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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031 링링의 경고 (32/200)



〈 32화 〉#031 링링의 경고

다음날 아침.
젖은 매트릭스는 내가 물을 마시다 흘린 것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친구 녀석은 아직 숙취가 있던 탓인지 크게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다.


시원한 아침 공기가 햇빛아래 스르륵 사라지고, 해가 하늘 높이 뜰 때쯤 우리는 텐트를 정리했다.

"이제 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었단다."

다혜가 주위를 슥슥 돌아보더니, 내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뭔가 하고 보니, 오밀조밀한 글씨로 연락처가 깨알같이 적혀있다.
당시엔 준다고 하긴 했지만, 정신 차린 이후론 생각이 바뀔 수 있기에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내 좆맛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 연락 기다릴게요."

"그래."


오래 붙어 있어본들 민아의 오해만 살  있으니, 빠르게 다시 떨어진다.
민아와 친구 녀석이 차에 오르고,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까딱 고갤 숙여 인사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인물.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사람.


그와의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없지만... 조만간 또 봅시다, 영감.
내 이번엔 링링을 한  노려볼 테니.


"그럼 가겠습니다, 어르신."


"조심히 들어가게."

그렇게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차로 다가가는데, 돌연 링링이 내게 다가와 과일 상자를 건네주었다.
뜬금없이 웬 과일상자?
그러나 이건 그저 하나의 수단이었던 모양이다.
 귀에만 들릴 듯 작게 속삭인다.

"서후. 민아양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내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이자, 그녀가 과일 상자를 열어 사과 하나하나를 들어 보이며 찬찬히 말을 이었다.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쩌면 서후... 신변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모릅니다."

링링. 홍콩에서 넘어온 초 엘리트.
난 지금껏 그녀가 허투루 경고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랬기에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믿고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믿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왜 내게 이런 조언을 갑작스레 하게 된 걸까.


간밤에 단둘이 이야기 나누며 무언가를 깨달은 건가?
모를 일이다.
시간 여유라도 있으면 모를까, 지금도 적은 시간을 최대한 느긋하게 연기하며 의심을 최소화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추측은 내가 해야 한다.
뭘까. 민아를 조심해야  이유.
그런데 그 순간 떠오른 기억.

- 다른 사람의 행동과 의도를 인지는 하는데, 자기 밖에 몰라.

간밤에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


"민아가 정신질환이 있다고 합니다."


"정신질환..."

"저 대신 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인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과일 상자를 탁 닫으며 말한다.


"......그런  알아서 하시지요."


 예상은 했다.
지금 그녀는 스승 뒷바라지 하는 일만으로도 정신없을 테니.
나라는 인간은 그저 스승의 관심 탓에 따라오는 부속물 정도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내게 경고를 했다는 건, 자칫 그게 나를 넘어 스승에게까지 해를 미칠 수준이라는 것.
생각이... 복잡해지는군.

"그럼 가보겠습니다."

운전석에 자리했다.
친구 녀석이 아직 숙취에 시달리는 터라, 집까지의 운전은 내 몫이다.
차문을 열자 보조석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민아가 보인다.


"앗. 아저씨 그건 뭐에요?"

"아, 어제 이곳에서  과일인데 이거 두 박스는 우리 거라네?"

"와아! 맛있겠다!!"


어린애마냥 방방 뛰며 좋아하는 모습에, 나 또한 괜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나 백미러를 통해 링링을 보자, 아까 들은 말이 떠올라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민아를 조심해라라...'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좀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여행이 끝나고 복귀한 우리는 제각기 방으로 돌아가 깊은 수면을 취했다.
친구 녀석은 아직 덜 회복된 숙취로, 나와 민아는 밤새 격렬한 정사를 나눈 탓으로 꽤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체력 소비가 제일 적었던 것인지, 친구 놈이 제일 먼저 일어나 식사를 준비해 우릴 깨웠다.


"어여들 나오라고. 다들 일어나서 내가 준비한 찌개 맛 좀 봐봐!"


간만에 하루 종일 허릴 흔들어서 그런가.
 피곤하군.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뻐근하다.
그래도 코끝을 자극하는 김치의 냄새에, 찌개 한 숟갈 크게 퍼 입으로 찬찬히 가져왔다.
음... 옛날에 비해 실력이 엄청 늘었군.

"그래서 넌 이제 뭐하려고?"


친구 놈의 질문에 난 잠시 대답을 주저 했다.
딱히 크게 계획은 없었던 것.

그러고 보니, 녀석  때까지만 잠시  집에 있기로 했었지.
음... 이미 민아는 정복할 만큼 했기에, 밖으로 불러내는  어렵지 않고.
 할까나.

내가 고민에 잠긴  쉽사리 대답을 하질 못하자, 녀석이 내게 윙크하며 말했다.


"그럼 우리 회사에 오는 건 어때? 내가 한 번  말해볼게!"


"아서라."

내가 니 회사엔  가냐.
돈은 이미 더럽게 많은데.
이유도 없이  밑에 들어가 일 할 이유가 내겐 전혀 없다.
그럼... 음. 일단 거기를 한 번 갔다 올까?


"시간 봐서 잠깐 남쪽으로 내려갔다 오려고."

"남쪽? 아, 이참에 전국 투어라도 돌게?"

친구 녀석의 추측에 민아의 눈이 반짝였다.
나와 단둘이 있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듯했다.
흘끗흘끗 나와 친구 놈을 쳐다보더니, 살짝 운을 떠본다.


"와아... 부럽다.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그러고 다시 친구 녀석을 슬쩍 바라보는 아이.
그러나 어림도 없지.

"안 돼. 민아, 너 공부해야지!"

"힝... 한  정도만 더 쉬면 안 되남..."


쿡쿡. 숟가락을 입에 물고는 한 소리 들은 강아지마냥  쳐진 모습이라니. 정말 귀엽다니깐.
내 입장에서는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혼자 가는 게 낫겠지.


"거창하게 갔다  건 아니고, 만날 사람이 있어서."

"누구? 여자야?"


섬뜩.


'음?! 뭐지? 방금 순간 섬뜩함이 느껴졌는데...?'

친구 녀석은 나와 마주보고 대화중이니 당연히 아닐 테고.
그에 반찬을 가지러 가는 척 하며 민아의 얼굴을 슬쩍 살펴보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아이였나?
그러나 나와 시선이 마주칠 즈음 그걸 싹 숨겨 감춘다.

'일단은 못 본 척 해야겠군.'

아무래도 좀 떠 보며 관찰을 해봐야 할  같다.
왠지 링링의 조언이 자꾸만 거슬린다.


"뭐 여자는 맞긴 한데...."

그러면서 다시 슬쩍 확인.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흠. 이 정도면 어느 수준일까.
일반인이 보이는 질투? 아니면 집착녀가 가질 수 있는 광기?
제대로 마주치질 못해 확신은 할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민아가 지금 질투를 하고 있다는 것.

하긴. 이 아이도 여자인데, 질투심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만.
일단 한 가지 사실을 확인 했으니, 이쯤에서 사태를 빠르게 수습한다.


"내 향수 알지? 그거 수제거든. 그거 만든 사람이라, 이렇게 한 번씩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거야."


"아하. 그거 참 향기 좋던데. 내 것도 괜찮은 거로 하나 구해줘!"

"거기 주문 제작이야. 미리 말해 놓고 3개월 있다 찾으러 가는 거거든. 그래도 할래?"


"허... 그것  까다롭구나."


친구가 고갤 저었다.
 굳이 예약 안 해도 되는 물건들도 있긴 하지만, 자칫  꼬리가 잡힐 만한 건수는 만들지 않는 게 좋겠지.
나와 관련된 인물들은 철저히 숨기는 게 좋다.
특히나, 지금은 민아를 사냥하는 시기인 만큼 더욱 더.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치우다 말고 냉장고 문을 열며 내게 묻는 녀석.

"오늘도 한  콜?"


"안 해!!"

  나올 만하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와, 정처없이 걸음을 옮겼다.
민아 또한 나를 따라오고 싶어 했으나,  아빠 눈치 보느라 결국 나만 나오게 됐다.
그에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한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모처럼 혼자가 됐으니 이 기회를 적극 이용해야하지 않겠는가.


나 : 지금 볼  있어?
여우 : 지금 엄마도 집에 계세요. ㅠㅠ (아쉬움 가득 이모티콘)
나 : 그래? 그럼 아쉽지만 다음에 봐야겠네.

음. 여우는 안 될 것 같고...
그럼 간만에 다시 정아나 보러 갈까.
그에 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여우 : 엄마에게 아저씨 이야기했는데  보고 싶으시데요!


이런... 기억이 돌아온 시점에, 언제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예상하긴 했으나.
그게 오늘이라니.
난 잠깐 고민한 뒤, 답장을 주었다.


 : 그래. 집으로 가마.


찬찬히 걸음을 옮기며, 먼 과거의 기억을 애써 떠올려 본다.
여우네 엄마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여우만큼이나 예쁜 미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뭐 그 예쁜 얼굴이 나올 정도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래도 고생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지.'


 뻔한 이야기다.
얼굴 예쁜 애는 발랑 까지기 마련이고, 응당 학교 시절 주먹 꽤나 쓰는 남자 만나 일찍 결혼했을 것이다.


뭐 남자는 무능해서 어찌어찌 하다 도박 빚 진 거고.
발랑 까졌다 해도 나와 같은 옛날 사람인 그녀는 몸 파는 짓은 차마 못했을 테니, 빚이 계속 불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


'아마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끝났을 거야.'

가정이 파괴되는 건 당연한 거고.
딸은 딸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세상에 시달리다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니 보고 싶을 것이다. 나를.
자신들을 지옥에서 구원해 준 나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다.

'뭐 내 본 모습을 보면 기절초풍할 테지만.'

악마도 나 같은 악마가 없으니까.
아무튼, 어느새 도착한 것인지 낯익은 대문의 모습이 눈에 들왔다.
연락을 넣자 도어락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너머로 나타난 한 여인.


여우가 마중 나올 줄 알았더니.
여우보다도 성숙하고, 그러면서도 정숙한 한 여인이 날 맞이한다.
얼굴 가득 기쁨과 반가움을 내비치며.

"오...랜만이네요, 서후씨."


"오랜만입니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상대는 날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 못한다는 사실에, 살짝은 미안한 감정을 드러냈다.
작게 웃으며 말하는 여인.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종이에 적었거든요. 정말이지... 고맙습니다."

그리곤 환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운다.

저 눈물의 의미는 뭘까.
문득 여인의 모습을 보니, 차려 입는 것에 꽤나 신경을 썼다는 걸 볼 수 있었다.
당신이 도와준 여인이 이렇게 잘 살아있습니다 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없다.
애초에 남을 도와준 것도 당시 그 일이 처음이자 끝이었기에.


"아이 참. 엄마, 뭐해요? 아저씨 어서 들어와요!"

여인이 말을 못하고 울기만 하자, 뒤에 있던 여우가 그녀를 안으로 들이며 내게 손짓했다.
눈 위로 물이 떨어질듯 말듯 한 게, 여우 또한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 듯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여우의 손에 이끌려 찬찬히 안으로 들어선다.
앞장서 거실로 걸어가는 여인의 아름다운 뒷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잘록한 허리와 그 아래 불룩 튀어나온 큼지막한 엉덩이.


아까 보니까 가슴은 작았지.
그래도 애는 낳았다고 엉덩이는 큰 모양이다.
여우와 상당히 유사한 몸매. 판박이와 같은 얼굴.
그렇다면...

'구멍도 좁으려나?'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드는  왠지 미안하지만, 아... 진심 개꼴린다.
저 위에 올라타 맘껏 흔들어보고 싶다.


'한 번 기회를 만들어보자.'

잘하면 여우 모녀를 둘 다 임신시킬  있을 지도 모른다.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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