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139 임호준을 대표직에서 박탈시키다
* * *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내쉰다.
밤하늘 위로 뿌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열정적으로 섹스를 하고 난 이후 피는 담배 하나.
정말이지 이것만한 행복도 몇 없다.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것이 최고의 맛이라면, 이는 능히 두 번째는 될 것이다.
'그래서 못 끊는 것일지도.'
절정을 하고 나면 여자는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은 기분이 들지만, 남자는 다르다.
허무와 공허가 찾아오고 중압감에 짓눌리게 된다.
내 밑에 깔려 헐떡댄 여인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무게감.
머리는 차갑게 가라앉고. 욕정을 생산하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논리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이성만이 오뚝이 자리할 때, 담배 하나를 피우면 그 모든 게 해결된다.
텅 빈 가슴에는 뜨겁고 풍족한 무언가가 차오르고.
내가 뭐하고 있나 후회가 드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이내 조금씩 열정이 차오른다.
'쿡쿡. 어쩌면 평생 못 끊을지도.'
난 담배를 태우며 들고 온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부재 중 통화가 와 있다.
누군가 하고 보니 링링이다.
슬쩍 뒤를 돌아, 서희 모녀가 방 안에 여전히 엎어져 있는 걸 확인한 난 링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링링. 연락을 했더군요."
네, 서후. 주인님께서 전해 달라 하신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스승님이? 설마 벌써 임무를 위해 나가자는 말일까?
아직 이쪽 일이 덜 해결되어서 그건 안 되는데.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맞았다.
곧 미국으로 건너가자 하십니다. 그 전에 WSS 일의 해결을 위해, WSS 회장을 직접 만나보라 하셨습니다.
"내가 회장을?"
네. 자세한 내용은 첨부 파일을 확인해 주십시오.
난 알았다 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파일을 열람해서 슥 살펴본즉,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약 2주 정도 되어 보였다.
그 안에 저 두 모녀 열심히 작업치고, 임호준에게 한 방 거하게 먹여야 한다는 뜻.
'배우 준비가 덜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바로 움직여야겠군.'
***
높디높은 고층 빌딩들이 석순마냥 삐죽빼죽 자리한 서울 도심부.
그 중 한 빌딩에서 유독 부산스런 움직임이 포착된다.
그도 그럴 게, 오늘 매우 중요한 손님이 오기로 한 것이다.
WSS 회장 임택근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 오늘 오기로 한 귀빈을 떠올렸다.
은거노인 강태백의 후계자, 서후.
사실 그 정보가 다였다.
그 외에는 의미 있는 정보랄 게 없었다.
그냥 여타 평범한 시민과 같은 삶.
돈이 많으니 놀고먹을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고, 자료를 뒤적거려 본즉 간간히 이곳저곳 취업해 일을 하곤 했다.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알 수만 있다면 좋은 협상의 기회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다만 그 전에... 바짝 엎드려야할 것이다.
임 회장 또한 이번 WSS 사태의 원인을 알고 있다.
물론 한성 그룹에선 언제고 잡도리를 할 생각이었겠지만, 어찌됐든 그 명분을 준 건 자신의 아들.
설마 철없이 이전 마누라를 찾아가 협박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강설아와 지금 찾아오는 귀빈이 그런 관계인 줄은 더욱 몰랐고.
'후우... 폭력 행사만 안 했어도.'
보내온 영상을 보니 발길질을 그냥 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있는 힘껏 찼다.
그걸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려, 임 회장은 잠시 이마에 손을 얹고는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멀었어. 아직도.
자리를 물려주기엔 말이다.
그 때 방 안으로 울리는 알림음.
회장님. 지금 귀빈께서 올라가십니다.
"알겠다."
"어서 오시지요, WSS 회장 임택근이라 합니다."
"서후입니다."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회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 회장이라 하면 그 앞에 선 이들은 어느 정도 긴장을 하기 마련인데, 이 남자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겁이 없는 스타일인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으나, 자세히 살펴본즉 그게 아니었다.
굉장히 익숙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상류층을 대해는 태도 자체가.
"현재 WSS는 죽을 맛일 텐데, 이런 저런 쓸모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겠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하는데 괜찮습니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매우 좋구만.
다만 이런 타입은 협상으로 우위를 점하기가 어렵다.
감정적으로 움직이기보단, 매뉴얼을 정해놓고 그 바깥으로 나가려 하면 칼같이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지극히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타입.
그러면서도 순발력이 좋은 스타일.
임 회장은 눈앞에 남자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에.
"회수했던 투자금을 다시 투자해 드리겠습니다. 언론도 풀어드릴 거고요. 정계에도 숨통을 터주라 말할 겁니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남자의 시선이 회장을 향한다.
그 무미건조한 눈빛에 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필히 쉽지 않은 것이리라.
남자의 닫혀 있던 입이 서서히 열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임호준을 대표직에서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하다.
엄청난 호조건을 들고 왔는데 그저 단순히 대표직을 박탈하라는 건 절대 아닐 것이고, 결국 이들이 원하는 건 리더의 교체. 잠정적 후계자격 박탈.
회장은 한마디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요! 이건 우리 가족의 문제 아니오?"
"말을 똑바로 하시지요. 물론 재산이 핏줄을 타고 내려간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사회는 옛날과 다릅니다. 회사는 더 이상 왕국이 아닙니다. 한 개인 가족의 것도 아니지요. 이곳에서 일하는 수만 명과 이곳에 투자한 수천의 투자자가 함께 일구고 가꾼 모두의 것. 그런데 리더가 잘못됐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그, 그건..."
"바꿔야죠. 고민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물론, 이건 외부인인 저희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죽어가는 회사에 다시 투자를 해야 한다면 그 만큼의 가치가 있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할 말이 없었다.
임 회장은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두 옳은 말이다.
횡령·배임 건도 그렇고,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그의 아들은 훌륭한 리더감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회사에 투자하려는 투자자의 입장에선 당연히 그 부분을 보지 않을 순 없는 셈.
"그렇지만... 알다시피 저희 가족은 이 회사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대표직을 뺏긴다는 건 결국 회장 자리도 물 건너간단 소리.
그 이야긴 몇 십 년이 될지는 몰라도, 회사의 경영권에서 그의 가족이 쫓겨난단 의미와 다름없었다.
그것만큼은 욕심 많은 그로선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회장님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앞으로 2030년은 끄떡없으실 것 같은데... 그 정도면 그 밑에 후계가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그런... 설마 서연이를 말하는 거라면 걘 여자아이입니다."
한낱 여자가 어찌 회사를 경영한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말아먹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남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임 회장님. 이젠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그 옛날의 교육을 못 받던 여인들이 아닙니다. 물론 남녀의 사고 방식 차이가 커서 크게 성공하고 그런 건 힘들겠지만, 신생 대기업을 유지시키고 관리하는 데에는 오히려 여자이기에 잘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여자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약 20100년 차이 나지요. 마치 복사라도 한듯 똑같이 유행하는 직업이나 흐름 같은 게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회장.
속도만 다를 뿐, 전개는 거의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남자는 그를 설득하듯 찬찬히 말을 이었다.
"이미 미국엔 여성 CEO들이 여럿 있습니다. 10년 후면 더 많아질 거고, 한국에서도 그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제야 극렬히 반대하던 회장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고리타분한 옛 사람이라 해도 한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다. 세계가 움직이는 흐름을 보는 눈은 있다.
심지어 남자. 남자는 그럴 듯한 논리와 증거를 들고 오면, 감정을 떠나 그걸 받아들일 줄 안다.
다만 그 벽을 깬다는 게 쉽지는 않을 터.
특히 후계 구도를 임호준에게 다 맞춘 상황에서 이제와 싹 바꾼다는 건, 웬만큼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선택하지 못하리라.
서후는 주저주저 하는 노인을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몰아세웠다.
합리적인 답을 주었으니 이젠 그 구멍으로 들어가게끔 유도만 하면 된다.
"현재 WSS 주가는 계속 급락 중입니다. 덩달아 대부분의 사업이 겹쳐있는 SAF도 함께 빠지는 중이지요. 이대로 가면 두 회사는 회복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만 자그마치 10년."
꿀꺽. 노인의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방안에 나직이 울려 퍼진다.
서후는 일부러 호흡을 골라 긴장감을 고조시키고는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차트 상 그걸 회피해 회복할 유일한 방법은 V자 반등뿐인데... 그런 강력한 호재 기회를 줄 수 있는 건 사실 저희 한성 기업뿐 아닙니까?"
그렇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한성 기업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양 회사는 모두 대기업에서 물러나야 했고, 심할 경우 매각 절차를 밟아야 할지도 몰랐다.
남자가 찻잔을 들어 한 차례 찰랑 흔들고는 말한다.
"그러니 기회를 드릴 때 받아들이십시오. 이 이상 늦추었다간, 제 아무리 한성 그룹이라도 회복시켜드리지 못합니다."
노인이 양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몸을 수그리고는 고민에 빠진 회장.
과연 그의 선택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들놈을 대표직에서 박탈하고, 회사에서 완전히 추방한 뒤... 손녀를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대신 그 손녀를 키우는데 저 또한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리도록 하지요. 필요한 게 있으면 개인적으로 제게 부탁하십시오.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가,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노인과 남자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얼마 후, WSS와 SAF의 주가 반등이 일어나고. 뉴스에 떠들썩하게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때 아닌 때 국가적 악재에, 길거리로 내앉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한민국 대표 기업 한성 그룹이 양 회사에 투자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고.
그에 맞추어 외국인들의 자본도 다시 들어오고.
정부와 여야도 사건을 더 부풀리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덮기로 결정한 듯 움직였다.
그렇게 WSS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
"읏. 흐읏... 핫... 아, 아저씨. 오늘 뭐 기분 좋은 일 있어요?"
내 위에서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며, 설아의 딸 하나가 내게 묻는다.
그에 난 고개를 저은 뒤, 아이의 출렁거리는 큼지막한 젖을 붙잡고는 입으로 쯉쯉 빨아주었다.
흠칫흠칫 떨며 기분 좋은 교성을 내지르는 아이.
이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하읏... 사실대로 말해 봐요. 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뭔가... 읏. 흣... 들떠 보이시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냐. 너랑 만날 생각에, 그리고 하다 보니 흥분해서 그래."
"치이...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여튼 눈치는 빨라서.
이래서 여자들이 종종 무섭다.
이 아이 말대로 지금 난 살짝 들뜬 상태가 맞다.
내일이 바로 준비하고 준비하던 대망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이미 백서희 모녀에게 내용을 다 전달했고, 아까 문자도 왔다. 오늘 밤 자정에 남편에게 수면제 먹이고 재워 놓을 테니, 새벽에 일찍 와서 작업하면 된다고.
'임호준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것 참 기대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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