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078 민아의 합류
* * *
"새벽엔 좀 미안했습니다, 링링."
"괜찮습니다."
평창동, 스승의 본가가 내다보이는 길.
그만해 달라는 걸 무리하게 밀어붙인 일을 사과하자, 링링이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내게 좀 미안한 감정을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닌가. 내가 좀 오버한 거려나?
아무튼 이제 헤어질 시간.
차에서 같이 내려, 트렁크에서 작은 선물가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넨다.
그 안에는 스승이 좋아하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어제 우연찮게 쇼핑몰에서 만나게 된 우리.
그런데 왠지 우울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스승이 좋아하는 물건을 사러 가자 제안했었고 이것을 함께 사온 것이었다.
'뭐 덕분에 이래저래 하루 종일 링링을 맛나게 먹을 수 있었지.'
물건을 건네받고는 링링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인님이 이런 것을 좋아하실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뭐 지금은 한 물 간 유행이니까요. 티를 안 내시는 거지요."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바로 수석이다.
임의로 만들어 냈거나 가치가 없는 돌멩이가 아닌, 진짜.
그에 돈도 꽤 많이 주었다.
한물갔다곤 해도 괜찮은 건 그 값어치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서후."
"별 말씀을. 링링은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그 몸매, 스승님이 좋아하는 스타일 맞으니까요."
링링이 미소 지었다.
음. 저 미소를 보니 왠지 점수를 따고 싶어지는데...
그래야 내 여인으로 만들어 빨리 애를 낳게 할 것 아닌가?
그에 곧바로 립서비스를 날려준다.
언제나 그렇듯 사심이 느껴지지 않는, 진심을 가득 담아.
"그... 스승님에 대한 건 뭐든지 솔직히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한 거 있지요."
"네, 서후. 그 약속,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어휴. 눈이 번뜩이는 게 아주 무섭네, 무서워.
잊었다가는 아주 공구리치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진짜는 시작도 안 한 상태. 난 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말을 꺼냈다.
"그거 꼭 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건 가르쳐 드릴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 무슨 의미입니까?"
호의를 베풀자 바로 경계하는 여인.
그녀는 방금까지 보여주던 미소와 고마움을 싸그리 회수하고는 차가운 시선을 고수했다.
나보다 키도 작은 여인에게서 풍기는 기세에 피부 털 하나하나가 바짝 서는 걸 느낀다.
정말이지 다른 이들 같았으면 바로 빈정 상하거나, 기세에 움츠러들어 하려던 말을 취소할 정도로.
그러나 내가 누군가.
링링은 나한테 절대 안 된다.
능구렁이 스승 밑에서 구르고 구른 나에겐 말이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도와주려는 사람 기분 나쁘게."
"말 돌리지 마시죠.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호의를 보이는 건 99% 흑심입니다. 그 남은 1%도 못난이들이 하는 오지랖이지요."
...링링의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심히 궁금해진다.
근데 틀린 추리는 아니라 할 말이 없네.
그래도 연기는 계속된다.
"뭐 어떻게 생각하듯 링링 마음입니다. 아무튼, 결론만 말씀드리지요. 전 링링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스승 아래, 어쩌면 누이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일지도 모르지요."
"......."
원래대로라면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
그러나 분명 어제 링링은 틈을 보였었다.
차 속에서.
나를 통해 안도하고 마음을 놓았었다.
그 마음속에 나라는 인간이 새겨져 있는 지금은 다르다.
"스승님도 나이도 있으시고. 개인적으로는 둘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그러니 관계 개선이나 진도를 나가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까 그 부탁 외에도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내 눈을 쳐다보며 이리저리 분석하던 링링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녀는 바닥... 아니, 잠만. 내 거기를 보고 있는 건가?
아무튼 무언가에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유지했다.
우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적막.
간간히 차가 오가는 소리 외엔,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이런. 링링답지 않게 오래 걸리는군.'
머릿속이 복잡한가보다.
이럴 땐 도와줘야지.
"그렇다고 막 엄청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그런 부탁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아시죠?"
여인이 픽 웃었다.
굳은 얼굴이 완전히 사라지고, 평소의 링링보단 밝은 기운이 물씬 흘러나온다.
"서후. 이왕 도와줄 거면 귀찮은 것도 감수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설아와 그 아들 작업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어어? 그건 스승님에게 따져야지. 왜 나한테?"
"그건 모르겠고. 앞으로 제 연애를 위해 잔뜩 굴릴 터이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그러고는 성큼성큼 스승의 본가로 걸어간다.
참 조금도 안 진다니깐.
어쩌면 윤새롬보다 더할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 돌아갈 시간.
여우 모녀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서둘러 이동하도록 하자.
***
시동 소리가 울리고.
곧바로 미끄러지듯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자동차.
잠시 그 차를 가만 바라보다 링링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
"아저씨. 그런 건 빨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민아가 입을 내밀고는 부우우. 바람소리를 냈다.
잔뜩 부풀어 오른 볼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잡아보게 된다.
"아앗. 정말...!"
"하핫. 미안미안. 근데 귀여운 걸 어떡하니."
민아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휙 돌렸다.
본인 딴에는 심술 났다 뭐 그런 걸 표현하려 했나 본데, 내가 볼 땐 그저 애교를 피우는 걸로 밖에 안 보였다.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나도 니가 소개해 줄 때는 몰랐어."
"후우.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근데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아는 사람을 이렇게 딱 마주할 수 있지."
민아를 태우고 여우네로 향하는 길.
난 사전에 여우모녀와 입을 맞추어 둔 뒤, 민아에게 설명했다.
실은 두 사람과는 과거 친분이 있던 관계라는 것을 말이다.
저번에 한 번 여우네 있다가 걸릴 뻔 했던 만큼, 언젠가는 길 가다 마주칠 수도 있는 바... 미리 알려두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은주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근데 예림이가 아저씨랑 저를 왜 부른 걸까요? 단순히 식사 초대는 아닌 것 같은데."
촉이 좋다니깐. 여자란 생물은...
이유는 간단하다.
여름휴가 갈 때 민아도 함께 갈 건지 물어보려는 것이다.
민아에게 물어보면서 그 자리서 나에게도 같이 물어봐, 서로 기분이 상하는 일 없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차에서 내리고.
여우네 집에 올라가자, 이미 음식들은 다 시켜 놓았는지 테이블 위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꺅! 민, 어서왕!"
"림, 고마웡!"
초딩 둘이 만나니 그것 참 시끄럽군.
서로 안고 꺅꺅 거리는 두 사람의 뒤편에서 은주와 난 그저 작게 웃었다.
아무튼 음식이 이미 깔린 상태라, 우린 곧바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몇 입 주워 먹으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의 이야기가 오가고, 초딩답게 곧바로 본론.
"민, 있잖아."
"응, 왜?"
"우리 이번에 해외로 놀러가기로 했거든."
"와아. 정말? 어딘데? 응?"
"하와이!"
"앗. 정말 부럽다아... 우리 집은 이번에 어디 안 가는데..."
민아의 얼굴이 급 시무룩해졌다.
친구 녀석이 갑작스런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 모양이다.
여우가 고개를 슥 내민다.
그리곤 마치 영화 속 악당처럼,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목소리를 낮추곤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민아야, 너도 같이 갈래?"
"저, 정말? 그래도 돼?"
"응!"
"꺄악! 고마워 림!"
민아가 폴짝폴짝 뛰며 기뻐한다.
여우 또한 같이 뛴다.
뱅글뱅글 도는 두 사람.
...정신 사납구만.
젊은 게 좋긴 좋다. 힘이 아주 차고 넘쳐서.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때가 됐다 여겼는지 은주가 운을 뗐다.
"그럼 서후씨도 어때요? 이번에 같이 여행가는 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날 바라보는 세 사람.
사전에 이야기가 끝났으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민아로 인해 식탁 위로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과도한 긴장 탓인지 민아의 목울대에서 한 차례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기다리다 못한 아이의 입이 열려, 내 이름을 부를 때쯤...
"아저ㅆ..."
대답해준다.
"오케이! 민아 혼자 가면 심심할 테니 나도 따라가 줘야 하지 않겠어?"
"얏호!!!"
곧바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두 아이는 신나서 소리 지르며 뛰어다녔다.
그러더니 후다닥 뛰어 여우의 방 안으로 사라진다.
"예림아? 밥은 먹고 가야지!"
"나중에~"
"정말이지 언제쯤 철이 들지..."
은주가 참으로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다시 음식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녀.
"예림아! 음식 식으면 어쩔려... 고... 쪽. 쪼옥... 서후씨?"
"가만 놔둬. 우린 우리대로 즐기게."
"정말. 뭐예요~"
엄마 여우가 흘끗 딸 방을 바라보더니 도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난 그 옆에 앉아 아이들이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를 만끽했다.
아담하지만 탄력이 살아있는 젖가슴을 매만지며 입술을 마주 댄 채 혀와 혀를 섞는다.
"쪽. 쪼옥... 하아... 서, 서후씨..."
"왜?"
"우리도 그냥... 쪽. 쪼옥... 식사는 나중에 하고, 방으로 들어갈까요?"
얼씨구. 간밤에 못했다고 키스와 애무만으로도 하고 싶은 마음이 불끈 들었나보다.
나야 이런 제안이라면 언제든 감사지.
그러나 입을 열려는 순간 들려오는 발소리.
약속이라도 한 듯 후다닥 떨어진다. 그리고 재빨리 입 주변을 슥슥.
"엄마!"
"응? 왜, 왜 그러니?"
"나 민아랑 좀 나갔다 올겡!"
"아니, 밥도 안 먹고 어디를..."
그러나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간다.
그런 그녀를 후다닥 뒤따라 나가는 민아.
"죄, 죄송해요, 아줌마! 갔다 와서 먹을게요...!"
쾅. 문이 닫히고, 졸지에 단둘이 남게 된 우리.
은주를 바라본다.
두 손을 고간에 모은 채, 날 흘끗 거리고 있다.
"오늘은 갔다 오면 칭찬해 줘야겠는 걸?"
"그러게 말이에요."
"괜찮지?"
그녀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 귀를 드러내며 묻자, 은주 왈.
"그걸 말이라고...♥ 아예 도어락 건전지를 빼놓을까요? 못 들어오게?"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간다.
손을 움직여 정말로 건전지를 빼고는 내게 윙크하는 그녀.
쿡쿡. 정말이지... 참으로 유쾌한 여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