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10 강 회장과의 만남
* * *
'여기가 KUC 회장과 설아의 가족이 사는 곳...'
고개를 들어 거대한 건물을 바라본다.
출입문 앞으로 반듯하게 설치된 돌바닥과 하늘 높이 설치된 담, 그리고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매우 작아 보이는 대문.
차고의 문이 스르륵 열리고, 차가 그 안으로 부드럽게 진입한다.
그 사이 설아는 속옷과 옷을 싹 갈아입고는 향수를 뿌렸다.
몸에서 나는 정사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리라.
"서후 씨도 뿌려드릴게요."
"아냐. 괜찮아. 난 이거 있어."
도향이 만든 특제품.
그것을 뿌리자 설아의 얼굴에 호기심이 올라왔다.
코로 내 몸 주변을 맡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실력 좋은 분이네요. 누구에요?"
"내 비서. 취미가 식물 가꾸는 거거든. 그쪽 분야로 박사학위도 있을 만큼 특이한 사람이야."
"어머. 그럼 저도 소개시켜 주세요. 향 완전 좋은데요?"
그러고 보니 설아의 사무실에도 유독 식물들이 많았지.
그녀 또한 도향처럼 이쪽에 관심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난 알았다고 대답해주고는 연희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따라 찬찬히 뜰로 들어섰다.
'전형적인 평창동 디자인의 모습이구만.'
가운데 마당을 기준으로 건물이 감싸듯 포진해 있는 구조.
그래도 아주 오래된 건 아닌지, 2층 건물 위로 임의로 만든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설아와 연희가 그를 보자마자 꾸벅 허리를 숙이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저 노인이 강 회장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해주는 설아.
"다녀왔습니다, 회장님."
"그래. 오늘 힘들었을 텐데 정말 수고 많았다. 옆에는?"
"이쪽은..."
어떻게 소개할지 미리 준비를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바로 말하지 못한다.
그걸 포착한 난 스스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나 자신을 소개했다.
"이번에 KUC 푸드에 투자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흠. 투자라...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우리 딸과?"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의미는 이러하리라.
왜 그런 사람이 이 시간에 딸과 같이 나타나느냐는 것.
'그것도 집으로 말이지.'
그 때 설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슥 팔짱을 꼈다.
그것만으로도 설명은 더 필요치 않았다.
노인은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짓했다. 위로 올라오란 뜻이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설아와 연희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선다.
아까의 공간은 발코니를 개조해 정원을 만들어둔 곳으로, 그곳에 가기 위해선 필히 내부를 통해 이동해야 해야만 했다.
노란 조명 아래, 각종 가구들과 고급스런 미술품들이 자리한 복도가 우릴 맞이한다.
난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나아갔다.
그런 날 배려라도 하려는 듯 속도를 늦추는 두 여인.
'역시 잘 사는 집이라 다르긴 하구만.'
느낌부터가 다르다.
보통 잘 사는 집의 분위기는 두 종류인데, 현대식이냐 혹은 고풍적 이느냐로 나뉜다.
그건 그 집주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바... 이 집은 전체적으로 예스러운 느낌의 멋이 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강 회장의 나이가 있어 그런 것이리라.
'그래도 스승의 본가에 비하면 약하긴 하군.'
하긴. 애초에 비교할 걸 비교했어야 했나.
"서후 씨."
"응?"
"저희 집 어떤 가요?"
내가 말없이 주변을 하나하나 살피며 걷자, 설아가 감싼 팔에 힘을 주고는 물었다.
그로 인해 물컹. 거대한 가슴이 내 팔을 짓눌러 아랫도리에 순간적으로 거센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진짜 언제 느껴도 좋은 가슴이야.
난 뻣뻣이 고개를 들려는 내 아들을 진정시키고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회장님 취향이 많이 반영되신 것 같네."
"맞아요. 집 안 곳곳 하나하나 다 회장님이 디자인 하신 것이죠. 아, 제 방과 아이들 방 빼고요."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니 아직 우리 하나 못 봤죠? 회장님 보고 바로 소개해 드릴게요."
"그래."
설아가 말하는 하나란, 그녀의 두 사고뭉치 자식들 중 딸 쪽인 임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매일 같이 클럽에 드나들며 구멍을 놀리고 다니는 발랑 까진 아이.
원래대로라면 내가 따로 작업 칠 계획이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계획을 좀 수정하도록 하자.
원목으로 된 난간대를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찬찬히 계단을 오른다.
머리 장식의 둥글둥글한 부분을 지나 다시 복도에 들어서길 잠시, 이내 난 보름달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있는 한 노인을 바라볼 수 있었다.
희끗한 백발을 아주 짧고 단정하게 정리한 인물.
전체적으로 덩치가 있어 풍채가 좋아 보이며, 강씨라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엔 고집인지 굳은 심지인지 분별할 수 없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인다.
그는 우리의 등장에도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었고, 비서가 우리의 출현을 알리고 난 뒤에야 고개를 돌려 우릴 응시했다.
"회장님, 아가씨입니다."
"차를 내오게."
"알겠습니다."
연희와 회장의 비서가 함께 사라지고.
설아와 난 회장의 허락 하에 정원에 설치된 벤치에 앉았다.
말이 벤치지 소파에 가까운 그것은 엉덩이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나른한 기분이 들 만큼 푹신했지만, 난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는 눈앞의 노인에게 집중했다.
날 가만 응시하는 회장.
주름 사이로 형형한 눈동자가 내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그 말없는 관찰은 한동안 이어졌고. 그것이 불편한지 설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순간, 비서들이 차를 가지고 나타나 우리 사이 자리한 티 테이블 위로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내 이 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들 자리를 비켜주시게."
"알겠습니다."
다시금 두 비서가 자리를 피하고, 그에 따라 내려앉는 무거움 적막감.
설아가 결국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곤 입을 열었다.
"회장님...!"
"거참. 특이한 인간이로군."
"네에...?"
딸아이가 이해 못하는 표정을 짓건 말건, 회장은 나만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올해로 나이가 몇 이지?"
"마흔 셋입니다."
"허허. 어쩐지 젊은 사람치고는 너무 차분하다 했어."
노인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턱을 슥슥 만지는 게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타나는 습관인지는 몰라도, 그는 한동안 그렇게 자신의 턱을 매만지고는 찬찬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렇다 해도 놀라운 건 여전하지만... 혹시 부모님은 무얼 하고 계신가?"
"두 분 다 돌아가셨고, 혼자입니다."
"그거 유감이군. 혹시 부모님께서 살아생전 하셨던 일들은?"
"어머니는 주부에, 아버지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셨습니다."
대답을 하며 슬쩍 옆을 바라보니, 설아 또한 내 대답에 호기심을 가진 채 집중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전에 나에 대해 조사하지 말라한 경고를 당시 잘 받아들이고 실천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에 투자를 하러 우리 회사로 왔다고?"
살짝은 의심어린 눈초리가 더해지고.
노인 왈.
"혹시 자수성가인 건가?"
"자수성가는 아니고요. 그냥 절 아끼시는 분이 재산을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허허. 대체 얼마나 주었길래 회사에 투자를 한다고 나서는지... 늙어서 그런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는구먼."
그런 그 때, 내게 푹 빠진 여인이 내게 딱 달라붙으며 노인의 추궁에 대신 대답하고 나섰다.
"이번에 저희 회사에 1000억을 투자할지 고민하고 나선 이입니다, 회장님."
"1000억?"
노인의 눈 꼬리가 살짝 꿈틀했다.
순간 사기꾼이 아닌가 싶다가도 강설아의 철저한 성격을 떠올리고는 그 가능성을 버린 것이리라.
하긴 나라도 그럴 지도.
1000억이 누구 개 이름도 아니고.
턱을 다시 매만지는 노인이 이내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재산을 주었다는 그 분 성함을 혹시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옆에 있던 설아가 목소리를 높여 제지했다.
손님으로 온 내게 첫 만남부터 너무 무례하고 과도한 추궁을 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회장님!”
그러나 뭐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오는 사실.
난 잠깐 고민하다 이내 그냥 말해 주었다.
괜히 내 과거 들쑤셔서 좋을 것도 없으니.
"강태백이란 분이십니다. 본가가 이곳에서 10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그러나 내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크게 웃어젖히더니 내게 갑자기 사과한다.
"하하핫. 그랬구먼! 그분이라면 능히 가능하지! 암!"
"스승님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이 업계에 50년 이상 구른 이들 중엔 그 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게야. 당시 재산 일부를 누군가에게 증여했다고 해서 그게 누군가 했더니... 그게 자네였구만? 하핫. 우리 딸아이가 정말 멋진 남자를 데려왔구나!"
갑작스런 회장의 행동변화에 설아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올라왔다.
마구 의심하고 캐묻고 할 땐 언제고 이젠 칭찬을...?
"이름이 뭐였더라?"
"서후입니다."
"그래, 서후. 내 방금일은 사과함세. 이게 참... 나는 다른 이들처럼 꽉 막힌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사위를 이상한 놈 한 번 맞이한 뒤로는 걱정이 늘 앞서게 된다네. 제발 이번 일은 그저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었다 생각하고 용서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저라도 이런 예쁜 딸이 있다면 회장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서후 씨... 정말..."
설아가 고개를 푹 떨궜다.
설마 아버지 앞에서 대놓고 칭찬을 이리 해댈 줄은 생각도 못한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비서들을 불러다 음식 준비를 시켰다.
그렇게 간단하게나마 야식을 하게 된 상황.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차려진 자리는 4개인데 한 자리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것.
"하나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합니다."
"흠...!"
설아의 아들 문제로 매스컴이 한 차례 시끄러운 상태다.
덕분에 그 아들 관리가 그동안 어떠했는지 숨긴 것이 모조리 드러나게 되기도 했고.
그런 상태에서 이번엔 딸 쪽 문제가 드러났으니...
"아직도 클럽인가 뭔가를 드나들고 있는 것이더냐? 쯧쯧. 집에 들어오거든 나한테 한 번 보내라."
"네에..."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이 데려온 남자를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기분이 좋던 설아의 어깨가 금세 추욱 쳐졌다.
그녀 스스로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새끼들이 하나같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미끄러지게 되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힘 많이 빠지겠는데... 내가 좀 도와줘볼까.
그에 난 가볍게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윽..."
"서후씨? 괜찮아요?"
풀 죽어있던 여인의 기세가 바로 뒤바뀌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얼굴엔 더 이상 침울한 기색 따윈 보이지 않는다.
오직 눈동자엔 나만이 비칠 뿐.
크으.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이지~
모든 고뇌를 잊게 해주는 마법의 효과!
"아아. 괜찮아. 걱정 마."
"많이 아프면 이야기해요. 알았죠?"
"응."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노인이 물로 목을 축이고는 나직이 입을 연다.
"나도 아까 비서를 통해 들었다. 그 새끼가 회사에 찾아왔었다고?"
"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설아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녀는 살기를 피우며 바득 이를 갈았다.
"어떻게 하긴요. CCTV 영상 확보했겠다 바로 한 방 먹여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인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혹은 그게 맞는다는 듯.
그러나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현재 KUC는 이제 대기업에 간신히 발을 얹는 상황.
제 아무리 잘못이 그쪽에 있다 해도 장남을 건든다면 이쪽도 보복을 받을 건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대등한 위치가 아닌 한 도리어 피해는 설아쪽이 더 입을 것이다.
'그게 인간 사회의 불변의 진리지.'
힘이 있는 자는 잘못을 해도 용서가 되고, 힘없는 자는 잘못이 없어도 쓰러지는 그런 불합리한 생태계.
난 설아의 손을 꼬옥 쥐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마. 너희 회사만 타격을 입을 뿐이야."
"그치만...!"
"설아야. 사위 말이 맞다. 그러지 않는 게 좋다."
그러자 설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의 의견이 거절당한 것 때문은 아니고, 노인의 단어 선정에 놀란 것이다.
"사, 사, 사위라뇨... 회장님... 그건 아직 정해지지..."
"흠흠. 그것도 그렇지. 내 미안하네. 나이가 들면 뭐든지 조급해져서 말이야."
내게 사과하는 회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냥 절 좋게 봐주신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허헛. 고맙네."
이 정도면 충분히 화기애애해 졌구만.
두 부녀와 함께 찬찬히 식사를 즐긴다.
***
"어떻습니까, 회장님?"
비서의 질문에 회장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노인은 그렇게 약 10여 분간을 사색 끝에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떻지?"
"행동거지를 볼 때, 주눅 들거나 하는 그런 건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거대한 회사. 대표의 집에 초대받아, 그 그룹 회장을 눈앞에서 마주한다는 건 매우 떨리는 일이다.
그런데 마치 이런 건 자주 겪어봤다는 듯 매우 자연스럽다.
"사기꾼은 아닌 듯합니다."
"내가 봐도 그렇다네."
행동과 여유도 그렇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도 신빙성 있는 건 바로 강태백이란 노인의 대한 이야기.
그가 2천억 이상의 재산을 증여한 사실은 이쪽 바닥에 오래 눌러앉은 이들이라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을 통제했었기에 그 진실은 고작 신문 한 구석에 작게 실렸고, 심지어 그 신문사도 나중에 사라져 그 사건은 조용히 옛 사람들의 기억 속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따로 조사를 해 볼까요?"
비서의 질문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네. 자금 출처만 파악해 봐도 될 걸세."
세금을 다 내고 증여를 했으니 확인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으리라.
노인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방금 본 남자를 떠올렸다.
전 남편에게 복수하려는 설아의 행동을 제지하고, 도리어 그녀를 걱정하며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세.
'참으로 탐이 나는 인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