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마녀, 에스테야-20화 (20/42)

〈 20화 〉 이상한 대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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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이상한 대학 (1)

라스푸틴 칼리지 행 급행열차는 마녀와 마법사들의 도시이자 ‘발푸르기스’의 수도, 그레트헨 변두리의 역에 도착해서야 멈추었다.

푸른 하늘. 저 멀리 떠 있는 태양 아래로 조금 떨어진 시가지가 보인다. 중세와 근세, 그리고 근대가 뒤죽박죽 내 마음대로 섞인 이 세계의 로망 가득한 풍경이다.

마법사가 인간과 별개의 종으로 분리된 세상의 모습.

“생각보다…너무 크다.”

에스테야가 내 품에서 중얼거렸다. 대학 본관 건물을 보고 한 말이었다.

요새나 다름없이 만든 대학.

그레트헨의 유지이자 예술과 교육에 기여하는 부호, 발푸르기스 의회의 핵심 가문인 기스테르 가문이 백여 년 전 제공한 부지가 바로 여기다.

비록 전장식이기는 하지만 총과 대포로 무장한 인간들로부터 그 안의 어린 마녀와 마법사들을 지키기 위해, 라스푸틴 칼리지는 철저한 별 모양의 낮고 두꺼운 성벽을 채용했다.

안 크면 이상한 일이다.

“에스테야.”

“…응?”

그녀는 여전히 내 품에 안겨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랫배의 각인은 달군 쇠처럼 붉은색이었다.

“장담하겠는데, 네가 여기서 수석이 될 거야.”

내 말의 숨은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에스테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달아올랐다.

“…내가, 다리에 힘만 안 풀렸으면 내려달라고 했을 거야. 알아, 차서운?”

“그럼. 알지. 그래서 힘 풀릴 때까지 하잖아, 계속.”

“…정말 미쳤어.”

다시 내 품에 고개를 푹 묻어버린다. 조그맣고, 말랑하고, 오똑한 코가 가슴에 닿는다. 몇 번이나 안았는데도 이런 사소한 것에 설레는 걸 보면, 앞뒤를 다 집어치우고 내가 에스테야에게 빠지긴 했나보다.

마녀들 중에는 권속을 데려온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다 기껏해야 관리직 계급 이하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간들 중에서 시종을 택한 것에 불과하겠지.

그런 시대다.

세상의 절반은 인간들의 ‘교회’가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마법사와 마녀의 ‘의회’가 차지하고 있다. 접경지역에서는 언제나 국지전이 펼쳐지고, 총포의 개발을 계기로 마법사들의 땅덩이는 점차 줄어가고 있다.

가시검 칼릭스는 이런 세상에서 인간을 위한 가장 끔찍한 악이 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설정상 의회측의 명문대학인 라스푸틴 칼리지의 졸업생은 바로 전장으로 내몰려 장교의 자원으로 활용된다.

이곳은 반쯤은 군사학교인 것이다. 그만큼, 상급생과 학생회의 권위는 강력하다.

이야.

다시 생각해보니까 정말 굶어죽을만한 소설을 쓰려고 했구나, 나는. 왜 편집부에서 말렸는지 알겠다.

“다들 주목!”

세드릭 기스테르의 목소리가 맨 앞에서 쩌렁하게 퍼졌다.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한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신입생들은 학생회 간부의 통솔에 따라 움직인다. 미리 편지가 갔겠지만, 라스푸틴 칼리지는 전원 기숙사제다. 모르는 놈은 없겠지?”

군중이 조용해졌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몸을 홱 돌려선, 해자 사이로 섬처럼 솟은 성벽들 사이에 놓인 다리로 향했다.

세드릭이 이끄는 신입 일행은 몇 개의 성벽 섬을 더 거쳐서, 마지막에서야 겨우 라스푸틴 칼리지, 달리 라스푸틴 요새라 불리우는 곳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요새와는 달랐다. 일단, 훨씬 거대했으니까. 내가 모티브로 잡아놓은 것이 호그와트였던만큼, 라스푸틴 칼리지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큰 성이자 요새였다.

학생회장이라면서, 세드릭은 우리를 기숙사 앞에 툭 떨구고 가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간부의 통솔이라는거야.

그 때였다. 주머니에 무언가가 부스럭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안 넣어놓은 줄 알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서운.”

에스테야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조그마한 손에는 쪽지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221호.

“아무래도 배정된 기숙사 통보인 거 같은데.”

“그런 거 같네.”

내 주머니의 쪽지에 적힌 번호도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경험이었다. 그 이유가 내 품의 벚꽃색 머리칼 미소녀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언제든 그 여자애를 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나는 그렇게 더할 나위 없는 기분으로 기숙사의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쾌적하네.”

나도 놀랐다. 대놓고 미움받는 포지션이라 돼지우리같은 곳을 주지 않았을까 좀 걱정되긴 했는데.

무엇보다 침대가 두 개가 아니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큼지막한 침대 하나.

그래, 이거지.

“그래서, 첫 수업은 언제야?”

하지만 나는 하나를 고려하지 못했다. 내가 세세하게 짜놓지 않은 설정은, 내 이상향을 따라간다는 사실을.

“글쎄?”

“…어?”

“라스푸틴 칼리지가 유명한 건 잘 가르치는 교수님들…같은 분이 있어서가 아니야. 누가 지식을 떠먹여줘? 알아서 배워야지. 여기는 그 어떤 것보다 잘 갖춰진 장서관을 가지고 있다고.”

“…교수가 있긴 해?”

“없어. 대신, 이곳의 장서관을 이용하는 마법사들은 모두 학생들의 질문에 답해줘야 할 의무가 생길 뿐이야.”

여기는 존나 개 쩔게 크고, 기숙사까지 갖고 있는 독학재수기숙사학원 같은 곳이었다.

*

마법은 유구한 전통이요, 이어져내려오는 지식의 결정이다.

마법사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았다. 역사와 전통이 짧은 마법사 가문은 오래된 명문가의 마법사의 앞에서 무릎꿇었고,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대의 비전이 몇 개요, 습득한 악마의 마법이 몇 가지인가.

그것들은 찬란한 지식의 묶음이다.

그렇기에 세드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여겼고, 학살자의 어린 핏줄 쯤은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게 내가 만들어놓은 페이크 최종보스, ‘기스테르의 결사자’ 세드릭의 설정이다.

결사자 세드릭은 발푸르기스 의회 내의 권력을 이용해 아르고스의 딸을 핍박하고, 유린하며, 소유하고, 끝내 가장 젊은 의장의 자리에 오른다.

주인공인 가시검은 끝내 결사자 세드릭을 죽이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렇게 힘 빠진 아버지를 그의 버려진 딸이 원망과 증오로 공격한다.

그러나 세상은 피해자가 합당한 보상을 받는 이상이 아니었고, 결국 가시검은 자신의 딸이었던 마녀를 죽이고 그 시체를 어깨에 인 채 총포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그레트헨 도시를 떠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내가 만들어놓은 플롯이었다.

이 시나리오에서 에스테야는 라스푸틴 칼리지에 입학하지 못한다. 아마 내가 아니었더라면 입학을 포기한 순간부터 세드릭의 손아귀에 떨어져 처참한 대우를 받으며 새장 속에 갇힌 채로 유린당했겠지.

그렇기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단조로운 마법의 패턴이 결국 가시검에게 일격을 허용하게 되어버렸다고 내가 썼으니까. 그러니 그녀를 내가 살리고 싶다면 그녀에게 최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장서관에 도착한 우리 근처를 뱅뱅 도는 저 금발머리 개새끼가 너무나도 신경쓰였다.

녀석은 결국 에스테야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거라도 있나?”

대답 대신 시원하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려고 했는데, 에스테야가 내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얹었다.

하지 말라는 뜻.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해결하겠다는데, 내가 나서서 초 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의회의 마법사들이든 인류교회의 귀족들이든 봉기한 식자층과 시민들이 휘두르는 혁명의 쇠지레 아래 죽어나가게 되어 있다.

둘 중 누가 이기든 세상은 민중의 시대로 결국 갈아엎어질 것이다.

인류교회가 준비하고 있는 대전쟁은 세상을 난세로 몰아갈테고, 넘쳐나는 무력과 부서진 세상은 이상을 꿈꾸는 혁명가들을 사회로 발딛게 만든다.

에스테야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해야만 했다.나와 그런 시대 또한 살아가야 할 테니까.

“없어요.”

내 품에서 울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세드릭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져갔다. 에스테야는 그가 보지 않는 방향으로 내 옷깃을 움켜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 나는 에스테야의 조그마한 손을 감싸쥐었다. 나의 역할은 이런 거다. 뒤에서 에스테야를 받쳐주고, 안아주는 것.

세드릭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전까지 모욕적인 태도로 일관적이던 녀석이 왜 그러는지, 창조주인 나도 잘 모르겠….

아니.

알았다.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몰려왔다. 그런 게 꼴린답시고 썼던 내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세드릭이 에스테야를 새장 속에 가둬둔 이유는 하나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하기 싫어도 이가 갈아물렸다. 나는 에스테야를 끌어안고, 그의 검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아, 저 눈. 뽑아버리고 싶다.

탐욕과 욕정이 어린 눈으로 에스테야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인데.

“화인이 마녀로 화하게 된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이다. 본인의 동의만 있다면 필요한 기한 동안 가문에서 편의를 제공하며 다소의 협조를 구해볼 생각인—.”

다소의 협조? 편의를 제공?

거대한 새장 안에 가둬놓고 강간하는게 편의를 제공하고 다소의 협조를 구하는 짓이냐?

그 때, 에스테야가 내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내가 대체 왜인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나와 입술을 포갠다. 가벼운 입맞춤이 끝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세드릭. 저는 이렇게 멀리 나온 적이 없어서 지치네요.”

그 다음 말은 나나 세드릭이나 예상할 수 있었다. 세드릭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고, 나는 승리자답게 미소를 지었다.

새끼.

그러게 처음부터 회유책을 썼어야지.

돈줄 끊어놓고 이제와서 꼬리를 쳐? 에라이, 씨발. 그 꼬리를 잡아다 뒷구멍에 박아줘버릴까보다.

“…아무래도 권속과 방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은데. 좋은 하루 되세요, 학생회장.”

에스테야는 비록 말끝이 떨리긴 했지만, 확실히 당차게 세드릭을 까곤 내 팔을 끌어안았다.

장서관 밖으로 나가는 우리의 뒤통수에 녀석의 따끔한 눈빛이 꽂힌다.

“에스테야.”

“왜. 이런 모습은 취향 아니야?”

에스테야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반쯤은 농담이고, 반쯤은 진짜 걱정이다.

“방으로 돌아가면 예뻐해줄게. 그럼 됐지?”

“아, 아니…. 나 진짜 죽어…?”

“안 죽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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