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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화 〉#054 얘가 왜 여기에...? (55/200)



〈 55화 〉#054 얘가 왜 여기에...?

***


달그락. 달그락.
한 노인과 여인이 고급스런 방에 마주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다.
중간중간. 간간히 대화가 오가기는 했는데, 대체로 노인이 질문을 여인이 대답을 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래. 일은 잘 되어가고 있고?"


노인의 질문에 국물을 입으로 옮기던 여인은 숟가락을 조용히 도로 내려놓았다.
흑진주를 가루 내 만든  같은, 비단 같은 머리칼이 한 차례 흔들거린다.


KUC 푸드의 대표 강설아.
눈앞에 자리한 노인인 강회장을 제외하면 사실상 KUC의 실세  한 사람.
그녀는 꽃이었다.
꽃 중에서도 꽃인 백합.
 백합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히아신스.


수많은 꽃말을 가진 꽃의 주인답게 그녀는 다양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권력이면 권력.
능력이면 능력.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완벽한 여인.


심지어 외모까지도 꽃처럼 아름다웠으나 묘하게도 그녀는 전혀 웃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맺힌다면 뭇 여러 남자들을 울렸으리라 하고 회장은 조용히 생각했다.
자신의 딸이지만 나이가 불혹이 넘은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그래서 매우 안타까웠다.


"네."

"흠... 그나저나 이만 재혼을 해 보는 게 어떠냐? 네 정도의 능력이라면, 괜찮은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진 않을 텐데."


여인은 조용히 말을 아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 한다면  누가 회장 자릴 넘보겠느냔 말이다."

역시...
그러실 것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회사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옛날 중세 시대에서나 일어날 법한... 자식마저 권력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는 그런 인물.
물론, 그렇다고 자식 사랑이 없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지만.


"혹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있느냐?"

KUC 푸드의 대표 강설아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도자기로 만든 잔.
 안에 든 액체 위로, 아름답지만 차갑게 굳은 여인의 얼굴이 잔잔히 비친다.
그리곤 조용히 떠오르는 한 남자.

"...글쎄요."


"음?"

예전 같았으면 곧바로 '아니요. 없습니다.' 가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대답이 변했다?
그 작은 변화에 노인은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딸아이 혼자 사는 게 너무도 외로워 보여 보기 안쓰러웠는데... 잘 되었구먼.'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건 여느 아비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회사에 미친놈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일 뿐이었다.


열심히 하는 자식에게 더욱 챙겨주고.
돈만 펑펑 쓰고 가족에게 피해를 줄 법한 놈들은 정신 차리도록 밑바닥으로 보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그를 돈밖에 모르는, 자기 자식도 내치는 냉혈한으로 몰아갔다.


'뭐 어떻게 보든 상관이야 없지만.'


그런 그의 목표는 하나 뿐.
회사가 크고 올바르게 성장해 직원들은 돈 잘 벌어가고.
내 새끼들 또한  안에서 인간답게, 성실히 행복하게 살면... 그래,  뿐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딸아이와  되었음 좋겠구먼.
노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리었다.


***




설아와 점심 먹는  파토 났고.
아까 그 아들 녀석이 한 번 왔다갔다는 소리를 들은 만큼, 난 곧바로 은주네로 운전머리를 향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가해자의 재등장으로 심히 놀랐을 두 여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에 주차장에 차를 바치고 아파트에 들어서는데...
음? 익숙한 얼굴이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누군가 하고 보니, 그 어렵다는 단발을 아주 멋지게 소화한 내 네 번째  윤새롬이었다.


"어? 어쩐 일이야?"

"서후? 아, 연락했길래 후다닥 와봤지. 누가 부탁한 일인데 대충 하겠어?"


그렇군.
아무래도 예림이가 걱정이 돼 얘한테도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제법 둘과 친해진 건가?
그녀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더니 내 상체를 검지로 콕콕 찌르며 말했다.

"근데, 이야...  이 자식.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천하의 개잡놈 서후가 여자가 걱정이 돼서 이렇게 왔다 갔다 할 줄이야!"

...틀린 말도 아니라 할 말이 없군.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자, 그녀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간만에 날 괴롭힐 구실을 찾았다는 듯 잔뜩 신이 나 열을 올린다.

"야.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대체 어디가 좋은데, 너 같은 카사노바가 매일 같이 드나드는데?"

좋은 점이라... 많다.
일단 얼굴이 여우 같이 예쁘고, 하는 짓도 귀엽다.
 나랑도 잘 맞고.
무엇보다 제일 좋은 건 꽉꽉 물어재끼는 보지려나...?


그러나 그런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하기엔 아무리 나라도 눈치가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여자 앞에선  조심 또  조심이다.
두고두고 놀려댈 게 뻔하니.


"뭐 그런 거 아냐.  그대로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다."

"그런 거 아니긴? 어이, 서후씨? 입에 침은 닦고 말을 하시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날 속이려 들면 안 되지. 안 그래?"


주구장창 옳은 소리만 하니 할 말이 없네.
그러나 이대로 당하고만 있기엔 남자로서의 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럴 때 쓰는 방법이 하나 있지.
진실만을 교묘하게 섞어 이야기하기.

"진짜야. 내 여자니까 신경을 쓰는 거야."

"흐응~"


"만약... 그런 일을 당한 게 너였다 해도, 난 매일 같이 널 찾아갔을 거야. 복수 또한 했을 거고."

그제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여인의 행동이 멈추었다.
장난 가득한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한... 아니 조금은 씁쓸한 표정이 얼굴 위로 올라온다.
그리곤 문득 귓가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중얼거림.

"그 여자가 부럽네..."

"뭐?"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날 지나쳐 아파트 밖으로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 좋은 향기가 날아와 코끝을 간질인다.


말괄량이 검사 윤새롬.
 어떻게 생각하는  알지만 그녀와 나의 선은  정도가 적당하다.
가끔 필요할  외로울 때, 서로 돕는 정도가...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지?"

"됐어.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알아?"


"그럼 오늘 밤에..."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뒤 돌지 않은 채 그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아주 쿨하게.

"됐어. 피해자 좀 진정되면 그 때 보자."

"...그래. 차 조심히 몰고 가."

"오냐."


그리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끙. 아까 마지막에 본 표정이 영 신경이 쓰여 안 되겠다.
눈앞으로 자꾸만 그녀의 섭섭해 하는 얼굴이 떠오른다.

하아... 윤새롬 녀석. 그것 참 애도 아니고...
몸을 다시 돌린다.
그리곤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크게 불러 세운다.

"윤!! 잠깐 일로  봐! 그러고 보니 건네줄 게 있어!"

 외침에 여인이 양 손을 허리에 대곤  노려보았다.

"그런 건 빨리 말하라고오!!"

한숨을 푹 쉬고는 내게 다시 돌아오는 그녀.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내 앞에 선 그녀에게 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곤 그대로 껴안고 키스.

"으읍. 너, 너어...! 이 발정난 개새..."

그러나 내 표정이 꽤나 진지한  보고는 뒷말을 아낀다.
나는 그런 그녀를 꼬옥 품 안으로 끌어 당겨, 입술로 입을 물었다 놓길 반복했다.

입가로 말랑말랑하지만 한편으론 거친 감촉이 느껴진다.
한 나라의 검사답게 열일 하느라 입술이 상시 터 있는 까닭이다.
그래도  거친 입술조차도 그녀의 매력을 다 감출 순 없었다.
아니, 오히려 메마른 사막에 핀 선인장의 꽃처럼  없이 향기롭고 달콤한 맛이 났다.

쪽. 쪼옥...

내 뒷머리에 손을 올리고 응해오는 여인.
그렇게 우린 한참 동안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그녀의 마른 입술이 완전히 축축해져 입술 주위로 넘쳐흐를 때쯤, 고개를 젖혀 살짝 떨어진다.
몽롱한... 아니 황홀함에 듬뿍 취한 여인이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미안. 너도 더 신경 써줬어야 했는데..."


여인 웃음.
평소 짓는 개구쟁이 웃음이 아닌,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이 환하게 빛을 발한다.


"됐어. 이거면 충분해."

"그럼 오늘 밤 시간 돼?"

내 질문에 여인이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내 생긋 웃으며 거절한다.


"나도 정말 하고 싶지만... 너 요새 매일 밤 여기서 잔다며? 안정될 때까진  생각 하지 마."

"괜찮겠어?"

"그럼. 내가 누구야? 대한민국의 윤 검사 아니냐?"


쿡쿡쿡. 정말 좋은 여자라니깐.
본인 생각만 해도 부족할 텐데 다른 사람까지 생각해 주다니.
종종 이런  볼 때면 검사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가졌어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특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 손을 머리로 올리려다, 이내 내려 등을 쓰다듬어 준다.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는 건 오로지 관계 할 때만 가능하므로.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그렇게 새롬이를 보내고.
은주네 집에 도착하자 여우 모녀가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똑같은, 그러나 성숙의 차이만 나는 도플갱어와 같은  여인이 내게 안겨온다.


"아저씨, 왔어요?"

"서후씨, 오셨어요?"

어쩜 둘이 하는 말까지도 비슷하냐.
둘을 데려다 좀만 꾸며놓으면 쌍둥이로 둔갑 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응. 점심은?"


"이제 먹으려고요. 아저씨도 같이 먹어용!"


"그래."

식탁에 앉아, 웃으며 음식을 준비하는 두 모녀를 본다.
화목하니 보기에 너무 좋다.

은주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설아의 망나니 아들로 인해 좋아진 점이 있었다.
사실 쓰리썸 이후로 여우 두 모녀간에는 서로 약간의 불편한 기류가 있었는데, 녀석이 그걸 해결해 준 것이다.

외부로부터 찾아온 위기는 두 여인을 한데 뭉치게 해 주었고, 서로를 견제가 아닌 소중하고 믿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생 모녀덮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리라.


로또 돼서 돈 걱정도 없겠다,  명당 두 명씩만 낳게 해야지.
그렇게 음흉한 계획을 세우며 식사를 한 뒤, 여우와 함께 방에서 뒹구는데...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


"누구세요?"


은주의 목소리가 들리고.


"안녕하세요, 아줌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이 목소리는?!
서로를 돌아보는 나와 여우.


"민아?!!"

아, 안 돼!
여우가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민아네에서 살다 온 만큼, 이곳에 있는  좋게 보일 리 없단 걸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엄마 여우가 알 리 없었다.

후다닥 뛰어 문가까지 도달하나, 한 발 늦은 모양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 어떡해요, 아저씨?"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제부터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나도 이리 갑작스레 민아가 찾아온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심지어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활짝 열릴 거라고도.


"안녕하세요, 아줌마! 혹시 예림이 집에 있나요?"

방밖에서 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좌우 빠르게 고갤 움직이며 눈을 굴리는 여우.
이내 내 손을 잡아끌더니, 아파트에 딸려 만들어진 옷장 속으로 날 숨겼다.

"잠깐만 여기 숨어 계세요! 제가 금방 해결 할게요!!"


그리곤 곧바로 닫히는 문.
어둠이 나지막이 사방을 에워싼다.
고개를 들었다.
옷장  위아래 가운데로 옅은 빛이 들어와, 그나마 어두컴컴한 공간을 조금이나마 밝혀준다.

티디디딕.


빠르게 무언가를 두드리고 소리가 나고.
조금 있으니 문이 벌컥 열린다.
 직후 울리는 진동.
누구 건가 하고 보니 엄마 여우 거다.
아무래도 상황 설명을 짧게나마 문자로 보낸 듯했다.

여우가 다른  몰라도 순발력이나 행동력 하나만큼은 일품이지.
그 덕에 '왜 아저씨는  보이니?'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옷장 밖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림! 뭐해?"

"응? 아... 잠시 급하게 연락  하느라..."

"그래? 아무튼 요새 섭섭해. 나한테 연락도   하고..."

풀썩.  차례 침대에서 소음이 인다.
곧이어 같은 소음이 다시 이는 게 두 사람 다 침대 위에 앉은 듯했다.
민아의 말에 여우는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미안... 우리 집 요새 힘든 일이 있었거든."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아무 말 하지 못한다.
어찌 말을 할 수 있을까.
엄마가 몹쓸 짓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무리 친하다 한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반응을 민아는 이해하는 듯했다.


"나한테도 말 못 해주는 걸 보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미안..."


"괜찮아. 그럼 일은 다 해결 된 거야?"


여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로인해 아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니, 아직..."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우 모녀에게 어느 정도 경과를 알려주던지 혹은 무언가 성과를 보여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런 것도 없이 상처를 감내하기엔, 그 정도가 꽤 심해보였기 때문이다.


그 심각성을 민아 또한 느낀 것인지, 두 사람 사이엔 돌연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조금 있으니 반짝. 제안을 한다.


"음... 그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불러줄까?"


"누군데?"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 여우의 질문에, 민아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라는 듯.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우리 아저씨! 저번에 몇 번 봤지? 정말 좋은 분이셔서, 이야기 한다면 지금 당장 도와주러 달려와 주실 거야!"

그러더니 티디딕 버튼음이 들린다.
설마...?
지금 나한테 연락하려고 누르는 소린 아니겠지?
그러나 여우의 당황 어린 질문이 내 불안을 더욱 증폭시켰다.

"지, 지금 바로 연락하려고?"


그러자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


"응!"

젠장. 좆됐다...
지금  핸드폰은 여우 모녀로 인해 진동모드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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