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132 최상류층의 도톰한 도끼 자국 순회공연
* * *
보석방에서 시원하게 한발 빼고 나온 우리는 이번엔 의류 코너로 갔다.
갑자기 내가 이쪽으로 이끌자 서희가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요 일주일간 나란 인간을 겪어본 만큼, 내가 쓸데없는 행보를 가지지 않는다는 걸 톡톡히 깨달은 것이다.
"이번에는 옷을 골라 달라는 거예요?"
"아니야. 네 옷 사려는 거야."
"네? 제 옷이요?"
믿을 수 없다는 얼굴.
내 앞에 팔짱을 끼고 서더니,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날 가만 노려본다.
그에 나 또한 질 새라 생글생글 웃음으로 맞받아쳐 주었다.
"쳇..."
입술을 꼬아 한 쪽에 보조개를 만들며 궁시렁 대는 그녀.
가만 들어보니, '내가 왜 이런 남자에게 빠져서...'라고 중얼 거리고 있다.
난 그런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농담 아냐. 진짜 네 옷 사주러 온 거야."
"...정말요?"
"그럼. 아, 혹시 메이커라도 백화점 내 명품 코너 같은 데가 아니면 안 골라 입나?"
백서희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주억인다.
"뭐 그렇긴 하지만... 주인님이 사주는 거라면 다르죠? 그건 특별한 거니깐."
말 참 예쁘게 하네.
에잇... 좋다. 인심 썼다.
원래 이곳에 데려온 목적이 있었는데, 그냥 철회하고 즐기도록 해준다.
"그럼 원하는 대로 골라 봐. 다 사줄 테니까."
곁눈질로 날 흘끔흘끔 보던 여인이 내 한 마디에 헤헤 미소 지으며 제자리에서 폴짝 뛴다.
"정말이죠? 꺄앙!"
쿡쿡. 태세전환 하는 거 보소.
여왕처럼 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애교가 넘치는 게 뭔가 묘하게 괴리감이 느껴진다.
뭐랄까...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느낌?
항상 고압적인 모습을 보이고 그러다 내게 수치를 당하는 일상에서, 갑자기 상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할까.
뭐 어렵게 표현했지만, 결론은 한쪽으로 끌고 가 자지를 처박고 싶을 만큼 예뻐 보인단 의미였다.
그런 내 시선을 알 리 없는 여인, 그저 신나서 엉덩이를 흔들며 어느 매장으로 갈까 막 둘러보고.
난 모처럼 조용히 따라다니며 그녀가 원하는 옷들을 사주었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년 봐라...?'
고르고 또 고르고.
그럼에도 만족 못하고 또 산다.
이거 혹시 나한테 짐꾼 일 시키면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 푸는 거 아냐?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대박! 그동안 쌓인 체증이 싹 가시는 기분이에요!"
"그래...? 기뻐 보이니 잘 됐네."
"남자랑 쇼핑 온 게 대체 몇 달 만이야! 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참 좋네요~"
내 양손에 든 쇼핑백 8개를 보고는 호호 웃는 그녀.
새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주인님, 미안해요. 저 때문에 많이 무겁죠? 제가 원래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은 아닌데, 주인님이 사주신다고 하니 너무 기뻐서 그만...♥"
그래. 그렇겠지.
그에 난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그녀에게 내가 고른 옷 하나를 건네주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걸 받아드는 서희.
탈의실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한다.
"이제 그만 가자. 그걸로 갈아입고 와."
"알겠어요~"
한 방 먹은 내가 건네준 옷이니만큼 의심해 볼만 하건만, 기분이 좋은지 순순히 환복 하러 가고.
조금 있으니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누군가 하여 보니 백서희였다.
"어. 왜?"
이, 이, 이거 맞아요? 잘못 준 거 같은데요?
"아니, 맞아. 지금부터 밖에 운동 가려고.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는 운동하기 좀 그렇잖아?"
아니 그래도...
"빨리 갈아입고 나와라."
전화를 뚝 끊는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탈의실에서 한 여인이 나온다. 고간을 핸드백으로 가린 채.
그녀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다 내게 후다닥 달려와 찰싹 달라붙었다.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요?"
"왜?"
"이런 거 입고 돌아다녔다간 인터넷 각종 사이트에 사진 다 올라갈 거라구요!"
난 슬쩍 백서희를 내게서 떨어뜨려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서희 또한 한 번 직접 보라며 핸드백으로 가리던 부위를 바로 치운다.
그렇게 드러난 그녀의 복식.
회색빛깔의 스포츠 레깅스가 여인의 몸에 착 달라붙어 그녀의 몸매를 돋보이게 한다.
다리 라인의 선은 살려주고 엉덩이는 위로 쭈욱 올려주고.
그 와중에 가랑이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도끼 자국.
팬티를 입지 않아 도톰한 보지 모양의 윤곽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게 참으로 일품이다.
"이거 입고 돌아다녔다가는 저 얼굴 완전 다 팔린다구요...!"
울상이 되는 걸 넘어, 울먹울먹 거리는 그녀를 보며 난 그녀의 품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입에 착용해주며 방긋 웃어주었다.
"이러면 되겠지?"
"난 몰라... 흑..."
모르기는.
그녀에게서 핸드백마저 뺏어 들고는 내 옆에서 한 발짝 떨어져 걷게 한다.
저 수치스러운 고간을 그 어디에도 숨기지 못하게끔.
그리곤 그대로 쇼핑몰 순회공연!
어디 최상류층의 도톰한 도끼자국을 온 동네에 소문 내 볼까?
"어머어머."
"대, 대박..."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한다.
몇몇은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미리 뛰어가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찍고... 우린 그렇게 35층까지 다 돈 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내 옆에서 서희 울상.
"주, 주인님... 이제 그만..."
"아직 1, 2층 안 돌았지? 거기까지 다 돌고 돌아가자."
"제, 제발... 저 너무 힘들..."
"지금 네가 힘드냐? 짐을 9개나 들고 있는 내가 더 힘들지. 잔말 말고 따라와."
그렇게 백서희는 쇼핑몰 매장 5개 층 구석구석을 모조리 순회 하고서야 차에 탈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1층을 돌 때 즈음에는 그녀를 촬영하겠다고 뒤따라 붙는 무리까지 생겨, 서희는 내게 말조차도 걸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럼 이번엔 한강으로 가 볼까?"
"주인님. 이제 그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내게 넙죽 엎드리는 여인.
너무 간절하고도 진지하게 사과해 이쯤에서 용서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집으로 데려다 줄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쪽쪽."
정말 황송한지 내 얼굴에 쉴 새 없이 뽀뽀를 해댄다.
그에 난 그녀의 머리를 수그려 내 고간에 가져다 대고는 말했다.
"감사하면 내 아들에게 해."
"네에...♥ 쯉. 쮸웁..."
차 운전하며 차기 회장 부인에게 받는 펠라라... 뭐 이것도 나쁘진 않군.
***
"흐응흐응~"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여인에게서 기분 좋은 콧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기쁜 음색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원하는 층에 도달할 때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정말 뭐야. 노예처럼 부려 먹을 것 같더니 이런 것들도 사주고♥'
고개를 내려본다.
양손에 가득 들린 수많은 옷가지들.
비록 메이커라도 하나에 겨우 몇 십 만원에 불과한 저가품들이었으나, 그걸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기쁨이 충만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가 그녀 자신에게 사준 옷들이기에.
'가만 보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걸지도. 일종의 표현하는 방식이 남들과는 다른 거지.'
상류층들도 사랑을 한다.
호감도 보이고. 데이트도 하고.
그런데 폐쇄적인 집단의 특수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표현방식이나 애정표현이 남다른 이들이 좀 있었다.
이 남자도 그런 쪽일 가능성도 있단 이야기였다.
'특히나 돈 좀 있는 남자들은 상하관계부터 잡고 싶어 하잖아.'
어쩌면 초면에 그녀 자신에게 못되게 굴고 괴롭힌 것은 그러한 맥락일 수도 있었다.
오늘도 이런 저런 일을 겪긴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오늘 있었던 사건들 모두 그녀 자신이 자초한 일이지 않았던가?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열린다.
여인은 흥얼흥얼 노래하며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검은 구두가 현관에 놓여 있다.
"서연 아빠. 왔어?"
"어."
부르자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
안방으로 들어서자, 사십 초반 즈음 되어 보이는 이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백서희는 남편의 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쩜. 차이가 나도 이렇게 차이가 날까.'
배가 나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근육이랄 것도 전혀 없는 몸.
방금까지 데이트하고 신나게 떡 치다 온 그 남자하고는 너무도 비교가 된다.
'남자도 몸매 관리를 할 줄 알아야 돼. 여자만 백날 하면 뭐해?'
속으로 투덜대는 그녀에게 그 남편 임호준이 묻는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놓인 8개의 쇼핑백에 닿아 있었다.
"그것들은 뭐야? 설마... 쇼핑하다 온 거야? 이 시국에?"
"어. 그냥... 스트레스 좀 풀 겸."
그러자 남자의 손이 확 날아오더니 여자의 머리채를 잡는다.
"야, 백서희. 미쳤어? 제 정신이야?"
"악! 무, 뭐야? 놔! 놓으라고!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지금 남편은 좆 빠지게 양쪽 회사 살려보겠다고 뛰어다니는데 뭐? 쇼핑?!"
남자가 팔을 힘껏 휘둘러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게 제법 아플 만하건만, 여인 또한 한 성깔 하는지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아니 그럼 그런 거지 왜 폭력이야! 당신 이것밖에 안 되는 남자였어?"
"뭘 잘했다고 목소리를 높여! 이 쌍년이!"
"뭐? 쌍년?!"
확 치켜드는 손의 궤적에 여인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는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노려보다 이내 쇼핑백을 발로 세게 차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를 한 차례 노려보고는 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정신 차려, 이 년아! 쇼핑...? 하!"
쾅. 띠리릭.
거센 폭풍이 지나가고 집안으로 고요함이 내려앉는다.
옷가지가 사방으로 펼쳐진, 엉망이 된 방구석에서 여인은 작게 훌쩍였다.
금방 전의 살벌함은 보통 여인네들 같았으면 흐느끼며 펑펑 울만 하건만, 눈물이 흘러내리는 백서희의 눈에서는 그저 시퍼런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사달이 난 게 누구 때문인데... 내가 모를 줄 알아? 네가 발정 난 개새끼마냥 강설아 년을 찾아가서 이 꼴이 난 거잖아!"
SAF 회장은 이 사달이 난 진짜 원인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딸.
진즉에 그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 그런데 뭐?
"내가 쇼핑만 하고 다녔다고? 나도 회사 살리기 위해 오늘 하루 별짓을 다했어. 천한 것들에게 사진 찍히는 쪽팔린 짓도 했다고...!"
그런데 지가 싼 똥을 같이 치우지 않았다고 나한테 손찌검을 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브러진 새 옷가지들을 주워 소중히 품는다.
그리고는 옷장에 하나하나 정돈한다. 마치 마음을 정리하듯.
"넌 끝이야. 이 개새끼야."
두고 봐라. 이번 위기를 넘기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SAF는 WSS와 결별이다!
백서희는 남편이 벗어둔 옷가지를 집어 그대로 거실로 내던졌다.
그것들은 한 차례 펄럭이다 이내 바닥에 흐트러졌다.
그리곤 안방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 위로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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