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마녀, 에스테야-37화 (37/42)

〈 37화 〉 일상의 위기 (3)

* * *

036.일상의 위기(3)

샀다.

에스테야가 입었던 잠옷 중에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그러니까,나를 꼴리게 만들지 못했던 잠옷은 없었다.물론 내가 그런 잠옷들만을 골라 입혀놓은 것도 한 몫 했다.

내가 탈의실에 들락거리는 걸 일부 사람들이 보긴 했지만,기껏해야 보고 나오는 ‘들락거림’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리 많은 눈총이 오지도 않았다.

애시당초에 내가 에스테야의 잠옷 차림을 다른 새끼들한테 보여줄 수도 없다.용납 못한다.

“…내가 들어도 되는데.”

에스테야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됐고.짐은 내가 들어줄 테니까,기숙사로 돌아가서 빠짐없이 입어볼 생각이나 해.”

“그건…좀 좋다.”

“좋아?”

내가 싱긋 웃으며 되묻자,에스테야의 얼굴에 혈색이 싹 가신다.

“…무슨 생각 해,차서운?”

“열 다섯 벌 샀으니까,최소한2주 동안은 새로운 마음으로 괴롭힐 수 있다는 생각?”

“…미쳤어.”

그래도 조금은 적응했는지,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나는 킬킬 웃으며 에스테야의 허리를 더 끌어안았다.

“읏…더워,차서운.”

“난 좋은데.”

덥다는 건 핑계였다.가을이 지나가고 있는 마당에 덥기는 뭐가 덥다는 말인가.서늘하고 선선하기만 한데.

“정말로 더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빙긋 웃으며,에스테야가 입고 있던 얇은 가디건을 손에 잡았다.그리고 그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 너머로 넘긴다.

“…차서운?”

벚꽃색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벌써 겁먹었는지,눈을 연신 깜빡이면서 조그마한 몸이 빳빳하게 굳는다.

“자,자,잠깐,여기 길거리….”

“여기서 하려는 거 아니야.”

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는데도 에스테야의 몸은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내가 하도 많이 괴롭히긴 했지….

“…정말로?”

“덥다면서?가디건 내가 들어주려고 하는거야.”

“…좋아.”

반신반의.

나를 확실히 믿는 눈치는 아니다.그래도 일단 피하려는 제스쳐가 없고,내 손에 제 몸을 내주는 걸 보면 저번의 고백은 확실히 유효했다.

물론 내게도 유효했지만.

아마 그렇지 않았더라면,에스테야의 이 귀여운 반응에 당장 손목을 붙잡고 뒷골목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저번 에스독 거리 골목에서의 일이 또다시 벌어졌겠지.

나름 그것도 즐겁긴 한데.

“좀 더 시원하긴 하다.”

물론 나도 좀 더 눈이 즐거웠다.에스테야의 밝은 노란색 원피스는 민소매였으니까.

빛이 바랬나 싶은 새하얀 팔과 어깨에는 연분홍색의 혈색이 돈다.내가 제일 사랑하는 색이었다.

“근데 있잖아,차서운.”

“어.”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이리 좀 와 볼래?”

에스테야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나를 마주한다.대로변 한가운데에서의 애정행각이라 주변의 시선이 조금 모이긴 했다.

몸을 조금 내려달라는 제스쳐다.나는 기꺼이 허리를 좀 더 굽혀주었다.

“무슨 생각?”

에스테야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냥…꼭 최고의 마녀가 되어야 하나,하는 생각.어차피 마녀나 마법사들은 죽어도 날 인정해주지 않을 거잖아.”

맞는 말이다.

나는 에스테야의 가냘픈 등을 쓰다듬어주었다.손길이 닿자,장갑을 꼈는데도 에스테야의 몸이 움찔거린다.

“나 장갑 꼈어,에스테야.”

“…알아.조건반사 같은 거야.”

조건반사?

파블로프의 개 같은 거?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묻자,에스테야가 고개를 푹 숙이곤 중얼거렸다.

“…너 모르는구나.너,나 안을 때마다…만날 등 쓰다듬잖아.”

아.

내가 그랬던가.

솔직히 내가 에스테야의 등을 즐기는 건 사실이다.별다른 성적 매력이 있는 부위가 아니긴 하지만…내 커다란 손바닥에 비교해 한없이 가냘프고 조그마한 등을 어루만지고 있자면 소유욕이 저 밑에서부터 단단하게 차오른다.

완전히 내 손 안에 넣은 작고 가냘픈 소녀.

뿌듯하고도 단단한 만족감이다.무엇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운.굳이 치마를 들추고 그 아래를 탐하지 않더라도,에스테야를 껴안고 있으면 그녀가 온전히 내 것이라는 기분이 든다.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 때문일지,더 이상은 나를 밀어내지 않는 그 조그마한 손 때문일지는 몰라도.

“내가 그랬어?”

“만날 그래.내가 울면 괜찮다면서 등 쓰다듬고.그래놓곤 더 하잖아.내가 우는 게 그렇게 좋아?”

에스테야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게 쏘아붙였다.

“모르는구나,에스테야?”

“…내가 뭘?”

“예쁜 애는 울 때 더 예뻐.”

내 대답에,에스테야의 눈이 이만큼 커졌다.

“…완전히 미쳤어.”

“너한테 미쳤다고 해 두자.”

“더 미친 거 같거든?”

기겁하며 나를 밀어내곤,팔짱을 끼는 모습이 상당히 귀엽다.그러면서도 두 뺨이 가볍게 붉어지는 걸 보고 있자면,역시 기숙사로 돌아갔을 때 옷은 내 손으로 갈아입혀 주어야만 할 것 같다.

욕망을 참기 어려울테니까.

“그쯤 해 둬,에스테야.더 이상 나를 꼴리게 만들면 위험해.”

“아니,그런,하….차서운,너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어?”

“그런 나는 싫어?”

나는 에스테야가 내게 고백했을 때 던졌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고,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대답을 제 때 내놓지 못했다.

“그,그게,그게 아니라…으….”

“섭섭한데.”

“아니…별 게 다 섭섭…힉…!”

에스테야를 품에 끌어안곤,내 몸으로 가린 다음 아무도 보지 못하게 그 자그마한 젖가슴을 콱 움켜쥐었다.에스테야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읏…하으…그,그만…응…?”

“물어봤잖아.그런 나는 싫냐고.”

“아,아,안 싫어!안 싫다고!”

나는 그제서야 에스테야를 놓아주었다.연분홍색 눈에 눈물이 찔끔 고여있었고,에스테야는 잔뜩 삐진 표정으로 내 손에서 자기 가디건을 다시 빼앗아갔다.

“가디건은 왜?”

“아무래도 다시 입어야겠어.너는 너무 위험해.”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렇게 나온다면…가디건 한 장 따위로는 별로 자기보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수밖에 없겠네.”

나는 손을 들어,거리 구석의 골목을 가리켰다.에스테야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너,너….”

“그러니까 돌려줘.네 어깨 보기 좋단 말이야.”

“고,고작 그런 이유야?”

나는 에스테야의 품에서 가디건을 다시 빼앗았다.그리곤 잠옷을 잔뜩 사서 넣어뒀던 종이봉투에 쑤셔박는다.

“고작 그런 이유라니.더없이 충분한 이유지.”

에스테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아,아니,자,잠깐,차서운…!”

쿠당탕.

에스테야는 결국 바닥을 굴렀다.치마가 반쯤 뒤집혀서,새하얗고 가냘픈 허벅지가 드러나는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든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로.

“왜,에스테야?”

능청스럽게 묻는 내게,에스테야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신발장 앞은 싫다고!”

치맛자락을 조그마한 손으로 꾹 누른 채,슬금슬금 뒤로 몸을 뺀다.나는 느긋하게 구두를 벗고,장갑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난 좋은데.”

“자,작작,히익…!”

내가 허공에서 예의 그 ‘꼬리’를 당겨 잡자 에스테야의 몸이 다시 바르르 떨린다.하지만 나는 그걸 직접 들이밀지 않았다.

에스테야에게 던져줬을 뿐이지.

“자.약속은 지켜야지.”

“…약속에,신발장은 없었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다.그래,그 정도야 봐줄 수 있지.

“좋아.”

“…씨,씻고 와서 할 거야.”

“그렇게 해.”

“오,옷도 좀 갈아입고 나서….”

내가 미간을 확 찌푸리자,에스테야가 고개를 푹 숙였다.나는 천천히 에스테야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선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 좋은데,그거 쓰려면 속옷 못 입는 건 알지?”

“아,알아….”

나는 천천히 재킷을 벗어 코트와 함께 옷걸이에 걸고,에스테야가 제일 좋아하던 까만 넥타이를 살짝 풀어 셔츠의 첫 단추를 끌렀다.

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에스테야가,조그맣게 침을 꼴깍 삼킨다.

“에스테야.너 지금…”

“조,조용히 하지 않으면 씻으러 들어가서 영원히 안 나올거야!”

토끼도 길들여진 토끼가 더 귀엽다.

“그랬다간 아마 내가 욕조로 쳐들어가게 될 걸.”

“…으.”

에스테야는 미처 못 벗은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대충 던져놓고는,내게 주춤거리며 다가왔다.침대에 앉아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던 내 품에 안긴다.내 허벅지 위에 그 소담한 엉덩이를 올리고,내 가슴팍에 뺨을 기댄다.

“아까 말했던 거 있잖아.”

아까라.

“최고의 마녀 운운하던 그거?”

“…응.”

“갑자기 그건 왜?”

내 되물음에,에스테야가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냥…그런 생각이 들었어.너랑 같이 있으면 굳이 마녀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

피식,웃음이 새어나왔다.에스테야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그제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눈치챈 거 같았다.

“…으.부끄러워.”

“얼른 씻고 오기나 해,에스테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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