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114 백서희
* * *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링링에게 연락하려는 그 때, 돌연 전화가 왔다.
누군가 하고 보니 민아다.
"여보세요."
아저씨 어디에용!
응? 이 목소리는 여우인데.
"어? 나 지금 커피숍."
앗. 그럼 우리도 같이 데려가용!!
커피숍 가려는 게 아니라 이제 막 나온 건데...
그러나 난 그냥 알았다고 대답했다.
메인 사냥감들로 두 초딩 모두 주기적으로 체크는 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일단 저것들부터 따돌리자.'
찬찬히 차를 몰고 링링이 관리하는 상업 건물로 다가간다.
그 주위를 뱅글뱅글 돌다 차량 엘리베이터가 1층에 딱 하나 남아있을 때, 바로 타고 옥상 주차장으로 이동. 재빨리 차를 바치고 다른 차량으로 갈아탄다.
링링을 통해 미리 연락해 두었던 바, 차에는 이미 열쇠가 꽂혀 있었고.
추격하는 이들이 옥상으로 올라올 즈음엔 난 다른 엘리베이터를 통해 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이걸로 오늘 하루는 걱정 안 해도 되겠지.'
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물론 그동안의 카드나 출금 기록을 보고 쫓아올 수도 있지만, 한동안 그 근처는 피해 다니면 될 것이다.
그렇게 만난 민아와 여우.
간만에 만나서 그럴까. 아주 날 앞에 두고 시끌시끌하다.
난 듣는 쪽을, 두 아이는 떠드는 역을 맡아 우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임했다.
"근데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도향 언니가 막 운동하자고 해서 같이 끌려갔다 오는 길이에요."
그것 참 빠르다니깐.
도향에게 두 아이 몸 관리하는 걸 부탁한 게 이제 채 2시간도 안 되었는데, 그새 벌써 운동을 시킨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본즉, 다짜고짜 나오라 해서 별 수 없이 끌려갔다나 뭐라나.
여우가 풀썩 쓰러져 파르르 떨며 말한다.
"진짜 죽겠어어... 운동 시러어..."
"힘내, 림..."
"아니 근데 운동은 둘 다 했는데 왜 예림이만 이 꼴이야?"
내 질문에 고개를 번쩍 쳐든 여우.
좌우 주변을 슥슥 살피더니 투덜거린다.
"모르겠어용! 완전 저 잡아먹으려고 한다니깐용!!"
"이유를 몰라?"
"네!!"
도향은 이유 없이 괴롭히는 스타일이 아니다.
결정적인 예로 아무리 링링과 견원사이라 할지라도 이유 없이 문제를 만들고 괴롭히고 그러지 않는다.
난 그 옆을 바라보았다.
살짝 친구 눈치를 보더니, 민아 왈.
"사실 예림이가 운동을 좀 싫어해요."
민아 말은 이랬다.
종종 운동을 하는 자신에 반해 여우는 평소 운동이랑은 아주 담 쌓고 살아 진정 저질 체력이라고.
그럼 그렇지. 유독 빡세게 굴리는 이유가 거기 있었구만.
'뭐 단순히 그런 이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전에 도향에게 말했지 않은가.
링링처럼 키울 거라고.
여우가 온전히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 때까진 내 비서 역할을 대신해 달라고.
날 서포트 하려면 응당 체력은 갖춰야 하니, 그런 면에서 더 빡세게 굴리는 걸지도 모른다.
민아의 이야기에 입을 삐죽 내미는 여우.
문득 중얼거리는 게, '운동 따윈 필요 없어.'라고 하는 듯하다.
"근데 도향은?"
"언니는 화원 지나다가 갑자기 먼저 가라 하셔서..."
여전하구만. 그놈의 식물 사랑.
내가 빨대를 통해 음료를 빨며 잠시 멍 하니 생각에 잠겨 있자, 슬슬 본인들 이야기는 끝났는지 아이들이 역으로 내게 질문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 질문이란,
"아저씨, 요새 뭐하는데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맞앙맞앙!"
"아. 그게 말이지..."
뭐라 할까 고민하다, 그냥 지금 내게 닥친 일을 엮어 적당히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테이블 위로 양 팔꿈치를 올리고 양손위로 턱을 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두 꼬맹이도 따라 자세를 잡으며 진지한 얼굴을 한다.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은 마치 음지에서 거래를 하는 악당들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운은 내가 뗐다.
"내가 말이다. 요새 문제가 좀 있단다."
"그게 뭔데용?"
"듣고 있어요."
난 목소리를 일부러 낮게 깔고는 과장되게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살짝은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나도록.
"요새 날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있는 것 같아."
"에엑?"
"정말요?"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는 초딩들.
그러나 금세 납득한다.
"하긴. 아저씨가 좀 많이 잘생겼잖앙."
"응. 그리고 나 이번에 한국 귀국할 때 실제로 본 적 있어."
"엥? 진짜?"
"막 공항에서 어떤 여자가 아저씨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서 쫓는데, 내가 대신 따돌려 줬다니깐!"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올해 봄. 친구 녀석의 부탁을 받아 민아 마중 나갔을 때를 말하는 것 같다.
당시 우연찮게 그곳에 예전에 작업 쳤던 하영이란 여자도 있었던 탓에 까딱 잘못하면 걸릴 뻔했었는데, 민아는 그 때 그 여자를 스토커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 때 그 여자 맞죠?!"
자신만만하게 검지를 치켜들며 하는 말에 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민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에에? 아니에요?"
"또 다른 사람이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깔이 뒤집어지는 두 꼬맹이들.
특히 여우같은 경우엔 입을 쉴 새 없이 나불대기 시작했다.
"어떤 새끼양! 아저씬 우리 건뎅!! 쒸익쒸익."
"안되겠어. 오늘부터 아저씨 밀착경호 들어가자. 우리 건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어이어이. 진정들 해.
이거 말실수 한 거 아닌가 싶다.
난 막 따라나선다고 우기는 두 아이를 간신히 진정시키고는,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밝혔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그 스토커를 어떻게 떨어뜨리는 게 좋을까란 말씀이신 거네요. 경찰을 이용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에요."
"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이들.
입을 먼저 연 건 민아였다.
"저 같으면 이렇게 할 것 같아요. 일부러 사람 없는 음침한 곳으로 가요.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흉기로 이렇게..."
저기 민아야...?
예전에도 느꼈지만 얜 종종 사차원 끼가 다분한 것 같다.
갑자기 전개가 왜 스릴러로 가니...
그런데 그 순간,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던 여우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응...?
"미, 민! 무섭게 왜 그랭...!"
"뭐가? 그 정도는 해줘야 다시는..."
"그, 그만. 거기까지...!"
여우가 민아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제지한다.
그에 민아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끄덕. 그제야 여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렇게 민아의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근데 뭘까. 방금... 상당히 반응이 진지했는데.
'...기분 탓인가?'
민아의 얼굴을 본다.
평소와 똑같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여우는 뭔가 상당히 불안해 보인다.
흘끔흘끔 살짝 내 눈치를 보는 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직감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여우는 그저 푹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다음에 단둘이 있을 때, 오늘 일을 한 번 캐묻도록 하자.
"후우... 민아 이야기 장난인 거 아시죠? 그냥 제가 말씀 드릴게용. 저 같은 경우엔 말이에요. 그냥 가만 놔둬용. 아예 긴장이 느슨해지고 풀려 다 드러날 때까지."
경험담인가 보네.
마치 실제로 해본 것처럼 술술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곤 반대로 추격해서 뭐하는 사람인지 사전조사! 그런 뒤 신상정보랑 약점 잡아 혼내주면 돼요. 그럼 다신 안 그래용."
음. 일리가 있는 방법이었다.
그냥 협박하기보단, 이왕이면 날 쫓는 이들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내가 여우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이자 민아가 살짝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의 의견은 왜 안 되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에 난 웃으며 두 아이의 머리 모두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둘 다 도움이 됐어."
"정말요?"
"헤헷. 다행이다."
한 명은 내 첫사랑을 똑 닮은 메인 사냥감.
다른 한 명은 아직 채 각성하지 못한 내 집착녀.
앞으로 바쁘더라도, 오늘처럼 종종 시간을 내 어떻게든 관리하도록 하자.
그렇게 난 아이들과 두 시간 가량 놀아주다 여우네 집 근처에 내려 주었다.
그런데 날 쫓는 이들이 단순히 아마추어는 아닌 걸까.
날 놓친 걸 깨달았는지 그곳에서 도로 추격이 붙었다.
슬쩍 누군가 하여 본즉, 아까 카페에서 날 쫓던 두 남녀였다.
'다른 이들은 없는 건가?'
이래저래 시도하며 살펴봐도 저 둘 뿐이다.
그걸 확인한 난 일단 링링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집요하게 따라붙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인지 몰래 확인 좀 해주십시오. 뒷배경은 누구고. 그들의 가족과 개인 신상 정보도요."
알겠습니다.
아마 교대를 할 것이다.
한 팀이 하루 종일 따라다니진 않을 터이니.
그리고 과연... 설아와 떡치고 자기 전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링링이 보낸 정보가 와 있었다.
추격을 붙인 건 다름 아닌 SAF 회장.
추격팀은 아무래도 2교대인 것 같단다.
이전 팀에 대한 정보는 왔고, 새로운 팀에 대한 정보는 찾는 중.
링링 : 제가 알아서 처리할까요?
링링에게 맡기면 정말 잘 처리할 것이다.
감쪽같이 납치해 중국 곳곳으로 보내버리겠지.
그러나 회장 입장에선 다시 사람을 붙이면 그만.
그리고 다시 온 이들은 이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더 은밀히 움직일 것이다.
그래선 안 되지.
나 : 각 팀당 한 명씩 작업을 칠 테니 준비만 해주십시오. 전향의사를 물어 스파이로 만들어봐야겠습니다.
링링 : 알겠습니다.
이왕이면 네 명 다 작업 치는 것이 재미있겠지만, 일단 백서희 작업도 쳐야하니 자제하도록 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팀당 한 명씩만 꼬드기는 게 낫다.
협박을 둘이서 같이 받게 될 경우, 서로를 의지해 역경을 이겨내려는 행동을 취하지만... 혼자는 그러지 못한다.
오히려 들키면 좆 된다는 생각에 더욱 숨기게 된다.
난 설아의 거대한 가슴을 마음껏 주무르며 살며시 눈을 붙였다.
이젠 며칠 같이 잤다고 자연스레 내 품으로 안겨온다.
입가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는 게 느껴진다.
"잘 자요, 서후씨."
"응. 너도."
KUC 푸드의 대표이자 차기 회장님의 알몸 속살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그 보드라운 감촉에 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완벽한 내 여자가 된 그녀.
아마 언제 어디서든 팬티 내리고 엉덩이 내밀라 하면 그래 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일부턴 정말 재미있어 지겠어.'
설아는 생각보다 착해서 빡세게 굴리지 못했는데... 백서희는 다르다.
악녀다.
그러니 아주 호되게 굴리도록 하자.
다음 날 아침.
설아와 헤어진 난 링링이 운영하는 상가 건물로 다시 찾아갔다.
이미 한 번 당해본 전적이 있는 그들은 둘로 나뉘었고, 그걸 실시간으로 전해 받으며 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도 그럴 게, 약속 장소가 바로 요 상가 건물이었던 것이다.
'한 시간 전쯤부터 미리 와 있었다고 했지.'
이 건물은 상당히 큰 편이다.
지어진 지는 꽤 되었지만, 한 때는 서울에서 제일 큰 마트가 자리했던 만큼 평수가 어마어마했다.
대략 논 1필지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
지금은 나누고 개조한 탓에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해 있는 상황이지만... 그 대부분이 스승과 링링의 필요에 의해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스승 밑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안 좋은 일들은 다 이곳에서 움직여진다고 보면 되었다.
'말 그대로 내 안방이란 의미.'
능숙하게 걸음을 옮겨 3층 한 상가에 들어선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이곳은 바로 스튜디오... 사진관이다.
날 알아본 여직원이 나를 이끌고 안쪽 비밀 방으로 인도해준다.
약 50평정도 되어 보이는 밀실.
신식 호텔처럼 세련되게 갖추어져 있는 곳.
그 안에는 각종 촬영 장비들이 즐비해 있었고, 그 한 가운데 있는 침대 위로는 한 여인이 울상을 한 채 앉아있었다.
속이 환히 비쳐 유륜이 고스란히 보이는 란제리 날개 옷.
그 아래 자리한 S라인의 아름다운 몸매.
애를 낳아 커진 골반과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작은 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슬쩍 그 아래 치부를 바라보니, 이리 될 걸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 음부 주위의 털을 깨끗이 정리한 게 보였다.
'눈치가 빠르면 참 좋아.'
여러모로 편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년은 상황 파악도 빠르고 알아서 잘 기기도 한다.
"안녕.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근데 이건 다 뭐에요...? 왜 카메라들이..."
"설마 모르고 물어볼 리는 없을 테고. 그동안 본인이 한 짓을 떠올리면 말이야. 안 그래?"
여인의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달달 떨린다.
"그, 그걸 어떻게..."
"풉.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당사자들에게 듣고 알았지."
그 한 마디가 의미하는 건 상당했다.
여인의 눈동자가 좌우로 거칠게 흔들거린다.
마치 앞으로 본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행한 일들을 모조리 추리해 보기라도 하듯.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그걸 보면 이 여인을 알 수 있다.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고스란히 보이는 법이니.
한 쪽으로 세련되게 늘어뜨려 있던 머리칼이 바람이라도 불 듯 뒤로 물결친다.
SAF 회장의 딸 백서희는 후다닥 달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는 양손을 싹싹 빌었다.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것만큼은 제발요...!"
"나 아직 뭘 할 거다 그런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상상에 집어삼키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는 손바닥을 마구 비벼대며 내 자비를 구해댔다.
그걸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년은 상황 파악뿐만 아니라 주제 파악도 아주 빠른 년이라고.
그리고 이 약점을 쥐고 있는 한, 내가 시키는 어떤 짓이든 서슴없이 할 것이란 것도.
'몇몇 인간들은 본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공포로 남을 괴롭힌다고 하더니...'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남에게 행하지 않는다.
그걸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도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인간은 많고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싫어?"
"네, 네엣...!"
"그럼 어디 한 번 잘 해봐. 너 하는 거 봐서 결정할 테니."
그녀를 다시 침대위로 보낸다.
밟은 빛 아래, 이제 30대 초반 즈음 되어 보이는 미녀가 손으로 고간을 가린 채 불안한 눈으로 카메라들을 응시한다.
"알지? 제대로 연기해라. 안 그럼 10년 계약도 무효고. 네가 지금껏 괴롭힌 여자들도 다 보게 테니까."
"아, 알겠어요..."
"그럼 시작해."
신호를 주고.
카메라들을 하나씩 ON.
침대 위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던 여인이 눈을 질끈 감고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 그럼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