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나와의 일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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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나와의 일상 (2)
라스푸틴 칼리지는 정말로 명료한 수업 같은 게 없었다. 대신, 거대한 학문의 성전이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장서관을 갖추고 있을 뿐.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카데미식 교육을 중근세 대학의 이미지로 스킨만 덮어씌운 곳.
그런 느낌이다.
저 구석에서는 노마법사가 어디에든 널려있는 흑판 위에 분필로 필기를 하며 침을 튀기고 있고, 그 앞에 구름처럼 몰려있는 검은 가운을 입은 학생들은 하다못해 그 침이라도 받아마실 것처럼 감탄에 입을 벌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에스테야도 있었다. 비록 그녀의 옆은 원형으로 비어있었지만.
‘…예쁘긴 하네. 유난히.’
똑같은 검은 가운을 위에 걸치고 있어도 에스테야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근처 책상에는 권속들이 마법이라는 신비의 학문을 공부하는 제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치러지는 필기시험. 시험범위라고는 대충 ‘1학년 마법사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마법에 대한 모든 기초적 소양’이라고 되어있었다.
벽이란 벽은 죄다 흑판과 책꽂이인, 줄잡아 마도서가 수십만권은 훌쩍 넘을 이 장서관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분량을 다 공부하겠는가.
아마도 자기들끼리는 족보가 나돌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에스테야 체라서스를 믿는다. 그녀는 나의 최종보스이고, 가시검에게 결국 큰 부상을 입혔던 마녀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그저 새장 밖 세드릭의 마법을 어깨 너머로 익힌 성과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대단하다.
당연히 그녀는 압도적인 재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열 여섯 살에 새로운 마녀가 되고, 열 아홉이 되기도 전에 칼리지의 입학초정장을 받아서, 스물 다섯 살이 되기 전에 ‘가시검’에게 유효타를 먹일 만한 마법을 스스로 짜낸다.
다른 마녀나 마법사와는 격 자체를 달리하는 천재.
우주가 사랑하는 소녀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내 옆에 누군가가 앉았다.
“저 여자애가 그렇게 좋나요?”
붉은 머리칼.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목소리.
홍염이다.
“홍염인가? 나는 장서관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이 없으니 돌아가라. 여기서의 결투신청은 받지 않아.”
“역사에서는 기둥까지 부숴가며 난리쳤으면서요?”
나는 턱 끝으로 에스테야를 가리켰다.
“집중하고 있잖아, 에스테야가.”
세레니아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나는 철저하게 그 붉은 머리 마녀를 무시했고, 노마법사의 가르침이 이어질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테야의 머리카락을 감상하기로 했다.
내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봐요.”
방해꾼이 있었으니까.
“적당히 하지. 또 시비냐.”
“아니, 시비가 아니라. 당신…한 번 죽었던 마법사라면서요. 몇 살에 죽었어요?”
별 같잖은 걸 다 물어본다. 내가 아무리 가시검과 인간교회 측에 설정을 몰아서 쓰긴 했어도, 마녀와 마법사들의 관습과 의식수준에 대해서는 정해놓은 바가 있었다.
학문에 미치고, 비전에 목매는 이들. 나는 이미 그녀에게 칼리지의 노마법사들, 그러니까 ‘교수’의 호칭을 학생회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대마법사들이나 쓸 법한 비전 주문인 ‘심연의 벼락창’을 선보였었다.
세레니아 아드로프는 그저 나의 비전이 궁금한 거다.
“140여 년 정도 살았는데.”
이 정도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관록이겠지. 세레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붉은 눈이 에스테야를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선망과 부러움이 가득한 눈.
“…쟤는 어떻게 당신 같은 영혼을 불러낸거죠?”
본인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별로 권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예?”
“너는 해가 왜 뜨는지, 구름이 왜 달을 가리는지, 황혼은 왜 붉은 빛이며 땅에서 싹은 왜 올라오는지 아냐?”
붉은 마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에스테야에게 마법의 학문적 진수를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마치, 개미에게 인간이 두 발로 걷는 걸 가르쳐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고, 나의 의지와 선언에 마력이 굴종하며 스스로 마법을 이루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세계의 마법관을 작성할 때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렇네요.”
“세상에는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들도 있지. 그런 걸 ‘사고’라고 한다.”
노마법사가 분필을 딱, 하고 흑판 아래에 내려놓았다. 학생들이 일어나서 갈채를 보낸다. 에스테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홍빛 눈이 초롱초롱하다.
“그런데 말이야.”
에스테야가 나를 돌아보았다. 내 곁에 있는 세레니아를 토끼눈으로 보더니, 흘끔거리며 나와 세레니아를 번갈아본다. 그리곤 이내 울상을 짓는다.
“그런데요?”
“그 사고로 맺어진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이면, 그건 ‘사건’이 되는거야.”
“…?”
분홍빛 머리가 나에게 달려오는 성난 걸음 걸음마다 곱게 휘날렸다. 에스테야는 내 품에 그대로 머리를 박더니, 내 허리를 껴안곤 나를 올려다본다.
“차서운.”
나는 대답 대신 에스테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서 얘기하자, 에스테야.”
불만 가득한 표정. 툭 삐져나온 앙증맞은 입술.
“…알았어.”
에스테야는 내 팔을 끌어안듯 팔짱을 꼈고, 왜인지 동경과 선망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레니아를 향해 눈을 흘겼다.
우리는 그렇게 장서관을 빠져나왔다.
*
“너, 솔직히 말해. 걔랑 무슨 이야기 했어?”
“별 건 아니고.”
우리는 연못이라기에는 크고, 호수라기에는 작지만, 그 사이를 부르는 말이 없어 관대하게 그리프스 호수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큼지막한 물웅덩이 앞에 와 있었다.
호숫가에는 의자가 많다. 그런데, 나는 의자에 앉아있었지만 에스테야는 아니었다.
그 가냘픈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나를 내려다본다.
“별 거인지 아닌지는 내가, 내가 판단할거야.”
눈가에는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거린다.
아니, 내가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영원히 안고 데리고 살 생각인데…그래도 불안하겠지.
에스테야의 인간관계라곤 16년 동안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와 3년 동안 자신을 냉대한 마법사들 뿐이니까.
“나한테 나이를 묻더라고.”
“…나이?”
“내가 저번에 죽었던 마법사의 영혼이라고 둘러댔었잖아.”
그제서야 에스테야는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잠깐 고민하더니 눈을 크게 뜨곤, 입술을 삐죽인다.
나한테 좀 미안한 모양이지.
“…어, 얼른 말하지. 너한테서 비전을 빼가려고 접근했던 거야? 진짜…더러워. 비겁해. 못됐어.”
괜히 어설픈 욕설로 세레니아를 욕하다, 쭈뼛거렸다. 눈치를 조금 보더니, 대뜸 내 무릎에 앉아선 팔을 올려 목을 끌어안았다.
화관이 탐스럽고,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그 얼굴은 귀엽다. 내 허벅지 위로 닿는 에스테야의 도담한 엉덩이가 부드럽다.
“…차서운.”
“왜.”
“의심해서…미안.”
그리곤, 혼자 찔렸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왜. 내가 다른 여자애한테 눈길 주는 줄 알았어?”
“그으…내가 봤던 마법사들은 다 얼굴 다음으로는 가슴 본다고 했단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겠지. 솔직히, 나도 겁나 큰 가슴이 흔들리고 있으면 눈길은 간다. 별로 유쾌한 눈길은 아니었지만.
누가 부랄을 덜렁거리고 있어도 아마 눈길은 가지 않을까?
“에스테야.”
“…응.”
나는 에스테야를 답삭 안아선 조금 다르게 앉혀주었다. 가냘픈 몸을 답삭 안아들어선 살짝 돌렸다. 단단한 오른쪽 허벅지로 그 도담한 허벅지를 받친다. 무릎에 앉히는 건 맞지만, 이렇게 옆으로 앉히는 것도 제법 괜찮다.
“…이러면 다리 안 아파?”
다 목적이 있어서 하는 일이다.
“다리 안 아파.”
오른팔로 에스테야의 어깨를 감싸고, 비어있는 왼손으로는….
콱.
에스테야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힉, 아, 으…?”
“나도 가슴 봐, 에스테야.”
놀라 나를 올려다보는 에스테야의 얼굴에, 코 끝이 닿을 정도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품에 들어온 어깨가 조그맣게 움츠러드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니, 그, 이, 흐으, 차, 차서운…?”
“근데, 네 가슴이 제일 예쁘더라고.”
에스테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나는 에스테야의 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도 모르게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낸다.
“뭐, 뭐, 뭐 하는…거야…?”
“말 잘 듣는다면서?”
“아니, 그, 그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 볼까봐 주변을 힐끔거린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가운 자락을 꽁꽁 작은 손으로 잡아 여몄다.
“잘 봐, 에스테야.”
“아니, 뭘…읏.”
단추를 대여섯 개만 풀고, 블라우스 앞섶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에스테야의 쇄골을 어루만지고, 보드라운 앙가슴을 간지럽혔다. 품에 안긴 작은 몸이 파뜩 떤다. 머리에 꽃핀 화관에서 벚꽃향이 만발했다.
“나는 이렇게….”
브래지어 컵을 잡아 그 위로 들어올렸다. 가운 안으로 점점 옷차림이 흐트러져가는게 느껴지는지, 에스테야는 내 허벅지 위에서 몸을 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손 안에 잡히는 가슴이 좋아.”
그 귓가에, 조그마한 귓볼을 잡아먹을 것처럼 속삭이며, 나는 에스테야의 보드랍고도 사랑스러운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앙증맞게 달아오른 유두가 잡힌다.
“…흐으, 흐극, 하으…”
툭, 에스테야의 어깨가 내 품에 기대어졌다. 어쩔 줄 모르다, 발갛게 눈가가 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미움이나, 수치스러움이나, 놀람이 아니다.
이건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이다.
“저,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지. 에스테야, 너도 나 안 버릴거지?”
의외의 질문에 에스테야가 눈을 깜빡인다. 그리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못하는 거야, 그건.”
다행이다.
이제 마음놓고 ‘은의 별’에 접근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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