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039 민아의 고민
정사가 끝난 후 창고에서 같이 나왔을 때, 나와 은주는 세 알바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좀 티가 많이 낫지 않은가?
다행이도 소리까진 안 들린 모양인데... 아무튼 스킨십 정도는 하지 않았나 추측 받고 있었다.
아무튼 주인장도 깨웠겠다, 이만 떠날 시간.
"그럼 나중에 봐."
"잘 가요. 쪽."
숨기는 걸 포기했는지 아니면 자기 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은주가 내게 작별 인사를 하며 가볍게 뽀뽀를 해왔다.
그 일로 인해 세 알바가 꺅꺅 비명을 지르는 건 당연한 현상.
'나중에 여우가 알면 기절초풍하겠군.'
부디 그 아이 귀에 들어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차를 끌고 갈까 하다 그냥 찬찬히 발걸음을 옮겼다.
은주네 커피숍은 흥미롭게도 그녀의 집과 친구 녀석의 집 사이 쯤 있었기에, 걸어서 10-15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그건 그렇고 민아가 한 소리 할지도 모르겠네.
이제야 전날 밤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친구 놈을 떠맡긴 뒤 나 혼자 후다닥 도망쳐 나온 일이.
'맛난 거라도 사가야겠어.'
그런 조금 조금이 모여 서운한 감정이 되고, 이후 여자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곤 한다.
그러니 언제든 관리는 필수다.
무얼 사갈까 하다가, 중간에 한 가게에 들러 마카롱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왠지 이게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렇게 집안으로 들어섰는데...
뭘까. 뭔가 조용하다.
'음. 딱히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80% 확률로 뛰쳐나올 줄 알았는데... 아직 자고 있는 건가?'
의문을 가지고 들어서서 일단 친구 방문을 연다.
없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신발도 안 보였지.
아무래도 밖에 나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민아의 방문을 연다.
있다. 그런데? 상태가 좀 이상하다.
"아, 아저씨? 왔어요?"
"어... 이거 선물. 받아."
"고마워요. 헷."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내가 주는 마카롱을 꼬옥 안는 아이.
눈에 피곤이 가득하고 머리가 좀 푸석푸석하다.
뭐지. 설마 밤새 시달린 건가?
"어제 아빠가 밤새 괴롭히든?"
"에? 아, 아니에요. 쿡쿡."
음.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네.
난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 날이구나?"
"넵. 오늘 아침에 터졌어요."
여인들은 피할 수 없는 그것, 생리.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보통 첫날 혹은 둘째 날이 많이 힘들다.
민아의 경우엔 첫날인가?
"약은?"
"다 떨어져서 아직..."
"그래? 잠시만."
난 외투 주머니에서 약 하나를 꺼냈다.
두통약으로 가끔 눈을 많이 써 피로하거나 수면이 부족해 그것이 두통까지 올라올 때면 먹는 약이었다.
그리고 이 약의 기능엔 생리통 또한 들어있다.
"헷. 고마워요, 아저씨!"
"뭘. 물 가져다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온수와 냉수를 적절히 섞어, 미온수를 만들어 가져다준다.
민아가 방긋 웃으며 그걸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런. 빈속에 먹음 안 좋은데.
"좀만 기다려. 죽 하나 사올게."
괜찮다는 아이를 놔둔 채 빠르게 마트에 들러 죽 하나를 사온다.
사실 직접 만들거나 가게에서 만든 걸 사다주고 싶었지만, 이미 약을 먹었으니 늦지 않게 뱃속을 채우는 게 중요했다.
시간이 지체되면 속 꽤나 쓰릴 것이기에.
그건 그렇고, 이번 달 민아는 임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군.
지금 나온 피가 생리혈인지 착상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민아랑 내가 관계를 가진 게 이제 일주일 정도 되었으니, 가임기 기간은 얼추 피했을 거란 것.
뭐 잘된 거지.
나로선 임신 전의 아가씨가 가지는 쫄깃한 보지 맛을 한 달간 더 즐길 수 있으니까.
"먹고 더 쉬어. 이따 깨워줄게."
죽을 한 입 입에 쏙 넣고는 날 흘끗거리는 민아.
뭔지는 몰라도 할 말이 있는 듯 보인다.
그에 어서 말해보라며 방긋 웃어주자, 먹던 걸 내려놓고 조심스레 말한다.
"저어... 아저씨랑 같이 자도 되요?"
"음? 뭐 그건 상관없긴 하다만. 아빠도 아직 있잖니?"
그랬다.
야영할 때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멀쩡히 각 방과 침대가 따로 있는데 굳이 붙어서 함께 잔다?
아무리 둔감한 친구라도 이상하게 볼 게 뻔했다.
그러나 우리 민아.
손을 꼼지락대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두우... 아저씨랑 자면 몸 아픈 것도 잊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날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아이.
동그랗고 귀여운 눈에서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며 날아와 내 안면을 강타한다.
윽... 잠깐. 이건 반칙이잖아!
내 이성아 정신을 좀 차렷...!!!
그러나 이미 글렀다.
민아의 필살기를 맞은 내 이성은, 한 여름 뙤약볕 아래 놓인 초콜릿마냥 어느새 흐물흐물 녹아 그 의지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그래..."
"얏호!!!"
아이가 신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정말 아픈 거 맞아...?
아니, 어쩌면 고도의 술수에 내가 걸려든 걸지도. 끙.
그렇게 밥을 다 먹고 이까지 닦은 뒤,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처럼 쪼르르 따라오는 아이를 보며 난 한숨과 함께 침대 이불을 들어올렸다.
'그냥 자는 걸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 사이로 쏙 들어가며 헤헤 웃는 민아를 보자, 왠지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어서 그런가, 뭔가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조금 불안하지만 나 또한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잠을 자긴 해야 하는군.'
두 마리 여우와 신나게 정사를 치르느라 수면이 부족하긴 했다.
이불과 함께 고요히 내려앉은 적막.
꼬무락꼬무락 이불 아래에서 민아가 움직여 내 품안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이불 밖으로 고개만 쏙 내민다.
해맑고 귀여운 아이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매단 채.
"아저씨."
"응?"
"아저씨 저 정말 사랑해요?"
당연한 대답을 바라는군.
"그래."
손을 천천히 움직여, 머리를 아주 느리게 그리고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다.
그게 기분이 좋은지 아이가 볼을 내 상체에 비비었다.
때로는 키스보단 이렇게 머리를 만져주는 게 좋다.
여자에게 머리란 심리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바, 막말로 엔간히 마음을 주지 않는 한 남자가 머리를 마음대로 손대는 걸 허락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머리를 쓰다듬어 줌으로써 남자는 무한한 신뢰를, 여자는 마음에 평안과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굳이 말로 주절주절 떠들 필요도 없는 이 매우 간단한 행동으로 말이다.
아이가 다시 고갤 든다.
크고 동그란 눈이 밑에서 날 올려다본다.
"아저씨."
"듣고 있으니 말하렴."
"저 고민이 있어요..."
고민?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뭇 진지해지는 민아의 얼굴에 나 또한 표정을 굳히며 조용히 경청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나직이 내뱉는다.
그런데 그 고민이라는 것이...
"저 아저씨랑 결혼하고 싶은데... 왠지 그 사실을 말하면 아빠가 슬퍼할 것 같아."
쿨럭. 고민이라는 게 그거였어?
뭐 슬슬 나올 수도 있긴 한 주제였지만, 진심 너무 빨랐다.
이제 겨우 일주일 됐는데 벌써...?
보통 여자는 마음이 달아오르는데 한 달 이상은 걸린다.
짧은 순간에 빠르게 치솟는 남자와는 상당히 다른, 완만한 호감 곡선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언제나 있다.
'그러나 그 예외란 것이 대부분 며칠을 못 가고 꺼져버린다는 게 문제지.'
말 그대로 짧게 불타고 끝.
민아도 그런 타입인 건가?
아직은 모를 일이다.
조금 더 지켜보면 알 게 되겠지만.
그건 그렇고, 아빠한테 말할까 말까 고민 중이라...
말하기 전 내게 물어본 게 천만 다행이다.
덕분에 막아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물론, 응원도 해 줄 것 같긴 해요."
아니. 전혀 아닌데.
어느 누가 자기 딸이 스무 살 넘게 차이나는 남자와 결혼하길 바라겠는가.
돌연 친구 놈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본인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공감 잘 못한다 했었지.
민아가 굳은 얼굴을 풀고 다시 방긋 웃었다.
해맑은 미소에 무거운 분위기가 빠르게 사그라든다.
“그래서 고민 중이에요!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래. 그게 좋겠다.
난 생각을 정리한 뒤,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엄마가 사라진 뒤로, 아빠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지?”
“네.”
내 첫사랑을 닮은 아이.
이 아이를 보노라면, 친구 녀석과 결혼했던... 이제는 저 멀리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그 녀석이 떠오른다.
아마 친구 놈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지.
“그런데 너까지 떠난다면 어떡하겠니.”
곰곰이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결혼하고 아저씨랑 나랑 아빠랑, 이렇게 다 같이 살면 되지 않아요?”
...진심으로 하는 소린 아니겠지?
그러나 눈빛은 상당히 진지하다.
일단 설명을 구체적으로 좀 해줘야겠군.
"아빠들은... 딸이 결혼하면 뺏긴다 생각한단다."
"에엑?"
민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말도 안 된다는 듯.
거짓말 하지 말라며.
"끙. 그런 눈 하지 마렴. 사실이니까."
"그렇...구나."
"그러니 벌써부터 결혼한다고 말하면... 꽤나 충격이 클 거다. 지금보다 더 술 많이 마실 지도 몰라."
"그러면 안 되는데..."
민아의 얼굴에 고민이 크게 어렸다.
제 아무리 자기 생각만 한다고 해도, 무려 자기 부모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안 남은 유일한 가족이고.
아마 쉽게 버리진 못할 테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걸까.
굳어 있던 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음... 그럼 언제쯤 이야기 하는 게 나을까요?"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평균 결혼 연령을 한 번 확인해 보렴. 아빠는 엄마가 없어 외로우니까, 그보다 조금 더 늦게 하면 될 거란다."
민아가 스마트폰을 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화면을 쏙 들여다보더니, 크게 실망.
"히잉. 그러기엔 너무 늦어요!!"
"몇이라는데?"
"서른이요. 앞으로 9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니!"
그건 정말 싫다는 듯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그런 아이를 살살 달래며 말한다.
"천천히 하면 되지. 왜? 그 9년 동안 아저씨 사랑하는 마음 변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러자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는 아이.
"전 안 그래요! 대신 아저씨가 걱정 되서 그렇죠!"
뜨끔.
찔리는 게 있는 터라 할 말이 없네.
민아가 눈으로 날 흘기며 말을 잇는다.
"솔직히 아저씨는 믿긴 하는데, 주변에서 아저씨를 가만 안 둘 것 같아요. 요새 여시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시라니... 쿡쿡.
귀여운 아가씨가 나이든 사람이나 쓸 말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뭐 그래도 이제 해결은 된 듯하다.
입술로 입에 쪽 키스를 해주며 한 마디 해 주자.
수많은 남자들이 여인들을 속였던 그 대사로!
"그 때까지 장가 안 가고 기다리고 있으마. 아저씨 믿지?"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