시 압니까? 임자 만나 새 출발 하고 싶다고 할지."
"껄껄껄. 그러면 너도 나도, 그리고 그 아이도 행복한 게지."
노인이 찬찬히 걸음을 옮긴다.
나 또한 그의 옆에 붙어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현재 분위기의 환기 겸 문득 궁금증이 들어 질문.
"그러고 보니, 그 때 그 간호하던 여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당시에도 한성기업은 거대한 회사였다.
자신의 핏줄에게 장난을 친 년을 가만 놔둘 리는 절대 없었다.
"죽기는 싫었는지 살려만 준다면 뭐든 하겠다고 하더군. 그걸 들은 내 형님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곤 그녀에게 일을 시켰지."
그 일이란 바로 스승이 싸는 똥오줌을 모두 입으로 처리하는 것.
"결국 병에 걸리더니, 시름시름 앓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더군."
"회장님이 꽤 무서운 분이시네요."
하긴. 가만 떠올려보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분이긴 했지.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당시의 느낌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을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스승의 형님이란 분은.
"뭐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꽤 정이 있으신 분이다. 너도 언젠가는 그걸 깨닫는 날이 올 게다."
"하핫. 그냥 전 앞으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으면 합니다."
상대하기가 너무 힘든 부류다.
강철마냥 감정이란 것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부분이.
대화 몇 마디에 마치 기력이 쪽쪽 빨리는 느낌?
"허허허. 그래그래."
스승이 기분 좋게 웃어 보인다.
그리고 그 때, 스마트 폰이 한 차례 울렸다.
타깃으로부터 연락이다.
사라 : 그럼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혹시 시간되실까요?
난 방긋 미소 짓고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 예. 그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