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물밑작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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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 물밑작업 (1)
내가 에스테야와 남은 삶을 평온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놀랍게도 마법사측이 아닌 인류교회측이 승리해야 한다.
왜냐.
까놓고 생각해보자.
최종의 전쟁에서 승리한 마법사들이 과연 그녀를 좋게 볼까? 아마, 에스테야가 아무리 전선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잔 다르크가 증명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한 번 싫어했던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족속들이 바로 대부분의 인간이니까.
나는 조용히 쓰다 남은 양피지 조각에, 에스테야가 아끼는 만년필을 빌려 메모를 적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너무 눈에 띈다. 이번에는 나 혼자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잠깐 다녀올게.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깊은 밤이다. 침대 위에서, 오늘 밤은 괴롭히지 않겠다는 내 약속을 받아냈던 에스테야가 곤히 자고 있다. 그 덕분인지 에스테야는 연신 내 품에 기어들어와 안겼고, 내 입술을 만지작거렸고, 내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기기까지 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몇 시간 없다고 울고 있진 않겠지.”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살포시 앉아 에스테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조그마한 손이, 잠결에도 내 손을 찾아 엄지손가락을 움켜쥔다.
귀여웠지만 나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은의 별.
그 멍청한 족속들을 찾아가야 했다.
*
마법사는 이백년간 인간과 다른 종(?)으로 구분되어왔다. 그도 그럴것이, 악마 군주들의 지배 하에서 그들에게 신체의 개조를 받았던 불쌍한 놈들이 마법사와 마녀들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자신들의 앞잡이로 조선인들을 꼬여 써먹었듯, 악마들은 자신들의 앞잡이로 인간들을 꼬여 써먹은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교미를 통한 체액의 교환으로 마력이 충전되는 방식.
같은 인간을 착취하라는 메타포가 담긴 개조인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간임을 놓지 않은 마법사와 마녀들이 있다. 그들은 권속을 만들지 않고, 아무하고나 밤을 보내지 않는다.
마력이 모두 바닥나더라도.
“이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조용히 수도 베디스의 종탑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 군주들이 격퇴된 후로 실전되어버린 고위 주문, 공간연결을 써먹은 것이다.
이 주문이 아마 발푸르기스 의회 쪽에 남아있었더라면, 인간들은 절대 지금의 국경선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교회가 마법의회를 압박한다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고.
설정하기를, 은의 별 결사의 본거지는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결국은 모든 마력을 소진한 마법사와 마녀인만큼, 마법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아지트는 아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비밀스러운 건 맞다.
인간들의 편에 서서, 마법사들을 격퇴하는데 도움을 주면 전후(戰?)의 마녀재판에서 자유로워지리라고 생각하는 아둔한 족속들.
그들의 생각에 동조해 줄 때가 왔다.
비록, 나는 그들처럼 아둔하게 굴지는 않겠지만.
*
“…아.”
잠에서 깼는데, 옆자리가 차갑게 식어있다. 차서운, 어디로 간 거지?
아직 앞이 아련한 시야로, 나는 손을 뻗어 침대를 이리저리 쓸어보았다. 하지만 그의 살결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 바스락거리는 무언가가 내 이마 위에서 떨어졌다.
“…어?”
쪽지다.
잠깐 다녀올게.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어딜 다녀온다는거야.”
그 정도는 써 놔야지 걱정을 안 할 거 아니야.
어젯밤은 힘들지 않았다. 차서운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가만히 내가 그의 몸을 가지고 놀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 탄탄한 가슴을 눌러보기도 하고, 그 목덜미에 입맞춰보기도 했다.
참기 어려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는 끝내 견뎌냈다.
대신 자기 전에 조금 무서운 속삭임을 들었다.
‘내일 밤은 기대해도 좋을거야.’
대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읏.”
아직도 아랫배 깊이 박혀 있는 그의 조약돌이 조금 신경쓰였다. 막…진동하다가, 안에서 회전하다가 그러던데. 설마 그걸로 또 나를 괴롭히려는 건지….
다 좋은데, 수업 들을 때만 내버려둬줬으면.
“차서운…나 씻겨줘.”
평소처럼 침대에서 팔을 삐죽 내밀어 벌리곤 그를 불렀다. 내가 생각보다 멍청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맞다. 어디 갔댔지.”
이상하리만치 잘 씻겨주는 남자.
이전에 연애야 해 본 적 있을지 몰라도, 그 완숙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능숙한 손짓을 만끽하고 있노라면 묘한 질투심이 느껴지곤 했다. 억울함도 그렇고.
아니.
나는 자기가 처음인데. 쟤는 왜 내가 처음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비이성적인 사고방식이지만, 속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그가 미숙하면 미숙한대로 별로였겠지.
옷을 입고, 양치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평소처럼 입은 옷 위로 가운을 걸친 다음 장서관으로 향한다. 그가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의 매서움이 조금 더 노골적이다.
괜히, 괜히 몸이 쪼그라들었다.
‘…저녁 먹기 전이면 너무 길잖아. 어떻게 나를 하루 왠종일 혼자 내버려 둘 수 있어?’
불만이 가득 가슴 속에 차오른다. 오면 어리광부려야지. 저녁도 해달라고 떼써야지.
…어차피 차서운이 요리하긴 하지만.
그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거칠게 치고 지나갔다.
“—아.”
몸이 뒤로 쭉 기울어지고, 아릿한 고통이 엉덩이로부터 올라온다. 엉덩방아를 찧은 나를…내려다보는 사람은 세드릭 기스테르 학생회장이었다.
“…회장?”
“칫.”
그는 마치 나를 더러운 쓰레기 보듯 내려다보더니, 경멸 어린 표정을 지은 후에 그냥 가버렸다. 솔직히, 익숙하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외로웠다.
어디 있는 거야, 차서운.
그 때, 헨리 그리튼 교수의 수업이 저 멀리 흑판에서 시작했다. 늦으면 그 특유의 유창한 서론을 듣지 못하게 된다. 나는 급히 떨어트린 서적들을 그러모았고, 품에 가득 안은 채로 달렸다.
하지만 저 멀리까지 손쉽게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건 나 혼자였나보다.
툭.
발목에 무엇이 걸린다.
세레니아의 발이었다.
어떻게, 뭐라고 화를 내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딱딱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몇 번이고 구른 다음에야, 달리던 몸의 가속이 멈춘다.
“…흑, 하윽….”
아팠다.
온 몸의 뼈에 멍이 드는 것 같아서.
그러나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다들 나를…에워싼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자, 잠깐…?”
콱, 누군가의 발이 내 등을 밟는다.
“학…제발, 흑…아, 아파….”
장서관에서 마법을 쓰면 징계다. 특히, 공격하거나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는 마법을 쓰면 더더욱 큰 징계를 받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안 그래도 밉보이는데, 여기서 더 밉보였다간 정말로 퇴학을 받을 수도 있다. 이 학교에서 학생회란 조합에 가까워서, 어떤 마법사를 교수로 인증할지 말지까지 결정하는 강력한 권력집단이다.
학생과 교수의 쌍무적 계약관계로 이루어진 집단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의 장.
나는 분명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왜…나는 괴롭힘당하고 있지?
그 때, 누군가가 내 몸 위에 무언가를 쏟았다.
우유였다.
“하! 뒤집어쓰고 있는 꼴이 딱 지가 되살린 시체놈한테 박혀 앙앙대는 꼴 같네!”
누군지도 모를 목소리.
나는 일면식도 거치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만큼…잘못을 한 걸까.
내가…뭘 잘못한거지?
*
이야기는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진정성을 의심받지는 않았다. 은의 별 결사의 마법사와 마녀들도 가시검의 이야기라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알고 있었고, 그녀의 딸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라스푸틴 칼리지에 그들의 스파이가 심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가 너무 서둘렀나.”
내가 오지 않았어도 연락책을 통해 먼저 접근했을 거라는 결사단장의 말이 조금 씁쓸하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일은 빨리 끝났고, 아직은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슬슬 에스테야가 걱정되기도 했다.
지금 시간이라면 장서관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텐데.
기초수업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는, 그 좋아하는 노마법사의 수업이겠지. 언제나 월요일의 아홉시가 되면 장서관 구석진 흑판 앞에 자리를 잡고선, ‘왜 내가 월요일에 수업을 시작하는 지 아는가?’라는 익숙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베디스의 시계탑.
이 밑에 웅크리고 있는 결사단은, 교회와도 어느정도 결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의 추악함을 모른다. 신을 믿는 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마법사들은 알지 못한다.
신을 믿지 않으므로.
신앙의 이름 하에 얼마나 야만적인 일까지 가능한지, 학문과 지식의 저주에 시달리는 이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마법사들이 세상에서 절멸하고, 교회와 인간이 지배하는 야만의 중근세가 다시 도래하고 나면….
나는 에스테야를 데리고 깊고 외진 숲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그 누구도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도록.
“돌아가볼까. 내 마녀의 곁으로.”
가볍게 손을 휘둘러, 뱀의 동공처럼 갈라지는 공간의 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울지나 않고 있으면 다행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