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3화 〉 #149 코드 네임 여우 (153/200)

〈 153화 〉 #149 코드 네임 여우

***

"어머. 오늘 날씨가 좋네. 그치 엘리스?"

"네에~"

"오늘도 장난감 가게에 뭐 나왔나 구경하러 갈까?"

"얏호오!"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는 금발의 아이.

그런 그녀를 한 여인이 허리 숙여 끌어안는다.

그에 따라 진한 갈색 머리가 나풀거리고. 팔다리가 길게 쭉쭉 빠진, 그러면서도 가슴과 엉덩이는 큼지막한 백인 여성이 아이를 들고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타깃은 매주 토요일, 날이 좋으면 장난감 가게들을 순회한다."

그러면서 노인이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에 펜으로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무려 일곱. 꽤 많이 들른다.

"보통 온기가 올라오는 11시쯤 출발을 해, 쇼핑을 마치고 1시쯤 식당에서 밥을 먹지. 그러고 집에 돌아오면... 2시."

"주어진 시간은 3시간이군요."

"우린 이 시간대를 공략할 생각이다."

사실 좋은 계획은 아니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다니는 엄마는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 말을 걸어도 대답만 할뿐 관심을 1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타깃은 평일에 보통 정해진 루틴이 없기 때문에, 계획 없이 그때그때 부딪치는 것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안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접근은... 아이가 장난감을 한참 고르고 있을 때가 좋겠군요."

"그렇지. 식사 전에 결착을 짓는 게 좋을 게야."

내 의견에 스승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여우 왈.

"식사 때는 왜 별로인 거예용?"

"후훗. 그건 네가 애 하나 낳아보면 알아."

"네에?"

도향의 대답에 이해를 못한 여우가 고개를 갸웃하고.

옆에 있던 링링이 대신 대답해준다.

"보통 아이를 키우는 여인들은 24시간 시달리다보니 늘 지쳐있습니다. 그나마 아침 시간대엔 힘이 있으나, 쇼핑이 끝나고 밥 먹을 때쯤엔 머릿속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지요."

"아..."

같은 여자라도 아직은 어려 경험과 심리에 취약한 여우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주변을 슥 한 번 돌아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름 대학교에서는 똑 소리 난다고 자랑하며 늘 방방 뛰곤 했는데, 이 그룹 안으로 들어오니 스스로가 굉장히 작아 보이는 모양이다.

그걸 눈치 챈 스승이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편다.

링링이 자연스레 그의 옆으로 붙어 등을 살살 두드려주고, 스승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새로운 신입도 왔으니 각자 자기소개부터 하도록 할까?"

"넹? 자기소개요?"

이해 못하는 여우에게 친절히 설명해준다.

"코드네임. 일종의 암호명이야. 종종 무전 쓸 일이 있어 만든 건데, 그냥 재미로 부르는 거니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아..."

일단 처음은 스승이 자신을 소개했다.

"난 킹이다. 앞으로 날 지칭할 땐 킹이라 부르면 된단다."

"네, 알겠습니당."

그러곤 날 바라보는 아이.

그로 인해 자연스레 내 차례가 되었으나 난 쉽사리 말문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아저씨?"

"후훗. 언니가 대신 말해줄게. 서후 코드네임은 조커야."

"아하. 근데 왜 그걸 말을 못 하시..."

도향의 생글생글 웃는 낯을 보곤 그제야 웃음의 의미를 깨달은 아이가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곤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그 조커가 그런 의미였어용?"

"아니, 원래는 지 스승을 넘어서겠다고 트럼프 카드에서 착안해 조커라고 지었는데, 어감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나랑 여기 링링이 한동안 놀려댔지. 그 뒤로는 소개할 때마다 부끄러워하더라고~"

어찌 아니 그럴까.

그에 바꿔보려고도 했으나, 두 여인이 합심으로 헷갈려서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고착이 되고 말았다.

"조커..."

여우가 날 보며 나직이 한 번 불러보더니 볼을 다시금 붉게 물들인다.

그런데 도리어 내가 더 부끄러운 건 왜일까.

건 10년 만에 불린 이름인데 거 되게 쪽팔리네.

다음은 도향 차례.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폭발 순간까지 새빨갛게 변해버린 여우는 자신의 스승에게로 고개를 돌려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럼 언니는 뭐예용?"

"나? 난 말이지 토끼♥"

"네...? 토끼요...?"

도향이 찡긋 윙크하며 말한다.

"나랑 제법 어울리지 않아? 하얗고 귀엽고 순박하고... 꼬옥 안아주고 싶게 생겼잖아?"

"아... 네..."

여우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수직으로 끄덕인다.

비위를 잘 맞추는 게 나중에 사회생활 잘 하게 생겼다.

"그럼 링링 언니는용?"

"전..."

여우의 시선을 받은 링링.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쿨하게 왈.

"양입니다."

"예...?"

"목자인 주인님의 인도와 보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

그러면서 자연스레 스승에게 몸을 기울인다.

그걸 본 여우, 그저 하하 웃는다.

그러나 여우와는 달리 그걸 가만 두고 볼 리 없는 도향이 옆에서 한 마디 했다.

"하긴. 양이 좀 문제긴 문제야. 눈 나쁘지, 방향감각이 없지. 그래서 잘 넘어지는데, 또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서질 못해. 심지어 완전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니깐? 그러면서도 스스로 보호할 힘은 없어."

그러자 링링, 이마에 십자 마크를 뽑아 올리며 왈.

"아까 오면서 제가 미국토끼를 검색해 봤는데, 와아...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귀여운 구석은 정말 1도 없고, 다리 근육이 무슨 캥거루 뺨치던데요? 아마 도향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으니 그런 토끼를 생각하고 이름을 지으셨겠죠."

"뭐 오동통해 뒤뚱 거리는 양만 할까."

"넓적다리 괴물 토끼만 하겠습니까."

두 여인이 서로를 매섭게 노려본다.

나와 스승은 그저 늘 보던 광경이니 그저 차나 한 모금 마시면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신참인 여우만 두 선배를 화해시킨다고 애를 쓴다.

그 모습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올라왔다.

'선배들이 싸우건 어쩌건 가만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어떻게든 화해시키려 애쓰는 그 작은 행동이 윗사람 입장에선 더욱 호감이 이는 법이지.'

무엇보다 적당히 어디 한 쪽에 편들지 않는 모습이 싸움 한두 번 말려본 솜씨는 아니라 더욱 마음에 든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작된 신경전이 지금까지 이어질 만큼 두 여인의 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여우는 고민을 하다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저기... 그럼 이제 제 차례인데, 저도 하나 지어서 말씀 드리면 되는 거예용?"

그러자 도향 왈.

"그럼 내가 추천해줘도 돼?"

"에... 넵!"

차마 선배이자 스승이 해주는 추천을 받지 않을 순 없고.

예림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향이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여우 어때?"

"에엑? 왜 여우에용...?"

그도 그럴 게, 여우라는 이미지가 좀 약삭빠른 느낌이 들지 않은가?

나름 머리를 굴리는 캐릭터나, 이솝 우화 같은 경우를 보면 2% 부족한 지능캐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도향의 한 마디에 불만을 쏙 감추는 아이.

"서후가 그러더라. 너 여우처럼 귀엽게 생겼다고."

"...정말요?"

하여튼 가만 보면 오히려 도향이 진짜 여우라니깐.

도향의 말장난에 넘어간 아이가 날 가만 바라본다.

딱 봐도 머릿속에 '서후, 여우, 귀엽게' 이 세 가지만 남은 상태다.

"예림아. 주위에서 하는 이야기 들은 필요 없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하려무나."

내 스승이 그리 진심어린 조언을 해줘도 소용없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예림이 왈.

"저어... 여우로 할게용..."

그 한 마디에 링링은 한숨, 도향은 킥킥 웃고.

그렇게 예림이의 코드네임은 여우가 되었다.

"그럼 우리 귀여운 신입의 이름도 정해졌겠다, 본격적으로 브리핑을 시작해 보자구나."

***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고.

한 건물 주위로 몇몇 부산스런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차를 하곤 차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부터 시작해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는 이, 도보 위를 걸으며 운동을 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떠드는 이들까지.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면서도 묘하게 한 건물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돌연 그곳의 문이 열렸다.

"와아. 엄마 오늘 날씨 되게 좋아!"

"어멋. 천천히 가렴, 엘리스! 엄마 문 잠글 때까진 기다려야지?"

그러곤 차를 타고 나서는 두 모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인물이 보고를 올린다.

"타깃이 목표지점으로 움직입니다."

­ 타깃이 A 구역에 들어섰다고 한다. 준비하도록.

연락을 받은 한 아이가 심호흡을 한다.

미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은 키에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한국인 미녀.

한예림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 거야.'

지금부터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두 모녀를 따라다니며 타깃의 특징이라든지 약속, 뭐 그런 걸 파악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평범한 손님행세를 하는 것.

그래도 처음이라 여우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해. 처음인 만큼, 사고 쳐도 아무 문제없을 자리에 넣은 거니까.

'그래. 실수해도 괜찮아. 그냥 나도 쇼핑을 왔다 생각하고 하면 돼.'

도향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타깃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우는 통화를 하는 척 두 모녀 뒤로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중간에 골목 길 한 쪽에서 웬 미국인이 그녀를 한 차례 훑어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주억이고는 시선을 떼는 걸로 볼 때, 사전에 이야기된 상대측 경호 인력인 게 분명했다.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타깃을 따라 찬찬히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는 한 번 와본 기억을 떠올려, 능숙하게 이것저것 살피는 척 하며 모녀에게 가까이 접근한다.

"엄마! 이것 봐요. 새로 나왔어요!"

"어머. 정말 그러네?"

한 장난감을 보며 방긋 미소 짓는 아이.

예림이는 그들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 몇 번 보다 가까이서 직접 보니 뭔가 많이 다르다.

키가 꽤 크고 늘씬하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청바지가 군살을 잡아준 건지는 몰라도 웬만한 외국인 모델 몸매는 저리가라다.

'뭐 이런 우월한 유전자가...'

그녀를 보는 순간,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삐쩍 마른 어린아이 체형인 여우는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모녀의 대화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타깃의 특징을 하나하나 살핀다.

'자연스럽게. 내가 아는 선에서 정보를 캐는 거야.'

이미 사전에 그녀의 스승인 도향이 몇 차례 타깃 주변을 맴돌며 정보를 빼왔다.

지금 자신이 하는 건 일종의 시험이자 실전 교육.

'어디보자. 말하는 거나 행동으로 볼 때, 상당히 자신감 넘치는 타입이네. 외향적인 성향이야. 그러면서도 눈과 표정이 나이에 비해 굉장히 조숙해 보이는 건, 최근 뭔가 큰 슬픔이 있다는 거겠지.'

그 슬픔이란 건 사전에 들은 남편의 죽음이겠고 말이다.

'아마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말과 행동이 앞서기보단, 생각을 더 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을 지도 몰라.'

그렇게 하나하나 타깃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때였다.

너무 노골적으로 훔쳐본 걸까.

돌연 타깃이 홱 고개를 돌린다.

그에 여우는 재빨리 미리 들고 있던 장난감을 이모저모 살펴보며 능청스럽게 연기를 펼쳐나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꺼낸 곳에 다시 올려놓으려는데...

"저기."

그녀의 손을 덥석 움켜쥐는 타깃의 손.

"에...?"

흐아앙. 큰일났당.

정말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얼 느낀 건지는 몰라도 타깃이 말을 걸어온다.

여우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는 고개를 들어 진갈색 머리의 백인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호숫가를 그려 넣은 듯한 잔잔한 푸른 눈이 그녀를 빠르게 위아래로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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