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물밑작업 (2)
* * *
025. 물밑작업 (2)
이상하다.
분명, 에스테야가 돌아올 시간이 지났다.
애당초에 에스테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뭐지?”
불길하고 불안한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세드릭 기스테르가 놓았던 엄포가 생각나, 칼리지 한가운데의 시계탑에도 가 보았다.
하지만 에스테야는 없었다.
나와 함께 누웠던 잔디밭의 나무 밑동에도, 호숫가의 벤치에도, 기숙사에도 없었다. 심지어, 장서관 안을 샅샅히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모든 마법사와 마녀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다.
그렇게라도 하면, 에스테야가 제발 그만하라며 나오지 않을까. 눈 앞에서 마녀와 마법사들이 찢겨 죽던 것을 보던 세월이, 무려 666개의 심장을 먹어야 했던 만큼일 터다.
그러니 그녀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쾅, 책상을 내리쳤다. 장서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내 작고 사랑스러운 마녀가 어디로 갔는지가 문제다.
그 때였다.
“자네가 혹시….”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누구요.”
사납게 달아오른 내 목소리. 내가 들어도 흉포하고 흉악하다. 나는 지금 분노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폭탄이다. 도화선에 불 붙은 것을 모두에게 내보이며, 당장 물을 주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이라고 겁을 주고 있다.
“벚꽃의 마녀를 찾는가?”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에스테야가 가장 좋아하던 교수. 월요일의 노마법사다.
“…에스테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안타까운 일이 있었네. 내가 보호하고 있지. 따라오게.”
노마법사는 그 늙어 쭈글쭈글해진 손을 휘저으며 앞장섰다.
안타까운 일?
일단 보고 결정할 것이다. 나의 벚꽃에 손끝이라도 함부로 댔다가는, 내가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 ‘가시검’조차도 나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
노마법사의 뒤를 밟는 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아마 마녀인 에스테야만이 이 길을 기억하고 있겠지. 나는 길을 외우는 것을 포기하고, 책장과 책장 사이를 파고드는 노마법사의 조그마한 체구를 따라잡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 십 분 쯤 걸었을까.
“오래 기다렸네. 내 생각보다는 참을성이 있는 편이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안타까운 일’ 운운을 하자마자 장서관의 절반을 태울 줄 알았다네. 역사의 기둥을 무너뜨린 게 자네라지?”
나는 쓰게 입맛을 다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제 벚꽃에 손대는 건 못참습니다.”
“에스테야 체라서스는 좋은 권속을 두었군.”
그녀에게 비극을 부여해주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다. 더 이상, 작고 가냘픈 어깨 위에 슬픔과 절망의 짐을 올려놓고 싶지는 않다.
책임감, 죄악감, 그리고 나에게 안기는 그녀를 향한, 어찌보면 맹목적인 수준의 애정.
내가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좆같이 만들어진 세상에 정상을 재는 사회적 저울 따위는 없다. 이긴 자가 옳은 것이요, 승리가 곧 선인 세상이다.
나는 질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이곳이네.”
노마법사는 검고 오래된 양장본 도서의 책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내, 분명 마법이 아닌 기계장치가 주변의 바닥을 가볍게 울리며 돌아간다. 책장이 문처럼 열리고, 그 안에서 따스한 촛불의 빛이 새어나온다.
“에스테야는 이 안에 있네.”
함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열린 책장 문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벚꽃의 달콤한 향기에 더 이상은 인내할 수가 없었다. 감사의 인사마저도 잊고 그 안으로 몸을 들인다.
아.
맡고 싶었던 벚꽃의 향이다.
노마법사는 나를 집어넣은 채로 문을 닫아주었다.
“…차서운?”
그 때, 저 구석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가냘프고 가녀린 음성의 밑에는 처절하고도 외로운 슬픔이 깔려 있다.
“에스테야, 어디 있어?”
“여기. 그…침대 위에.”
침대 자체가 벽체의 모서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나는 대뜸 에스테야에게 다가갔고, 일단 끌어안았다.
“왜 여기있어. 한참 찾았잖아.”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데…라는 말을 붙이려다 말았다. 에스테야는 나를 끌어안지조차도 못하고, 내 품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흐느낌은 점차 거칠어졌고, 이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세찬 울음으로 변모했다.
“내가, 흑, 내가…히끅, 뭘, 뭘 그리, 흐윽…잘못한거야…?”
나한테 묻는 게 아니다. 세상에게 토로하는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에스테야의 가냘픈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밖에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는데…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내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킬킬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두 손으로, 이 가냘픈 소녀를 비극의 구렁텅이로 처박은 것이 나다.
“…에스테야.”
“…으응. 차서운….”
에스테야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내 품에 닦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에스테야는 이미 긴 울음에 눈은 충혈되었고, 눈가는 부은 상태였다.
“내가 미안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에스테야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나는 그녀조차도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나조차도 의심하는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이 내가 쓴 소설의 설정에 불과하다는 것을…솔직히 말해서, 나조차도 믿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저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것은 아닐까 소망하고 있었으므로.
“…차서운, 이 나쁜 새끼야.”
에스테야의 입에서 진짜 욕설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고,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내가 너 없으면 안된다고 했잖아….”
나를 끌어안던 가냘픈 팔이, 그 조그마한 손이 주먹을 쥐고 내 가슴팍을 때린다. 몸은 아프지 않지만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한 번 한 번이 영혼을 붙잡고 흔드는 것만 같다.
“왜…왜 날, 왜 날 놓고 갔어….”
한참을 그러다, 기력이 떨어졌는지 내 품에 다시 얌전히 안긴다. 훌쩍이는 흐느낌과 그 때마다 떨리는 몸은 여전했지만.
“…이제 안 떨어질게.”
“거짓말…하지 마.”
에스테야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나는 가만히 에스테야의 등을 쓰다듬었고,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워.”
“뭐?”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조그마한 손이 내 옷깃을 잡더니, 확 끌어당긴다. 방심하던 나는 그대로 에스테야에게 끌려갔고, 침대에 누운 가냘픈 몸의 위를 점하고야 말았다.
“…나, 위로해 줘.”
덜덜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분명히 내 목을 끌어안고 있다. 해달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는 명료하다.
하지만 그걸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요청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에스테야. 내 욕망에 네가 알아서 맞춰줄 필요는 없—.”
“—그런 거 아니야.”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단호한 선언.
눈물을 가득 머금고 나를 노려보는 투명한 눈동자.
에스테야는 내 목에서 손을 내리더니,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스스로 풀기 시작했다.
“…잊고 싶어.”
단추가 세 개 쯤 풀어졌다. 에스테야의 뽀얀 쇄골과 앙가슴이 보인다.
“모두가 날 미워한다는 사실을…그만 잊고 싶어.”
단추가 다섯 개 풀어진다. 오늘, 내가 입혀주지 않았던 에스테야의 브래지어는 연한 보라색이다.
“네가 날 안으면…아무 생각도 안 나. 머릿속에 너만 가득하단 말이야.”
더 이상 풀 단추가 없다. 아랫배에 새겨진 각인은 열차 때보다는 조금 탁한 색으로 붉게 빛났다.
“이번에는 내가, 내가 해달라고 하는 거야. 내가 널 이용하는 거라고, 이 바보야. 그러니까…그러니까….”
잔뜩 긴장한건지, 나 없이 홀로 겪었을 긴 절망감의 끝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인지. 에스테야의 화관은 어느 때보다도 처연하고 서글픈 향을 내뿜었다. 그것은 달되, 씁쓸했다.
나는 가만히 에스테야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에게 안겨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이 소녀의 결심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차마, 그 조그마한 입술로 말할 수 없는 그 말.
듣는 것만으로도 나를 달아오르게 하고, 영혼 속에서 깊은 동경과 욕망이 들끓게 만들 것이다.
내가 아는 에스테야는 그랬다.
단 한 마디 말로 나의 이성을 끊어놓을 줄 알았다.
“…내가 아무것도, 너 말고 아무것도 신경쓰지 못할 때까지…네가 원하는 만큼 나를 먹어 줘.”
나는, 일단 그녀의 화관을 한 입 베어무는 것으로 시작했다.
오늘 밤, 나는 야수고, 그녀는 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