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026 민아가 아프다고...?
텐트 설치도 다 끝나고.
간단히 점심을 먹으면서 스승 일행과 우린 대강의 통성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요새 뜨고 있는, 그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유나양이라 이 말씀이죠?"
"네. 유나라고 부르면 좀 그러니 본명인 다혜라고 불러주세요!"
분홍머리를 하고 다니는 게 보통은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쪽이었던 건가?
하긴. 잘 보면 충분히 상품성은 있어 보였다.
피부도 하얗고 가슴도 큰 것이 나름 경쟁력도 있고.
그런데 대체 이런 어린 아이돌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혹시나 하여 나이를 물어보니 올해 스무 살이란다.
'데뷔가 조금 늦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무튼 링링의 반응을 자세히 살펴보니, 다혜 그녀가 이번 스승의 사냥감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다혜가 웃으며 스승에게 청포도 하나를 건네고, 스승은 웃으며 손으로 받아 입에 넣는다.
그런 행동을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링링.
딱히 표정에 큰 변화가 없어 친구 녀석이나 민아나 별다른 위화감을 못 느끼고 있으나, 내 눈은 못 속이지.
아주 속에서 불이 일고 있구만.
'참 대단해. 저 양반도...'
그 옛날부터 봐오긴 했지만, 진짜 조금도 변함없는 게 참으로 대단하다.
그건 그렇고, 나도 여우를 길들이면 저렇게 온순하게 변하는 건가.
쫌 기대된다. 아니 많이.
아무튼.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친구 녀석이 정리를 하며 스승에게 물었다.
"어르신도 낚시 하시렵니까?"
고개를 선선히 젓는 스승.
"아니네. 난 괜찮네. 그저 바람을 쐬러 온 것일세."
정확히 말하면 사냥감을 길들일 겸 바람 쐬러 나온 거겠지만.
어쩌면 오늘 밤 나에게 부탁을 하러 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산과 물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손전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온통 칠흑이 자리할 시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연 링링이 내게 다가온 것.
나만 혼자 있는 걸 확인하고는 자연스레 접근하더니 말한다.
"서후.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표정 변화 없는 서늘한 얼굴이 날 바라본다.
자신의 감정을 늘 그렇듯 숨기는 여인.
그러나 여성의 심리와 행동거지에 도가 튼 내 눈엔 보였다. 하루 종일 기분 나쁜 티를 내더니, 지금은 좀 풀어진 것이...
왜 기분이 좀 좋아진 거지?
그런 내 의문은 곧바로 해결이 되었으니.
"주인님께서 서후가 좀 도와줬으면 한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역시나인가...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애초에 이곳에 사람이라곤 우리 일행뿐이었으니.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던 거로구만.
스승이 도와달란 의미. 단순했다.
아까 보았던 분홍머리 다혜였나? 그 년을 좀 따먹어달란 뜻이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내가 스승을 만난 후로 다른 사람 것을 뺏어먹는 삶을 배우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스승의 모든 걸 받아들인 건 아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난 내가 따먹은 여인들을 내가 실컷 즐기다 버리고 말지만, 스승은 다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다른 모든 기술이나 기교, 전개는 다 배워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안 되었기에, 난 과감히 그것을 버렸다.
스승은 그것을 너무도 아쉬워했지만, 뭐 어쩌랴.
스승은 스승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인걸.
대신 그로인해 자주 듣는 소리는 있다.
'반쪽짜리 카사노바.'
그러나 난 카사노바란 말 자체를 싫어하니, 오히려 환영이다.
링링이 내 대답을 가만히 기다린다.
반드시 대답을 듣고 가겠단 뜻.
그녀 또한 아는 것이다. 내가 그런 점 때문에 스승을 싫어한다는 걸.
뭐 오는 여자는 거부 안 하긴 하지만...
그냥 대답해주기엔, 공교롭게도 난 저 여인의 몸이 더 탐이 난단 말이지.
"글쎄요. 링링씨가 도와주면 할 마음이 조금 날 것 같은데요."
링링의 얼굴이 아주 살짝 구겨진다.
아마 속으로는 내 욕을 한 사발 뱉어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지.
자지에 박히며 헐떡이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큭. 물건에 힘이 부쩍 들어간다.
링링이 고갤 끄덕인다.
아주 천천히. 마지못해하며.
"...그렇게 하죠. 이따 데리러 오겠습니다."
"봉사는?"
"30분 정도 일찍 데리러 오도록 하죠."
즉, 미리 와서 상대해주겠단 뜻이다.
그치만, 에게? 겨우 30분?
"너무 짧은 거 같은데..."
여인이 졌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후에도 한 번 더 시간 내보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따 보도록 합시다, 링링양."
여인이 대답 대신 몸을 홱 돌려 자신의 텐트로 돌아갔다.
주인이 시킨 임무를 완수하긴 했으나, 기분이 나쁘단 뜻이리라.
그래도 그녀라면 말을 바꾸거나 하진 않으니, 상관없겠지.
엘리트가 괜히 엘리트가 아니다.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존재.
자존심과 자긍심이라는 것으로 똘똘 뭉친 여인인 만큼, 날로 먹을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난 간만에 친구랑 얘기를 나눠볼까.'
원래대로라면 틈틈이 민아를 조교할 생각이었으나, 연예인 동생의 등장으로 그게 힘들게 되어버렸다.
대신에 링링을 맛보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뭐 민아는 이미 내게 푹 빠진 상태라, 진짜 완전 못난 짓 하진 않는 한 호감 수치가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대로 방생시켜놔도 아마 못해도 2달은 내 생각에 가슴앓이를 할 수준에 다다랐으니.
하루 정도 놔둔들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그에 친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녀석은 낚시물품을 챙기고 있다.
흘끗 옆에 놓인 비닐 봉투를 보니, 소주 4병이 들어있다.
'한 잔 할 생각이로구만.'
이해는 간다.
이곳에 오면 그녀가 생각날 테니.
민아의 엄마. 이제는 죽어 떠나버린 내 오랜 소꿉친구.
내가 다가가자 어서오라며 물건들을 들고는 턱짓한다.
그러고는 검은 봉투를 슬쩍 들어 보이며 하는 말.
"괜찮지?"
"좋지."
슬쩍 민아를 보니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 관계로 우리 둘만 움직이게 되었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겨 야영지로부터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바늘에 미끼를 끼우는 녀석.
내가 돌연 다짜고짜 미끼도 없이 휙 던지자,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너 미끼 안 끼지 않았어?"
"맞아. 어차피 진짜 낚시하러 온 것도 아니잖아?"
친구 녀석이 머쓱한 듯 볼을 긁적이더니, 자신도 그냥 물 한가운데로 대충 던졌다.
사실 미끼를 껴도 상관은 없으나, 낮과는 달리 밤낚시면 보통 던지고 30초 안에 반응이 오기에.
우리가 이야기하러 왔지 낚시하러 온 게 아닌 만큼, 굳이 일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램프 등을 가운데 놓고, 주섬주섬 소주를 까는 녀석.
종이컵에 따라, 우리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후야. 요새 왜케 지연이가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럴 만하지. 딸이 똑 닮았더만.
아마 딸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날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민아가 없는 만큼, 친구 녀석은 때가 이때다 자기 푸념을 한 없이 늘어놓았다.
술이 들어가니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살짝은 지루했으나... 녀석의 마음을 아니 그저 가만히 들어줄 뿐이다.
그렇게 소주 3병이 사라지고.
아니, 내가 마신 건 2잔반뿐인데 벌써...?
아무튼 친구의 푸념을 들어주다, 문득 든 생각에 난 나직이 물었다.
"이제 니 이야기 그만 하고 민아 이야기 좀 해봐. 이번에 보니, 민아가 좀 변한 것 같던데?"
그런데 그 순간, 친구의 몸이 움찔 거렸다.
뭐...지? 술기운이 심하다지만, 방금 그건...?
친구 녀석이 돌연 말이 없어졌다.
그저 가만히 빈 잔에 소주를 붓고 마신다.
그러기를 3잔 째.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궁금증이 가득 밀려왔으나, 묵묵히 녀석이 마음을 다잡길 기다렸다.
그렇게 마지막 소주까지 다 비우기 직전제야 천천히 입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녀석.
"민아 말이야."
"민아가 왜?"
뭔데 저리 뜸을 들여?
그러나 그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내 사고는 경직됐다.
"민아... 아프다. 병원에 가니까, 병이 있다고 하더라..."
"병이라니? 무슨 병인데?!"
딱히 아픈 덴 없어 보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 아픈 건가?
내가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하자, 친구 녀석이 힘겹게 입을 연다.
고개를 푹 떨구며.
"...정신질환이 좀 있데."
정신질환...
그나마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은 마음에 안도감이 든다.
지금 내 사냥감이라고는 해도 어찌됐든 소꿉친구의 딸아이요. 내 첫사랑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니까.
현재 민아에 대한 내 감정은 단순한 사냥감을 넘어 복잡 미묘하기 그지없는 상태다.
아무튼 친구 녀석은 소주 한 잔을 더 들이키더니, 자신의 딸 상태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 엄마가 죽은 게 원인이지 않을까 하고 보더라. 그 때 충격을 크게 받았나봐. 얘가... 그 뒤론 상대방을 잘 공감하지 못해. 아니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의 행동과 의도를 인지는 하는데, 자기 밖에 몰라."
그럴 리가.
"나나 다른 사람들 대할 때 보니까, 막 잘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문제없던데?"
친구 녀석이 쓰게 웃는다.
그리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리 해야 한다는 걸 알고 하는 거야.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게 아니라, 지식으로 알고 있는 걸 행하는 거지."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어.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가 그래. 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게 정상이야."
그렇다.
인간은 다 자기밖에 모른다.
그게 가장 희석되는 게 가족이기에, 아닌 가능성도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인간은 본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명체이다.
"내가 볼 때 그 정도면 민아 아무 문제없어. 괜찮아."
"쿡쿡. 정말 너란 놈은..."
친구 놈이 작게 웃는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분이 좀 풀어진 걸까.
아까 고개를 숙일 때하곤 다르게 꽤 홀가분해 보인다.
그런 녀석에게 걱정 말라며 한 마디 더 덧붙여준다.
"민아 아픈 거 아니다. 그 정도 이기주의는 누구나 가지고 있어. 당장 나만 봐도 그러지 않냐?"
"큭큭. 그렇지. 우리 후, 아주 본인밖에 모르지! 에라이 나쁜 놈!!"
그러고는 내게 달려드는 녀석.
가볍게 붙잡아 살짝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좀 자주 만나서 술 상대 좀 해주면 어디 덧나냐!!"
"내가 너 만날 시간 있음, 여자 만나지."
"그건 그러네."
빠르게 수긍한다. 쿡. 싱겁기는.
팔을 풀자, 내게서 떨어지길 잠시.
이내 윙크하며 하는 말.
"뭐 괜찮은 여인 찾았어?"
괜찮은 여인이라...
"물론."
"오오오! 누군데? 한 번 날 잡아서 소개시켜줘!"
그런 그 때, 사박사박 소리와 함께 웬 빛이 날아온다.
그에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민아다.
음? 때마침 왔네.
괜찮은 여인 두 명중 하나, 민아.
따로 날 잡아서 소개시켜줄 필요까진 없고, 지금 해주자.
"때마침 저기 오네. 민아!"
그런 내 호명에 반응하듯, 해맑게 웃으며 외치는 아이.
"아빠!! 아저씨!!"
친구 녀석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멍하다는 건 안 맞고 마치 감동 받은 듯한 표정.
난 그저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걸 좋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녀석이 민아에게 손을 흔들며 돌연 내게 어깨를 걸쳤다.
그리곤 나직이 말한다.
"고맙다. 그래도 너밖에 없다."
"별 말씀을."
자식. 그동안 그 일로 마음 고생 심했구나.
저런 아이가 이기주의는 무슨...
설령 자기밖에 모른다 하더라도 괜찮다. 그게 민아라면.
그에 나 또한 친구 놈 어깨 위에 팔을 올려 툭툭 두드려 주었다.
'너무 걱정마라.'
혹여나 사냥이 끝난 후에도 별 문제없는지, 내가 꾸준히 체크해 볼 테니.
사냥꾼 서후로서가 아니라 40년지기 소꿉친구 서후로서, 내 여기서 약속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