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이상한 대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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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 이상한 대학 (2)
“…또 할 건 아니지?”
불안해하는 눈빛은 언제고 또 울음을 터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다 아프다.
“아니…. 이번에는 정말 그냥 예뻐해줄거야.”
“그러니까, 그게….”
“해버린다?”
“…힉.”
장서관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리에는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아직 바람이 차가워 꽃을 틔우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에스테야의 화관이 더 예뻐보였다.
언제나 준비된 나만의 꽃이니까.
나는 슬그머니, 내 품에 안긴 에스테야의 화관에 입을 맞췄다. 놀라 내 팔을 움켜잡은 에스테야가 파뜩 떤다.
“아니, 흐으, 아, 안 한다며…?”
꽃은 그녀의 본질이다. 최초의 화인 출신 마법사이기도 하니까, 여러모로 예민하겠지.
게다가 꽃은 꽃나무의….
생식 수단이기도 하다.
열차 안에서 한껏 박혔던 에스테야는 여전히 다리에 힘을 주질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장서관 안에서야 어떻게 힘을 끌어모은 모양이지만, 문 밖을 나서자마자 주저앉으려는 걸 내가 겨우 잡았었으니까.
그래서, 나를 밀어내고 도망가질 못한다.
“내가 뭐 했어?”
능청스레 에스테야의 조그마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바들거리는 조그마한 어깨. 아마, 내가 에스테야를 처음 탐했을 때 가득 새겨놓았던 키스마크도 이제는 거의 희미해졌겠지.
다음은 뭘 새겨줄까.
저 새하얀, 삶아 깐 달걀보다 보드라운 피부에 어떤 자국을 남겨주면 좋을까.
“…차서운?”
“또 왜?”
“너, 지금 되게…막…즐거워보이는 거 알아?”
에스테야는 심술이 났는지, 그 작은 손을 뻗어선 내 볼을 엄지와 검지로 잡았다. 내가 자신을 안고 있느라 손이 없다는 걸 노린 거다.
“그럼. 얼마나 즐거운데.”
싱글벙글 웃는 내 낯에, 에스테야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한 다며?”
“아니, 뭐 널 잡아먹어야만 즐거운 줄 아냐?”
좀 억울해지려고 하네.
가만히 안고만 있어도 즐겁다고.
“그…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네 행동을 좀 돌아봐봐, 차서운. 그, 여, 열차 안에서…그게 뭐야.”
“어땠는데?”
내가 시치미를 뚝 떼자, 에스테야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그래도 귀엽다.
“네가, 어? 날, 막….”
“막?”
“막….”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스테야는 결국 나한테 따져묻는 걸 포기하고, 내 품에 발개진 얼굴을 다시 푹 묻었다.
“…씨, 몰라.”
꽃나무들의 앙상한 가지 너머로 새들이 건너다닌다. 참새들은 바쁘게 총총거리며 바닥을 걷고, 이내 걸음 걸음마다 도망가듯 포르르 날아갔다.
평온한 오후였다.
더없이 평온한.
“…있잖아, 차서운.”
나는 대답 대신 에스테야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그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알았어. 안 부르고 바로 말하면 되잖아.”
진짜 알아듣네. 이게 되네.
“좋아. 뭔데?”
“잠깐…쉬었다 안 갈래? 너, 팔하고 다리 안 아파…?”
솔직히 안 아팠다. 대체 뭘 하고 싶었길래 나를 이런 육신에 불러다 못박아놓은지 모르겠는데, 도무지 지치질 않는다. 완력 면도 그렇고.
무슨 정신나간 힘이 깃든 건 아니지만, 스태미나가 넘쳐난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근지구력도 마찬가지고.
“별로 안 아픈데. 왜, 지금 들어가기 싫어?”
에스테야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산들바람에, 머리 위 한껏 탐스럽게 핀 벚꽃들이 흔들린다.
아….
한 입만 먹고 싶다.
“기숙사 지금 너무 번잡스럽잖아.”
무슨 뜻인지 알겠다. 사람들의 눈길이 아직은 부담스러운 거다. 221호라는 기숙사 호실에서 알 수 있듯, 2층에만 스무 개가 넘는 기숙사실이 존재한다.
…복도가 미친듯이 복작거리겠지.
그 사이로 내가 에스테야를 품에 안고 지나가면, 아마 마법사고 마녀고 간에 눈길이 한방에 쏠릴 터다.
“누가 보면 어때. 좀 당당해져.”
“뭐, 뭐에 당당해지라는 거야….”
나는 마침 넓게 드리운 나무그늘 밑으로 에스테야를 데려갔다. 라스푸틴 칼리지의 캠퍼스 한가운데는 커다란 녹지였고, 잔디는 누구에게나 그 싱그러운 부드러움을 허락한다.
그게 설령 학살자 가시검의 딸이라고 할지라도.
“너랑 네 아버지가 무슨 상관이야.”
에스테야를 잔디 위에 내려놓고, 그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가늘게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깜빡이는 속눈썹이 사랑스럽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조그마한 입술이 오래 견딘 고통에 다물려진다. 한 명도 곁 지키는 사람 없이 혼자 살았던 사람. 일찍이 학대받고 이른 나이에 뛰쳐나와 아무도 믿을 수 없이 지냈던 소녀.
나는 에스테야의 손을 잡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조그마한 몸이 품 안에 가냘프게 안긴다. 인형같다. 보드랍고 작은 인형.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에스테야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고여 있었다. 과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겠지.
미안했다.
내가 생각없이, 자극적으로 만들겠답시고 쓴 설정 한 줄 때문이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믿지도 못하겠지만, 내가 이 비극을 계획하고 집필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면….
네가 내게서 떠나갈지도 모른다.
“…너는, 나한테서 안 떠날거야?”
나의 불안함을 느낀 걸까. 에스테야가 나를 끌어안고 울먹이며 물었다.
어떻게 너를 떠나겠어. 네가 떠나는게 두려운 내가.
“절대로.”
“절대로?”
에스테야가 내 어깨를 붙잡고 밀어냈다. 하지만 놓지는 않는다. 그저, 내 얼굴을 보고 싶은 거다.
“그래.”
나는 에스테야의 허리를 감아안았다. 앞일을 내다본 에스테야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다, 감긴다.
터져나온 석류알처럼 붉은 그 앙증맞은 입술.
새벽 잎사귀 위 첫 이슬을 마시듯 맛보았다.
겨울 지나 싹튼 새 잎처럼 보드랍고, 한낮의 땡볕 아래 익어가는 사과의 표면처럼 따뜻하다. 내 팔에 감긴 채 안긴 에스테야의 몸은 서로의 옷 너머로 체온과 호흡을 느끼게 했다.
마치 용의 품에 안긴 소녀처럼, 에스테야는 천천히 내 호흡에 제 숨을 맞추었다.
긴 입맞춤은 간지러운 약속이었다.
“…좋아. 믿을게.”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에스테야가 내 귀에 속삭이곤,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린다.
“누워, 차서운. 이번엔…진짜 보상이야.”
흡족했다.
“빨리 배우네, 에스테야?”
“시끄러워. 안 누울거야?”
나는 냉큼 잔디를 깔고 누워서, 에스테야의 허벅지를 머리맡에 베었다.
보드랍고, 따뜻하고, 왠지 설렌다.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 쓸어넘겨주는 에스테야의 손길도,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 나의 이마에 입맞춰주는 그 입술도….
어쩌면, 내가 그녀를 끔찍한 설정 속으로 밀어넣지 않았더라면 손에 쥐지 못했을 것들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우리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마녀들의 사회에서 분홍빛의 머리칼은 그리 튀는 색이 아니고, 모두가 자신의 권속과 이러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편안했다.
“에스테야.”
나는 조용히, 저 구석의 마법사와 그의 권속을 가리키며 에스테야를 불렀다.
“…차서운. 너, 미, 미쳤어?”
대놓고 야외플을 하는 놈들이었다.
“내가 뭐 하자고 했어?”
이 중근세가 짬뽕되고 마법사와 마녀들의 섹스가 흔하디 흔한 시대에도, 야외에서 저러고 있는 건 신기한 모양이었다.
우리만 보고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아, 아니…그러면 왜, 왜 저기를 가리키는데…?”
나는 세드릭이 싫었다.
내 에스테야에게 접근하는 것도, 마치 언제든 제 것으로 만들수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능글거리는 것도 역겹다.
“해보고 싶지 않아?”
에스테야는 내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조금만 더.
“아, 그으, 시, 싫은데…읏.”
몸을 돌려, 에스테야의 허벅지 안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바르르 떠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미소짓자, 에스테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 하지 말라니까…?”
그런데, 왜 날 안 밀어내는거야?
물론 입으로 소리내어 묻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다리를 오므리는 에스테야의 모습을 바라보다, 점점 더 윗쪽으로 입술을 옮겨 갔을 뿐이다.
“…힉, 흐으, 아, 차, 차서운…!”
치마를 반쯤 들추고, 에스테야의 허리가 점점 들썩일 무렵. 아마 주변의 시선도 점점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겠지.
그제서야 에스테야가 내 어깨를 잡고 밀었다.
“그, 그으….”
“왜?”
입술과 살갗이 닿았다. 그 이전에도, 나와 키스를 했었지. 아마 이 조그마한 몸은 지금 온 힘을 다해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치마를 걷어보면 그 안은 예쁘게 젖어 있을 것이다.
새벽을 갓 지난 꽃잎처럼.
“…하, 할 거면 들어가서 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도 듣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는 에스테야.
그건 분명 동의였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에스테야는, 그래봐야 열차 안에서처럼 또 몇 번이고 들고 박아대는 걸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또 날 안고…막…그럴 거잖아.”
피식 웃으며 에스테야를 안아들었다. 에스테야는 내 옷깃을 잡곤, 얌전히 안겨선 고개를 푹 파묻는다.
내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연분홍색 머리칼이 곱게 찰랑거렸다. 안긴 채로 다리를 힘껏 모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한껏 달아오른 게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좀 더 창의적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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