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083 스승의 사정
* * *
"어르신... 상당히 잘 사시나 보네요."
새롬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그녀만은 아니었다.
여우와 민아, 그리고 은주까지. 네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건물 내부를 바라보았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조명과 도저히 이곳이 거실인지 고급 라운지인지 구분이 안 될 장식들까지.
어떤 물건과 가구가 놓여있는지는 일단 제쳐 두고 보더라도, 드넓은 공간에 바닥부터 천정까지의 호화찬란한 디자인에 그들의 입은 떡 벌어져 다물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향과 나만이 익숙한 듯 행동할 뿐.
곧 정신 차린 초딩 둘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폴짝폴짝 뛰며 외친다.
"할아버지! 저희 구경해도 되나요?"
"그래그래. 링링아, 네가 좀 안내를 해 주거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링링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
도향은 내 곁에 남으려다가 스승의 눈짓에 쳇 하는 소리를 내며 링링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견원지간이라 웬만하면 서로 동선조차 겹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단둘이 남자, 노인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다가가 넓디넓은 정원을 천천히 거닌다.
"그래. 일은 아직 처리가 덜 되었다고?"
"네, 뭐... 이왕 넘어뜨린 거, 길이라도 닦아놓을까 해서 말이죠."
"흠...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그러나 그 여인은 책임을 질 각오로 삼켜야 할 것이다. 그 회장이 보통이 아니거든."
역시 그런가.
직접 마주친 적은 없지만, 강설아가 그리 쩔쩔 매는 걸 보면 보통은 아닐 거란 생각은 했다.
"뭐 그래도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 회장과 회사 인지도가 상당히 좋아, 내년 안에는 능히 대기업 타이틀을 달 수 있거든."
"그래도 아직은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허허허. 그래서 내가 널 높게 평가하는 거란다."
잔디 위 원목으로 만든 벤치.
노인이 그 위에 앉았다.
그에 나 또한 그 옆으로 조금 떨어져 앉았다.
노인은 잠시 가만 침묵을 유지하다 말을 꺼냈다.
"내가 왜 왔는지는 짐작하고 있겠지?"
"...약속은 지킬 것입니다."
"그래. 넌 항상 그래왔지. 단 한 번도 날 속이려 하거나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없는, 힘이 약할 때에도 말이지. 근데 내가 이번에 좀 급해져서 말이다."
"무슨 뜻입니까?"
노인이 말없이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그 시선을 따라간다.
스프링클러가 뱅글뱅글 돌며 잔디 위로 물을 뿌리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고장이 났는지 물이 흩뿌려지는 모습이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내가 젊었을 적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는 알고 있지?"
"예."
"이번에 그 일을 부탁받았다."
"그 일에서 완전히 손 뗀 거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노인이 눈을 감았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에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말이야. 거절할 수가 없어. 쯧쯧."
"그래서 절 찾아온 거군요."
"그래. 마음 같아서는 1년이고 2년이고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그리 된 게다."
노인이 날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는 의미.
별 수 있나. 약속을 했고 도움도 받았으니 해야지.
솔직히 집이 개 박살 난 이후로 스승은 나에게 유일한 가족이오,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그에게 세상사는 법과 인생에 대해 배웠고, 심지어 유산이란 명목으로 1000억 넘는 돈도 받았다.
종종 여자를 물건 다루듯 하고, 날 이용해 먹으려 하는 것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고 좀 소원해졌지만... 늘 마음속엔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어찌됐든 내가 과거의 악몽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준 은인이었으니까.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노인이 미소 지었다.
손을 뻗어 내 팔을 툭툭 두드리며.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구나.
처음 만났을 때도 이리 자주 두드려 주곤 하셨었지.
노인이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끼익끼익. 스프링클러가 수명이 다 되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승.
그는 진한 미소를 보이며 내게 말했다.
"집 나갔던 제자 놈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실력 파악을 좀 해보도록 할까."
스승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복도에서 아리따운 미녀와 딱 마주쳤다.
검은 머리칼을 깔끔하게 뒤로 묶은 엘리트녀, 링링이다.
손에 시원한 음료들을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일행에게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후, 오랜만입니다."
"예, 링링.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럭저럭요."
그런데 뭘까.
평소와는 다르게 기분이 좀 나빠 보인다.
아, 도향 때문에 그런 건가?
그러나 휙 돌아서는 모양새가 어째 내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원래라면 링링의 그런 작은 변화를 파악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으나, 저번에 단둘이 만나 뜨거운 하루를 보낸 뒤로는 묘하게 내게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그녀였다.
'흠... 이건 그동안의 촉으로 봤을 때 99% 나 때문인데.'
대체 뭐지? 천하의 링링이 이렇게 대놓고 기분 나빠할 정도면, 내가 완전 죽을죄를 지었단 건데...
일단 짚이는 게 없으니 실력을 발휘해 풀어주도록 하자.
링링은 내게 마음을 연 전적이 있는 만큼, 조금만 공감대를 다시 형성해 주면 된다.
그에 난 조심스레 그녀의 뒤로 다가가, 부드럽게 허리를 안아주었다.
링링, 화들짝 놀라 경직.
"...뭐하시는 겁니까?"
"스승님이 좀 변하신 것 같더군요."
내게 발정 난 원숭이라느니, 시도 때도 없이 그 생각만 하는 야만인이라는 둥, 이런저런 말을 하며 쏘아 붙이던 여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푹 떨구었다.
역시 링링하고 공감대 형성에는 스승만한 게 없다니깐.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건가?
좀 반응이 이상하다.
난 아까 내가 느꼈던 것들을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그동안 봐왔던 스승과 달라진 점들을.
"조금 조급해 보이셨습니다. 세상을 덧없이 바라보는 것도 더 심해지신 것 같으시고."
"......."
"링링?"
"...사람들 기다리겠습니다. 그만 가도록 하지요."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려는 그녀.
난 허리를 휘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왼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날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링링의 눈이 흔들리고 있다.
방금까지 내게 보이던 상한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슬픔과 불안의 눈이 가득 찬 게 보였다.
링링이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라면, 설마...
"스승님께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렇잖은가.
갑자기 조급해진 노인네.
지금까지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던 링링의 불안 증세.
여인을 붙든 내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링링이 내 손을 빠르게 탭 했다.
"아, 미안합니다... 링링."
링링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서후와 헤어진 뒤로 주인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저런."
그랬던 건가.
그러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힘내라며 그녀가 들고 있던 쟁반을 옆 선반에 올려놓고는 꼬옥 안아주었다.
힘들 것이다.
첫사랑이 짝사랑이 된다는 건.
사랑하는 이를 지켜봐야만 한다는 건 말이다.
일순 어렸을 적의 일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당시 나는 그걸 못 견뎌, 고향과 친구, 사랑하는 이를 떠나 서울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스승을 따라다니며 이 여자 저 여자 마구 하고 다녔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연스레 잊은 뒤였지만,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힘들다. 짝사랑이란 것은.
흑. 흑흑...
어느새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우는 여인.
난 가만히 그녀의 등등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한참동안을 내 품에서 흐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참고 참아왔던 감정을 지금 이 순간 모조리 털어내겠다는 듯.
"응? 뭐야? 왜 네가 가져와?"
우느라 엉망이 된 링링 대신 내가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나자, 새롬이 고개를 갸웃하곤 물어왔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손을 움직여 자신이 주문한 걸 가져간다.
참... 누가 검사 아니랄까봐.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할 건 다 한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가져왔어."
"아하. 하긴 바쁘겠더라. 그 어르신 비서지?"
"응. 그건 그렇고, 어떻게 다들 잘 구경했어?"
내 질문에 민아와 여우가 신나 떠들어 댔다.
어디가 어떻고 또 어디는 어떻고.
대박이라느니, 이런 집에서 평생 살고 싶다느니.
두 초딩의 속사포에 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방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 민아랑 저랑 쓰고용. 엄마랑 새롬언니랑 도향언니랑, 이렇게 셋이서 쓰시기로 했어요!"
다 독방을 쓸 줄 알았더니...
사전에 들은 게 있는 모양인지 링링이 방 두 개만 내어준 모양이다.
도향을 슬쩍 돌아보자 그녀가 작게 고갤 끄덕였다.
의도적인 배치라는 의미다.
'잘됐네. 덕분에 움직이기 수월하겠어.'
개별로 따먹기는 불편해졌지만, 스승의 테스트를 일단 검증하려면 뭉쳐놓는 게 나았다.
그래야 자리를 비워도 없어진 날 찾겠다고 돌아다니는 인원이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곳 지리 파악이나 좀 해 볼까.
"난 아직 집 구경 못했는데..."
"아저씨, 저용!"
"아저씨, 저!"
동시에 손을 들고는 서로를 쳐다보는 두 초딩.
옆에서 손을 들려던 은주는 눈치껏 웃으며 도로 내린다.
"림, 너 옷 갈아입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미안하지만 아저씬 내가 안내할게."
"민, 넌 짐 풀어야지 않아? 아저씬 나한테 맡경."
팽팽하게 맞부딪치는 두 아이.
나랑 단 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 은근슬쩍 스킨십으로 넘어가려는 속셈이 뻔히 보인다.
내가 둘 모두와 이미 섹스를 한 관계라는 걸 알면, 저리 싸울 이유도 없건만...
아쉽게도 그걸 모르니 타협점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걸 평정할 새 인물이 나타났으니.
"꼬마 아가씨 둘 다 바쁜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움직여야겠네."
도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 행동에 두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 뛰는 건 당연한 수순.
그러나 둘이 힘을 합칠 때에도 밀렸는데, 따로 덤비는 지금 같은 상황엔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너희 둘. 자꾸 따지고 들면, 남매의 권한으로 서후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한다!"
바로 입을 다무는 아이들.
그렇게 도향과 난 집 구경을 하게 되었다.
슬쩍 뒤를 보니, 쭐레쭐레 우리를 따라오는 두 아이가 보인다.
그걸 함께 본 도향, 목소리를 낮춰 내게 묻는다.
"스승이 뭐래?"
"이번에 일을 맡았다고 하시더라."
"일? 그만 뒀다고 안 했나?"
"과거에 크게 빚져서 물릴 수가 없다네."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거였구나."
도향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지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집 구경을 시켜주듯 꾸준히 이동한다.
"바로 시작하재?"
"아니. 일단 내 실력 검증을 하시겠다네."
"영감탱이 여전하네. 목표물은?"
"곧 데려오겠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이 하는 일.
그건 의뢰자로부터 의뢰를 받아, 타깃을 성적으로 타락시켜 의뢰자와 이어주는 것이었다.
듣는 걸로는 굉장히 쉬워 보이나,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
의뢰를 완수해 받는 금액이 최소 몇 십억인 것만 봐도 알만 하지 않은가?
멀쩡히 잘 살고 있는 남의 부인을 타락시켜 이어주는 게 어찌 보면 가장 쉬운 난이도일 정도였다.
내가 살짝 얼굴을 굳히자, 도향이 픽 웃고는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걱정 마. 이 누나가 잘 서포트 해 줄 테니까~"
하여튼... 정말 든든하다니깐.
"고맙다."
"별 말씀을. 그리고 자신감을 가져도 돼. 넌 지금껏 내가 본 남자들 중 최고니까 말이야. 그러니 다 잘 될 거야!"
"그래."
그럼 자신감 좀 되찾을 겸 슬슬 식사를 시작해 볼까?
일단 처음은 음... 좋아. 너로 정했다!
내 첫사랑을 똑 닮은 아이, 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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