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145 사자대면, 네 명의 꼬맹이들
* * *
***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다.
며칠 새 더위가 많이 가시고 어느덧 가을에 접어들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나둘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
그것들을 가만 바라보는데...
문득 푹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 시선을 전방으로 돌리자, 두 아이가 테이블에 엎드린 채 축 쳐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민아와 여우. 부모님께 허락을 맡으려다 실패해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힘내, 둘 다."
"힝. 뭔가 좋은 핑계거리 없을까용, 아저씨?"
"음... 글쎄다. 내가 뭔 힘이 있어야지."
그래도 젊은 애들답게 바로 훌훌 털고 일어난다.
두 아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로를 응원했다.
"이제 1차 시도였을 뿐이야. 안 되면 2차, 3차 계속 가는 거양!"
"오옷! 알겠어, 림!"
그렇게 두 아이의 콩트를 재미있게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눈으로 익숙한 인물들이 들어왔다.
카페에 들어서려는 순간 나랑 딱 마주친 아이들. 이내 눈을 크게 뜨고는 검지로 날 가리킨다.
"어? 아저씨?"
"응? 하나랑 서연이?"
뭐지. 저 조합은? 둘이 아는 사이였어?
우리가 서로 놀라 눈을 끔벅 거리자, 그 사이에 있던 민아와 여우가 궁금증을 가지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눈을 치켜뜨며 왈.
"아저씨. 저 둘은 누구에용!"
"맞아. 빨리 사실대로 말해요.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요!"
아, 이것 참... 뭔가 난감하네.
내가 말을 못하자, 두 초딩이 그걸 알아서 해석해 낸다.
과거의 사례를 끌어들여.
"아저씨 수상해."
"맞앙. 요새 엄청 수상하다구용. 저번에 아이돌 애들도 그렇고!"
"아니, 그건 민아도 아는 앤데 왜 그 이야기를 지금..."
그때 하나와 서연이 걸어와 우리 테이블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앉고는 의자를 끌고 오더니 합석한다?
갑자기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사늘한 기운.
이, 일단 사건 수습을 위해 말을 돌리자...!
"아니, 근데 너희 둘이 어떻게 알아?"
내가 하나와 서연을 가리키며 묻자,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서연이 대표로 대답한다.
"아빠가 같잖아요. 그래서 종종 만나곤 해요."
아, 그러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둘 다 아빠가 임호준 새끼였네.
"그래도 엄마들이 알면 난리 날 텐데...?"
"넵. 그렇긴 하죠."
설아와 서희 사이가 보통 안 좋은 게 아니라고 했다.
설아 입장에서는 자신의 남편을 꼬리쳐 데려갔으니 뭐 이해하고, 서희는 예부터 설아를 아니꼽게 보는 그런 게 있었다나 뭐라나.
그래서 두 딸들도 서로 상종을 안 할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몰래 가끔 만나긴 해요. 그렇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구요."
눈치껏 내가 이 상황을 피하길 원한다는 걸 알고는 서연이 화제 돌리기에 순응한다. 곤란한 질문 또한 피하거나 혹은 자제하고.
그런데 다른 한 명은 그런 게 전혀 없다. 날 보더니 반짝반짝 빛내며 말한다.
"아저씨, 오늘 한가해여? 아니, 지금 한가해여?"
딱 봐도 무엇 때문에 묻는지 알겠구만.
이대로 모텔로 가서 섹스하잔 뜻이겠지.
그런데 촉이 좋기로는 다른 세 아이 또한 보통이 아니다.
반만 뜬 눈으로 나와 하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야, 임하나. 아저씨 시간 남는 거랑 너랑 뭔 상관인데?"
"너 뭔데 울 아저씨 남는 시간이 궁금행?"
"아저씨, 오늘 하루 바쁜데. 나랑 림이랑 노느라."
민아의 마지막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팽팽해지는 긴장감.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내가 이 네 명 모두와 떡을 쳤다는 사실을 서로 모른다는 점 정도?
그러나 눈치라면 진짜 요만큼도 없는 아이가 한 단계 위험수위를 더욱 드높였다.
"그럼 애들아. 나 아저씨 딱 한 1시간만 빌리면 안 될까?"
벙찐 세 아이들.
하나 같이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 올라오고, 그 의미를 아는 나만 속이 타들어간다.
저 입에서 무슨 대사가 튀어나올지 몰라.
"임하나. 아저씨랑 1시간 동안 뭐하려고?"
대표로 묻는 임서연의 질문에, 민아와 여우 함께 끄덕끄덕.
뭔가 서로 소개도 안 했는데 죽이 척척 맞는다.
"아, 있어. 애들은 몰라도 돼! 어른들만의 비즈니스니까."
"어른들만의..."
"비즈니스...?"
"단 둘이서?"
세 아이의 시선이 내게 꽂히고, 난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가 장난 한 번 기똥차게 하네. 뭘 그렇게 심각하게들 받아들이고 있어? 장난인데. 그렇지 하나야?"
"나 장난 아니고 100% 진지..."
그러나 내가 찌릿 노려보자,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고는 바로 수긍한다.
하하 과장되게 웃으며 그렇다고 장구 친다.
"맞아맞아. Joke 였어. 농담농담!"
어휴. 연기 되게 못하네.
다음에 미리 말이라도 맞추어 두어야겠다, 얜.
"아저씨, 어디가용!"
"나 화장실. 서로 자기소개라도 하고들 있어."
"네, 다녀오세요~"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가만 생각에 잠긴다.
이 넓은 서울 땅 덩어리에서, 그것도 수많은 커피 매장 중 딱 여기서 마주치다니.
뭐 이런 운이...
인생 살며 정말 이런 적은 또 처음이다.
'일단 무대를 만들어줬으니 서로 자기소개를 하겠지.'
너무 일찍 가면 말 그대로 빙판길이라 안 되고. 그렇다고 늦게 가면 한창 불타올라 위험한 발언들이 오고갈 수 있으니... 흠. 대략 5분?
그 즈음이면 소개도 마치고 적당하겠군.
난 시간을 보며 잠깐 시간을 죽였다가 자리로 되돌아갔다.
전투의지가 활활 불타오르는 여우와는 다르게 그나마 민아가 좀 해맑아서 다행이려나.
그 반대쪽도 서연이가 좀 차갑긴 하지만, 하나가 약간 바보스런 면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심각해 보이진 않았다.
적당히 이야기를 잘 주고받고 있다.
그에 난 평소 하나랑 서연이 먹던 걸 떠올리고는 아예 음료를 받아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즈음 되자, 분위기도 꽤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자자, 너희들 거."
"앗. 감사합니다, 아저씨!"
"후힛. 역시 우리 아저씨가 짱이얏!"
하나의 발언 한 마디에 다시금 떨어진 폭탄.
세 아이의 눈 꼬리가 확 치켜 올라간다.
"뭐? 우리 아저씨?"
"누구 마음대로 너네 아저씨양? 엉?"
"그거 아저씨에게 실례인거 알아?"
그런데 그런 세 여인을 보더니, 빨대를 쪽쪽 빨며 하나 왈.
"그럼 너희도 우리 아저씨 해. 그럼 되잖아?"
사심일랑 1도 없이 너무도 쿨 하게 하는 말에 모두들 할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로써 난 임하나란 애에 대한 정보를 갱신할 수 있었다.
이 아인 정말 섹스 외에는 욕심이 없는 시원함의 끝판왕이라고.
아마 나 또한 그냥 섹스 파트너로서의 애정의 대상일 뿐, 내가 다른 여자랑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해도 아마 쿨 하게 승낙하지 않을까?
괜히 머쓱해진 세 아이가 서로의 음료를 마시며 눈치를 본다.
그러나 하나와는 달리 요 세 명은 위아래를 확실히 하고 싶은 모양이다.
다시금 불붙는 싸움.
"난 요새 아저씨랑 매일 함께 하는데~"
서연의 한 마디에, 매서운 눈동자 세 쌍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진다.
난 눈을 감고는 애써 그 시선들을 무시했다.
그러자 하나 왈.
"뭐... 나도 거의 매일 보긴 하지. 그것도 집에서?"
다시금 날아오는 세 쌍의 따끔한 시선.
난 팔짱을 끼고는 그 또한 무시했다.
언젠가는 걸릴 문제.
특히나 여우는 이미 내 정체에 대해 안다.
저 애들이 하는 말을 통해 그게 무얼 뜻하는지도 아마 유추했을 것이다.
실눈을 살짝 뜨자,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아이.
다른 아이들이 티격태격 하는 순간, 난 재빨리 여우에게 표정으로 말했다.
'나 좀 도와줘 봐.'
여우가 입을 삐죽 내민다. 그리곤 한숨을 푸욱.
마음에 안 들지만 뭐 도와주겠다 그런 의미겠지.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민아였다.
"여기 림이랑 난 이번에 아저씨 따라 해외 놀러갈 거야. 그것도 최소 3개월. 무기한으로!"
"에엑?"
"정말이에여, 아저씨?"
예상치 못한 일정을 듣고는 서연이와 하나가 깜짝 놀라 날 추궁하고. 난 그 말이 사실임을 고개를 끄덕여 보여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특히 임하나 같은 경우엔 방금까지 그러든지 말든지 하던 애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분노한 얼굴로 내 어깨를 잡고는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아저씨! 그럼 저하고 약속한 섹ㅅ... 읍읍."
결국은 그것 때문에 화난 거였냐.
그것 참 얜 일관성 있어서 파악하기 편하네.
그때 두 사람을 진정시키는 내 수호천사.
"잠깐."
과연 여우는 이 위기로부터 날 어떻게 구해줄 것인가?
순발력과 명확한 판단이 요구되는 이 상황에서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에 따라, 향후 그녀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으리라.
예림이가 정말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한다는 듯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나나 되니까 파악되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나름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고급 연기를 구사하는 아이.
"그럼 너희 둘도 같이 따라오는 건 어때?"
"우리? 그래도 돼?"
서연의 물음에 여우가 혼신의 힘을 짜내 웃어 보인다.
"...응. 물론!"
"림...!"
민아가 의아함을 드러내나, 이내 베프를 믿는지 가만 자리하고.
서연과 하나는 침묵한다.
그리곤 서로를 잠시 쳐다보더니 하나가 먼저 일어나 여우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너 정말 멋지구나! 예림이라고 했지? 고마워!"
이어서 서연도.
"나도. 불편할 텐데 우릴 끼워줘서 정말 고마워...!"
그렇게 내 해외 일정에 따라오는 사냥감은 총 4명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아가 여우에게 묻는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림?"
"아? 별거 아냐. 그냥... 아저씨랑 친한 애들 같은데 우리끼리 싸우면 아저씨가 많이 불편할 거 아냐?"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 그래도 그 애들까지 여행에 끼워주는 건 너무 한 거 아냐?"
내 생각도 같았다.
어떻게 보면 악수. 당장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미래를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내 일정을 안다면 더욱 피했어야 하기도 했고.
그래도 똑똑한 아이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움직인 걸까 하고 들어본즉,
"그... 난 도향 언니랑 뭐 배우기로 했거든. 아저씨도 일 때문에 간다고 했고. 그러다 보면 민 너 혼자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럼 심심할 것 아냐..."
오호?
"앗. 그럼 날 걱정해서 그런 거란 말이야?"
"헤헷. 좀 그런 생각이 들었엉."
"림...! 역시 우리 림뿐이야! 사랑해♥"
"응♥"
그렇게 잘 둘러댄 덕에 민아는 기분 좋게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너머로 사라지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여우 집으로 차를 몰며 칭찬해준다.
"제법이야. 그런 생각도 다하고? 그런데 솔직히 말해봐. 즉석으로 만든 변명이야,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인 거야?"
"그게... 방법이 순간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났는데, 그냥 나쁘진 않아 보였어용. 어차피 민아도 혼자 있다 보면 계속 저나 아저씨 쪽에 붙으려 할 테고 그럼 작업에 지장 있을 것 아녜요? 그러느니 같이 놀 친구들이 있는 것도 좋겠다 싶었죠. 무엇보다 저 두 명도 아저씨가 작업 치던 아이들 같고."
그것 참 눈치도 빠삭하고.
이런 똑똑한 애가 날 서포트해 줄 생각하니 벌써부터 든든하네.
"우리 예림이, 잘했으니 상 줘야겠는데?"
"앗. 정말요?"
조수석에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는 아이.
난 그런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다만 아까 연기는 조금 아쉽더라."
"앗... 솔직히 그거 말하는 거 엄청 힘들었어요. 진짜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계속 의문이 들고... 막 화도 나고..."
방금 전까지 방방 뛰던 애가 맞는지 분위기가 급다운된다.
우울한 감정이 옆에서 새록새록 피어나는 걸 보며, 난 아이에게 질문을 던져 그 잡념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냈다.
"혹시 아저씨가 밉니?"
"솔직하게 말해도 되요?"
"응."
"미워요. 왜 나 하나로 만족 못하고 다른 여자도 건드나 싶어서. 그런데..."
차를 한 쪽에 바치고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내 행동에 여우 또한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포기는 못하겠더라고요. 요 며칠 계속 생각해 보았는데, 전 아저씨 포기 못해요. 그래서 아저씨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보렴."
"만약 아저씨가 나이 들어 이 일을 그만두면, 그땐 절 선택해 주실 수 있나요?"
난 잠시 고민하다 되물었다.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야?"
그도 그럴 게 만약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 돼버린다면, 내가 이 일을 그만두게끔 이 아이가 상황을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집착녀란 그런 존재다.
"그런... 건 아녜요. 그저 희망이에요. 제가 그 일을 하면서 버틸 수 있는... 언젠가는 머릿속으로 꿈꾸는 미래를 진짜로 가질 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링링이 떠올랐다.
스승을 오랜 기간 따라다니며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그러다 최근 들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한 여인이.
그 강한 링링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어쩌면 자신이 꿈꾸던 미래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것.
난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풀어 여우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그땐 널 선택해주마."
"흑... 고마워요, 아저씨. 아니, 사랑해요...!"
"그래. 그래."
미래를 모르는 우린 늘 불안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희망이란 게 존재해야 한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