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146 높이 올라갈수록 욕망이란 뒤틀리는 법이다
***
각종 고풍스런 가구들과 진귀한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는 어느 공간.
선선한 바람과 그것에 따라 휘날리는 창밖의 낙엽들을 보며 노인이 회상에 잠겨있다.
'그 때도 이런 날씨였지 아마.'
녀석을 처음 만난 건 바로 이맘때쯤의 가을.
우연찮게 들른 목욕탕에서 처음 마주한 순간, 이 녀석은 내 원대한 꿈을 이루어 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육체적 한계로 포기해야만 했던 내 꿈을.
그러고 달려오기를 어언 25년.
어떻게 보면 길다고 할 수 있고, 또 어찌 보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
'많이 성장했어.'
아마 곧 나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경험만 조금 더 다양하게 쌓는다면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젊은 여인 하나가 옷을 들고 다가와 복식을 차려입는 걸 도와주었다.
"지금 출발해도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습니다, 주인님."
"그래도 미리 가 있도록 하지."
아마 녀석도 일찍 나올 테니.
"알겠습니다."
***
"저어... 아가씨. 그래도..."
"아,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깐~"
인천 국제공항.
두 여인이 덩치 큰 사내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임하나와 임서연이었는데... 그도 그럴 게, 얼마 전 설아의 아들이 해외에서 납치가 돼 큰일을 당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걱정이 되는 엄마들이 경호 인력을 마구 붙인 탓이었다.
그러나 경호 인력이 많이 붙으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특히나 내 입장에서도 불편하고.
그에 내 쪽에서 사람을 구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걱정이 앞서는지 기어이 출발 당일에 사람을 이리 보내온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초딩들.
"저 둘이 잘 사는 집인가 봐용?"
"뭐 그렇지."
"오홍..."
재벌집 자식들이라 하니 여우는 살짝 기가 눌리고, 민아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튼 싸움이 길어지고 주위 이목도 끌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그 순간, 저 멀리서 두 남녀가 다가왔다.
그 뒤를 티 나지 않게 조용히 뒤따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내 스승과 링링이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어?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는 두 아이들.
민아는 반가움을 표하며 웃고, 이제는 이들이 누군지 알아버린 여우는 살짝은 굳은 얼굴로 악수를 나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도향 왈.
"쫄 거 없어. 여기 노친네는 몰라도 얜 별 거 아니니까."
"그게 무슨 뜻일까요, 도.향."
시작부터 신경전에 돌입하는 도향과 링링.
도향은 아무래도 자신의 후계자에게 링링이 자신보다 밑임을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링링 또한 눈치 빠르게 그런 기세를 알아차린 듯하고.
"말 그대로지. 그래도 요 근래 몸매 관리 좀 열심히 했나봐? 가슴이 조금 더 기다라진 게 노인네가 좋아하겠는데? 요샌 잘 빨아주셔?"
"큭... 그건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
그냥 잘 빨아준다고 맞받아치면 될 걸, 성격상 스승과 관련된 일로는 거짓말을 못하는 링링이다.
결국 1라운드는 도향에게 K.O. 패를 당하고.
도향은 자신의 후계자 앞에서 콧대를 단단히 세울 수 있었다.
그 사이 내게 다가온 스승.
경호원들과 티격태격하던 아이들이 궁금증을 담아 우릴 쳐다본다.
"이 아이들이 네가 말한 그 아이들인가 보구나."
"안녕하세요. 근데 아저씨, 이 할배는 누구에여?"
"야, 임하나. 눈치 좀 있어 봐라. 딱 봐도 보통은 아니시구만."
"아, 그래?"
서연이 눈총을 주나, 임하나란 애는 엄마에게도 반말을 찍찍 싸대는 아이다. 그냥 고개를 갸웃하고 만다.
그에 난 두 사람에게 다가가 조용히 스승을 소개해 주었다.
"한성 그룹의 은거 노인이신 강태백님이다."
"에에? 저, 정말요?"
"움...? 그게 누군데여?"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임하나는 못 알아듣고.
서연이 그 옆에서 설명을 도와준다.
"한성그룹의 2인자이자 현 회장의 동생분이셔."
"대박. 그런데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왜 여기에?"
"그야 이번에 내가 외국에서 할 일이란 게 이분과 함께하는 일이라서 그렇지?"
그러면서 고갯짓으로 경호 인력들을 가리키자, 옳다구나 하고는 바로 인력들을 돌려보낸다.
한성 그룹 그것도 2인자의 경호 인력이 함께 한다 하자, 경호원들 또한 바로 납득하고는 물러나고.
그렇게 난 스승의 이름을 팔아먹어 사태를 쉽게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그만들 들어가 보자구나."
VIP 전용 라운지에서 기다리며 스승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슬쩍 아이들을 보니, 이제는 제법 서로 친해졌는지 싸우지 않고 잘 어울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 의외로 별로라고 하더라고. 그러니 가면 우리 여기부터 가보자!"
"오오..."
솔직히 하나와 민아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임하나는 성격 자체가 그저 인생을 즐길 뿐 남을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 아니며, 민아 같은 경우엔 상대가 잘나건 어쩌건 신경 1도 안 쓰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는 건 다른 두 아이였는데...
다행이도 여우는 나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스승인 도향이 가까이 있어서인지, 잘 웃어넘기고 있었다.
성격이 살짝 모난 서연조차 세 사람이 그러니 본인 또한 기분이 좋은 듯하고.
'무엇보다 이젠 진짜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했지.'
WSS 사태를 겪은 이후 친구의 소중함을 알게 된 아이.
정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재벌로서의 지위를 남발한다던지 뭐 그런 행동이나 발언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내 시선이 그쪽에 꽂혀 있자, 스승이 작게 웃으며 묻는다.
"네가 새로 들인 아이... 예림이었던가? 나쁘지 않아 보이는 것 같더구나. 그래, 집착녀라고?"
"예, 그렇습니다."
"흠... 확실히. 여자애들끼리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관심은 온통 이쪽에 있는 게... 딱 링링이 어릴 적을 보는 것 같구먼."
"에이. 그래도 링링씨에 비하면 외모는 많이 딸리죠."
그러자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링링, 작게 헛기침을 한다.
그리곤 눈빛으로 말한다.
'서후. 그래본들 국물도 없습니다. 의미 없는 칭찬은 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까탈스럽구만.
링링은 스승 외의 남자가 자신을 칭찬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때 그녀 옆에 있던 도향 왈.
"그러면 나랑 링링 중에는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거야 당연히...
"도향 네가 더 예쁘지."
그러자 링링의 얼굴이 매서워진다.
눈을 확 치켜뜨고는 표정으로 왈.
'나가죽으십시오!'
정말이지... 칭찬 할 때는 싫어하고.
정작 다른 이가 더 예쁘다 하면 울컥하고.
"요새 링링... 혹시 갱년기인가?"
"푸, 푸하아앗...!"
쾅.
앗. 실수로 생각이 말로 나와 버렸네.
덕분에 난 링링의 서늘하다 못해 칼날 같이 날선 눈빛을 목도할 수 있었다.
도향은 옆에서 배를 잡고는 뒹굴고, 스승도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서.후...!"
"아, 미안해요. 링링. 그게... 저 말 실수인 거 알죠?"
"모릅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는 씩씩대며 화장실로 향하는 그녀.
도향이 내게 찡긋 윙크하고는 그 뒤를 따라간다.
수신호로는 '내가 알아서 잘 해결할게.'라곤 했으나, 얼굴 위로 올라온 개구쟁이 표정으로 봐선 심기를 긁으러 가는 게 분명해 보였다.
'후우... 이럴 때 보면 링링이나 도향이나 완전 애라니깐.'
다시 스승에게 집중한다.
노인은 순간 조용해졌던 아이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하자,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 아이를 이번 일에 투입 시킬 생각이라고?"
"네. 아무래도 한 번이라도 더 경험해 보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렇지. 매우 좋은 생각이다. 적당한 자리를 한 번 알아봐야겠구먼."
작업 하나하나 손수 계획하는 스승.
그는 마치 바둑의 몇 수를 앞서듯, 늘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날 놀라게 하곤 했다.
누군가 사고를 치더라도 언제든 다른 이가 수습하게끔 하는 건 기본이고, 어떤 외적인 돌발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문제없이 해결되게끔 계획한다.
'본인이 현장에서 구심점으로 뛰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지휘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닌, 연기자가 지휘도 하고 연기도 해야 하는 상황.
그 일을 수십 년을 해온 만큼 스승은 늘 계획을 세우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할애했다.
이번 일을 통해 내가 스승에게 진짜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아마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번엔 현장에서 뛰지 않으시겠지만.
"그런데 저희가 만나는 분이 누구입니까?"
아직은 아무 것도 전달받지 못해 묻자, 스승이 턱을 쓸며 입을 열었다.
"뭐 지금쯤이면 말해줘도 되겠지. 찰스 밀러라고 뉴욕 상원의원이네."
"의뢰 내용은요?"
"가서 들어봐야지."
흠... 상원의원이라.
예전 주지사 이후로 정치인은 간만이군.
대체 어떤 일을 의뢰할 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은근 그쪽엔 멀쩡한 사람은 없나 보군요."
"높이 올라갈수록 욕망이란 뒤틀리는 법이다. 많이 보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슬쩍 고갯짓으로 서연을 가리키기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다른 이를 짓밟고 그걸로 큰 희열을 느끼는 부류.
아마 스승이 나보단 저들 모녀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WSS가 대기업에 들어선 이후론 그들 가족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늘 감시하고 있었으니.
"그래도 앞으론 안 그럴 겁니다. 엄마 쪽은 몰라도 딸은 확실히요."
"처음 네 보고를 듣고는 꽤 놀랐지. 뭐 사람은 큰일을 겪고 나면 어떻게든 변화하는 법이니까."
노인이 고개를 주억인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똑바로 올바르게 잘 자라준다면, 한성 그룹에도 그리고 WSS에도 좋은 발판이 될 게야. 그래도 기회가 좋으니 한 번 잘 키워보렴. 애도 두 명 정도 낳게 하고. 그러면 앞으로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게다."
스승에겐 상대가 어린애건 나이든 이건, 가난하건 혹은 재벌이건 똑같다.
그저 이용할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승은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나직이 말을 맺었다.
"귀찮긴 해도 꾸준히 좆맛을 먹이면 이후 노년이 편해질 게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줄다리기를 하면서 노예로 만들어 놓거라. 네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그런 암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