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100 난생 처음 본 도향의 이질적 모습
* * *
"아저씨!"
"응?"
민아가 슬쩍 주변을 슥슥 살피더니 내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한다.
"요새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요!"
"흠흠.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구요. 힝..."
역시나.
비록 하루지만 백마랑만 놀았다고 바로 티가 나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요새라니... 민아의 단어 선택으로 볼 때, 꽤나 참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본다.
지금 이곳은 식당 앞.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은 거의 없다.
아직 다른 일행들은 식사를 하는 중.
난 민아를 데리고 식당에서 좀 떨어져 어느 그늘진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몇 차례 키스 해주자, 금세 진정이 됐는지 아이의 얼굴에 뾰로통한 표정 대신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이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하리라.
"다른 사람들 우리 찾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돌아갈까?"
"네에!"
앞장 서는 민아를 따라 찬찬히 식당 정문으로 돌아간다.
난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경로를 살짝 이탈해 흡연 구역 재떨이가 있는 곳으로 가 불을 붙였다.
"스읍. 후우..."
남의 것을 뺏어먹는 것.
분명 세상에서 제일 맛난 짓이긴 하지만 여러 단점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귀찮은 건 바로 늘 관리를 해줘야하는 것.
조금이라도 소홀이 했다간 점점 수습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본인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을 타인으로서 이리저리 흔들며 농락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니다.
그러니 미리미리 관리해야 한다.
이성을 함락시키고, 그 다음엔 드러나는 욕망을 잘 컨트롤 하고.
'이 짓도 거의 20년 가까이 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인간의 마음이란.
어느새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넣고는 하나둘 나오는 일행들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 그 때, 내가 나아가는 방향에서 웬 사내가 급히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몇몇 사람들과 부딪치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도 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는데...
내 앞쪽에서 걸어오던 한 모녀 또한 그와 부딪치게 되었다.
"어...?"
뒤쪽에서 어깨를 부딪친 여인이 넘어지며, 함께 걷던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도 휘청한다.
그러다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야구공을 떨어뜨린다.
그것은 데굴데굴 굴러 차도로 떨어지고.
아이는 그것을 줍겠다며 차도로 들어선...
난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자동차의 경적이 울린 건 그 직후였다.
빠앙!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세계 속에서, 아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어머니의 표정이 들어온다.
불안이 깃든 눈동자는 자신들을 향해 뛰어오는 날 직시한 순간 크게 뜨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고개가 아이에게 닿는 순간,
곧 나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차도로 막 들어선 여아를 번쩍 들어 올리며 함께 인도로 돌아간다.
빠아아아앙!
경적 소리와 함께 빠르게 옆을 스쳐지나가는 차량.
"어이쿠. 아가씨! 위험하잖니."
"후, 후에엥...!!"
아이가 놀랐는지 울음을 터뜨린다.
난 그런 그녀를 그 어머니 앞에 내려주었다.
아이는 곧바로 그 엄마 품에 안겨 펑펑 울어댔다.
그 어머니가 빠르게 아이를 진정시킨다.
진한 갈색 머리가 매력적인 백인 여성.
모델 같은 외모가 상당히 인상 깊어 평소라면 작업이라도 걸었겠지만...
이미 임무로 인해 먹고 있는 백마가 있는데다, 일행들도 걱정스레 뛰어오는 상황이라 난 쿨 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여인이 날 불러 세운다.
"저기."
"예?"
"정말 감사합니다. 사례를 해드릴 테니 명함이나 폰 번호라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에? 저어...?"
그러나 난 한 번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그러고 돌아서자 일행들이 후다닥 달려와 걱정스레 묻는다.
"아저씨 다친데 없어요?!"
"아, 그런 걸 왜 뛰어들어용, 정말!!"
분명 한 사람씩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목소리 제일 큰 두 초딩의 말밖에 귀에 안 들어온다.
그에 난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아, 괜찮아. 다들 봤다시피 다친 덴 없어. 근데 간만에 전력으로 뛰었더니 어휴... 숨이 좀 차네."
"정말이지... 서후 수고했어요. 이거 물 좀 드세요."
"하여튼 오지랖은... 멋진 짓은 아주 지 혼자 다해요."
은주는 내게 물을 건네주고 새롬은 그 옆에서 투덜댄다.
그래도 둘 다 내가 다친 곳이 없음에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에 난 이제 마지막 남은 일행 도향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뚜벅뚜벅.
말없이 렌트한 차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그녀.
걸음걸이가 화가 난 것 같은 건 나만 느끼는 게 아니리라.
"아, 아저씨! 도향 언니 화났잖아용! 의동생 다치는 줄 알고 놀라셨나보당."
"그러게. 도향 언니답지 않네."
정말 화가 난 건가? 왜?
일평생 살아오며 그녀가 저리 화를 낸 건 본적이 없었던 터라, 난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뒤늦게 식당에서 나오는 스미스 부부.
카터가 도향이 어디 있나 둘러보더니 입을 연다.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요?"
식당으로 향할 때와는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다.
그도 그럴 게, 분위기를 주도하던 도향이 말 한 마디 안 한 채 창문 밖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두 초딩은 손가락만 빨았고, 그 말 많은 카터 또한 오로지 운전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두 초딩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아저씨. 어떻게 좀 해봐요."
"맞아용. 예림이 이러다 체하겠어용..."
아니, 그렇게 말을 해도 말이지...
슬쩍 도향의 표정을 살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20년 경력으로도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저기 도향...?"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는 그녀.
그 반응에 두 아이는 소리 죽여 킥킥 웃어댔다.
얌마. 니들 진짜...
결국 그렇게 아무런 대화 없이 목적지에 도착한 스미스 부부와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고.
난 정원 나무벤치에 앉아 있는 도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옆에 앉아도 돼?"
"...응."
후우. 이제는 대답을 해주는구만.
그녀 옆에 앉아 그녀가 바라보는 하늘을 함께 바라본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15년 쯤 됐나? 누나랑 이곳에 다시 온 게."
"...14년."
"그래, 14년. 벌써 그렇게 됐네. 누나랑 만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거의 20년 가까이 됐지, 아마?"
"22년 하고도 10개월쯤 됐지."
고개를 돌려 걸크러쉬의 매력이 느껴지는 여인을 바라본다.
노을이 진 붉은 빛 아래, 강렬한 눈 화장과 미풍에 흔들거리는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세고 있었어?"
"그냥... 달이 지날 때마다 세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렇구나."
항상 쿨하길래 나 또한 다른 여타 남자들처럼 잠깐 즐기는 목적으로 만나는 줄 알았더니, 도향에게 난 생각보다 중요한 존재였나 보다.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등 위에 내려놓는다.
"미안. 걱정 끼쳐서..."
포개어진 여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날 날카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서후! 넌 왜..."
그러나 그 순간 닿은 내 입술의 감촉에, 치켜 뜨인 여인의 눈이 살며시 감겼다.
부드러운 감촉이 떨어졌다 만나길 반복하고.
난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미안해. 다음부턴 안 그럴게."
"...약속이야. 꼭 지켜."
"응."
그제야 도향의 얼굴이 풀어졌다.
난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는 건물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걸 본 일행들의 환호.
"꺅! 언니 원래대로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용!"
"맞아요. 예림이랑 저랑 얼마나 무서웠다구요!"
"언니, 진짜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은주씨랑 나도 완전 쫄아서 차에서부터 바들바들 떨었다니깐~"
"원래대로 돌아오시니 참 좋네요, 도향씨! 후후."
도향은 미안한 얼굴로 일행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렇게 위태로웠던 분위기는 다시 회복되고, 도향과 난 다시 내일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틀 남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제 진도 뺄 만큼 뺐으니까 마무리 가야지."
"벌써 그 정도나 뺀 거야? 우리 서후, 실력 많이 늘었네~"
"누나 도움이 컸지."
도향이 작게 웃으며 내 볼을 확 잡아당겼다.
누나 말고 다시 이름으로 부르란 뜻이다.
바로 수정해준다.
"네 도움이 컸어."
"후훗. 그럼 이젠 내 도움은 필요 없겠네?"
그랬다.
마지막 마무리란 바로 사랑하는 이 옆에서 관계를 갖는 것.
이 부분까지 성공적으로 완료한다면, 여인들은 더 이상 나와의 섹스는 물론 애 낳는 부분에도 주저함이 없어진다.
심지어 떠난 뒤에도 늘 나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만나게 되면 극진히 대접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봉사하게 된다.
아무튼 이젠 카터를 더 이상 잡아 끌 필요가 없단 의미.
"응. 5일간 정말 수고 많았어. 푹 쉬어."
"축하주는 이틀 뒤에?"
"그래."
"그럼 난 이틀간 친구들이나 보러 갔다와야겠다~"
그 친구란 바로 식물.
여전하구만. 그놈의 식물 사랑.
도향이 손을 흔들고는 본인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 내일 일을 위해 링링을 찾아갔다.
"링링, 수면제 좀 부탁합니다."
"벌써 마지막 단계까지 돌입하신 겁니까?"
살짝은 놀란 눈치.
"예, 링링이 도와준 덕분에..."
"제 도움은 무슨... 서후가 다 잘한 거지요."
의외네. 내 칭찬도 다해주고.
그에 고맙다며 엉덩이를 툭툭 때려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눈을 치켜뜨며 말한다.
"발정 난 원숭이만 아니면, 축하 기념으로 직접 요리라도 대접해줬을 텐데 말입니다."
에? 직접 요리를?
"정말로?"
"뭐 서후가 그리 변할 일은 없으니 앞으로도 요리 대접할 일은 없겠지만요."
그러고는 복도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좀만 자제해 볼 걸.
링링 요리 솜씨는 제법 훌륭하다.
고급 식당에 절여진 내 입맛에도 맞을 정도로.
'뭐 언젠가는 맛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오겠지.'
***
쏴아아
은은한 조명 아래, 시원한 물소리가 화장실을 메운다.
세면대에 쏟아진 물은 떨어짐과 동시에 구멍을 통해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턱 끝 즈음 오는 단발의 미녀는 그 소용돌이치는 광경을 말없이 가만 내려 본다.
그녀는 그렇게 멍 하니 있었다.
마치 배터리가 다 되어 멈추어 버린 시계처럼.
태엽이 다 풀려 멈추어 버린 인형처럼.
그런 그녀가 움직임을 보인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내 새끼야..."
여인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그녀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넌 내가 키운 내 새끼... 내 아이야. 시대에 하나밖에 없는 걸작. 전무후무한 대작."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눈엔 싸한 광기가 어린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말했다.
"그깟 잡것들 때문에 잘못되어선 안 돼. 그런 건 허락지 않아... 절대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