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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화 〉 #096 도향의 의미심장한 조언 (100/200)

〈 100화 〉 #096 도향의 의미심장한 조언

화 

* * *

그레이스를 먼저 보내고.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천천히 들어간다.

타이밍이 좋았는지 때마침 직원이 음식을 올려놓고 있다.

"서후! 뭘 하느라 이리 늦게 와?"

"아... 담배 한 대 피면서 통화 좀 한다고."

"으이구. 그놈의 담배! 좀 끊어라. 그치 은주씨?"

"맞아요, 서후씨. 담배는 끊는 게 좋아요!"

어쭈. 아주 죽이 척척 맞네.

꼭 민아랑 여우 둘이 뭉친 모양새랑 똑 닮았다.

그러고 보니 걔들 일어나긴 했나?

"여우랑 민아는 뭐하고 있데?"

"이제 막 일어났나 봐요. 정말이지... 어제 서후씨가 그렇게 일찍 자라고 했는데 참..."

"둘이 말 안 듣게 생겼잖아."

"그건 그래요. 쿡쿡."

고개를 돌려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세 사람을 슥 바라본다.

카터와 도향은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고, 그레이스는 그 옆에서 음식을 깨작이고 있다.

도향의 능력이라면 능히 그녀 또한 대화에 참여케 할 수 있으나 도리어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게 눈에 들왔다.

누가 아내인지 모를 일이구만.

부인을 두고 딴 여인이랑 저리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니...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중간에 아내를 돌아보며 말을 걸려고 하나, 도향이 부르자 주인의 호명을 받은 애완견 마냥 고개가 도로 되돌아간다.

'실력 여전하네.'

촉도 좋고 센스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남녀의 심리를 완전히 꿰고 있는 게 결정적이리라.

덕분에 그레이스는 마치 혼자 식사하러 온 것처럼 외롭게 식기를 움직여대고 있었다.

도향이 만들어준 기회, 적극 활용해야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그녀를 우리 대화하는 곳으로 슥 끌어들인다.

"그레이스는 어때요?"

"네에?"

"어렸을 적 말 잘 듣는 편이었나요?"

백마가 질문자인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에 생긋 웃어주자, 금발의 여인 또한 환하게 웃음꽃을 피웠다.

"쿡쿡. 아뇨. 매일 사고를 치고, 매 맞기 싫어 도망 다니는 타입이었어요."

"세상에... 농담이죠?"

"그니까요. 그레이스씨는 절대 사고치고 다닐 상은 아닌데!"

"알고 보니 집에서는 남편 휘어잡고 밤일도 주도하는 그런 스타일 아냐?"

새롬의 말에 은주와 그레이스가 빵 터졌다.

그 이후로도 내 꾸준한 노력 끝에, 그레이스는 우리의 대화에 즐겁게 참여할 수 있었다.

훈훈해진 분위기 속, 그레이스가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내게 까딱 고개 숙인다.

챙겨줘서 고맙다는 뜻이다.

'별 말씀을.'

나 또한 작게 고갤 숙여준다.

그렇게 백마 사냥 2일차도 매우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아저씨이~ 정말 너무해요!"

"맞아맞아! 우릴 빼놓고 가고!"

아주 잠을 푹 잤다고 힘이 넘치는 두 초딩.

아이들이 내게 매달리자, 그 사이 후다닥 각자의 방으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여인들이 보인다.

뙤약볕 밑에서 신나게 논 탓에 다들 피곤한 것이다.

젠장. 부럽다...

"민아야, 예림아. 아저씨 좀 씻고 오면 안 될까?"

"에이~ 안 씻어도 될 것 같은데?"

"응. 아저씨 좋은 냄새나요!"

그럴 리가 있나.

두 아이의 향긋한 향기 속에서 바지를 한 번 털어 내 몸에 밴 냄새를 맡아본다.

밤꽃 향기가 미약하게 느껴진다.

거기다 그레이스의 보지 물 냄새도.

'하... 좋은 냄새란 건 그 냄새를 말하는 거였군.'

나랑 몸 좀 섞었다고 이젠 정사의 냄새가 좋아진 모양이다.

난 좌우로 딱 달라붙은 두 초딩에 이끌려 어느 거실 소파로 끌려갔다.

앉자마자 부비부비 양쪽에서 살을 맞대는 아이들.

아... 음. 오늘 몇 번이나 쌌더라?

정확한 횟수는 딱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열심히 한 탓에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성욕보단 잠이 조금씩 조금씩 찾아오고.

그에 난 소파에 푹 기대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

"어? 민. 아저씨 잔당."

"그러네. 오늘 많이 피곤하셨나봐."

민아와 예림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저씨가 돌아와 같이 놀아줄 것을 내심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2시간동안이나!

'힝. 이러면 오늘도 못하는뎅.'

어제는 그렇다 쳐도 오늘도 라니...

예림이는 애꿎은 아저씨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서 아저씨를 덮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곳엔 절친인 민아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저씨를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에 앉은 민아 또한 같은 생각이었으니...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여인.

동시에 입을 뗀다.

"아저씨 이불 필요하실 것 같은데."

"아저씨 이불 필요할 것 같앙."

잉? 두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같은 말을 동시에 할 수 있지?!

새삼 생각은 같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두 사람이었다.

놀라움이 잦아들고.

서서히 내리 깔리는 무거운 긴장감.

민아와 예림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뗐다.

"이불은..."

"누가 가져올깡..."

목울대가 한 차례 움직인다.

그에 따라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진다.

둘 다 상대방이 이불을 가지러 간 사이에 아저씨와 무언가를 할 속셈.

빠른 협상이 이루어졌다.

"알지, 민? 단판이양."

"오케이. 말 바꾸기 없기."

서로 손을 뒤로 감춘다.

그러고 시작된 카운트 다운.

하나, 둘, 셋!

"가위바위보!"

번쩍. 두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서로의 패를 보이기 전, 그 아래 누워있던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꺄악!"

"엄마얏!! 아, 아저씨이?"

나름 찔리는 게 있던 터라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남자는 그런 거 저런 거 신경 안 쓰고 소파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터덜터덜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여인들, 자리에서 따라 일어나며 외치나...

"아저씨 어디가용?!"

"아저씨 어디가세요?"

"아아... 피곤해서 이만 잘라고."

남자는 반쯤 감긴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휘적휘적. 정말로 많이 피곤한지 팔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말문이 막힌 두 사람.

그는 그렇게 손을 서너 차례 흔들어주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귓가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먼저 잔다. 잘 자~"

"후엥?"

"에에?"

허망한 얼굴로 거실에 남게 된 민아와 예림이.

그들은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약 10분가량을 남자가 사라진 곳을 향해 멍 하니 앉아만 있었다.

***

'하여튼 웃기다니깐.'

나를 두고 호시탐탐 엉큼한 생각을 하는 두 초딩의 행태를 볼 때마다 왜 이리 웃긴지.

난 양팔을 위로 쭉 들어 올려 기지개를 폈다.

간만에 열심히 흔들고 싼 탓에 몸이 확실히 피곤하다.

그래도 늘 하던 일이라 그런지 육체적으로는 피곤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멀쩡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생생하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본디 남자는 사정을 하고 나면 극히 냉정해지곤 하니까.'

찬찬히 걸음을 옮겨 도향의 방으로 향한다.

여인 셋이서 함께 쓰는 방이라 그녀를 어떻게 빼와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잠시, 다행이도 도향은 방 앞 복도에 등을 기댄 채 벽에 걸린 그림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 다가가 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걸 함께 본다.

앞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하나 없는 남자가 그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그의 어깨와 두 다리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한 손에는 웬 저울이 들려있다.

"...카이로스라고 알아?"

"그리스 신화?"

"응."

"이야기는 들어 봤어."

외모가 굉장히 독특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음. 그래. 딱 저 그림 속 인물과 같았다.

도향은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야. 그의 외모는 기이했는데... 앞머리가 무성한 건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게 하면서도, 반대로 알아보기만 한다면 잡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지."

"뒷머리가 빡빡이인 건, 지나간 뒤에는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고?"

"응. 발에 날개가 달린 건 빠르게 사라지기 위함이고."

도향이 날 돌아봤다.

살짝은 피곤함이 얼굴 위로 올라와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둔갑시키는 치명적인 여인.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며 뒤따르는 내게 묻는다.

"저 저울과 칼의 의미는 알아?"

"...판단과 결단이었나?"

"맞아."

한 쪽 방 안으로 들어서 발코니로 나가, 붉게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

조금 더 지나니 황혼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향이 찬찬히 입을 떼었다.

"지금 네 상황도 똑같아. 저울과 같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해. 칼과 같이 날카로운 결단을 내리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이야긴... 아직 난 부족하다?"

"...솔직히 그래. 내 심정은."

도향이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에 따라 고요함이 맴돌았다.

마치 온 세상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짧은 단발이 앞뒤로 흔들거리며, 멈췄던 것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조금씩 잠식되고 있는 도시가 보인다.

'이유는 말 안 해줄 생각인가.'

그녀에게 묻고 싶다.

방금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 그레이스나 임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과는 뭔가 다른...

"으아앙~ 뻐근햇... 난 이만 자야겠다!"

"마사지 해줄까?"

"어머. 정말?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서후 손길이면 완전 힐링 되니깐! 근데 미리 말하지만, 해줘도 원하는 대답은 안 나올 거야~"

"그런 거 아냐. 오늘 그 수다쟁이 옆에서 고생해준 게 고마워서 그래."

도향이 작게 웃었다.

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긴 알아서 다행이네. 진짜 그런 수다쟁이는 간만인 듯."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여인.

이내 침대에 누워 색기 어린 얼굴로 내게 손짓한다.

"한판?"

섹스 할 생각도 없으면서 하여튼.

"안마 받고도 너 안자면..."

"콜~"

고개를 돌려 세상을 바라본다.

해는 졌다.

그에 따라 도시 전역에 어둠이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곧 불빛들이 하나둘 밝아오며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사라져 간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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