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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마녀, 에스테야-15화 (15/42)

〈 15화 〉 진짜 입학준비 (2)

* * *

014. 진짜 입학준비 (2)

태어나서 한국의 국경선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나는, 이런 입학 준비 절차가 매우 생소했다. 에스테야는 나에게 차분하고 적절하게 지시를 내렸고, 나는 그녀의 가방 안에 에스테야의 옷과 내 옷을 개어 집어넣었다.

“…아니, 옷을 너무 잘 개는 거 아냐?”

에스테야의 눈이 동그래졌다.

“군대 갔다 오면 다….”

“…군대? 너, 군인이었어?”

놀라 깜박거리는 분홍색 눈. 아, 군인이긴 했지. 군인이긴 했…는데. 아니, 뭘 그렇게 동경의 눈으로 보는거야?

“원래 내가 있던 세상에서는 남자는 다 군대 가.”

“…다?”

“그래.”

나에게 에스테야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건 제법 뿌듯하고도 만족스러운 일이다. 좀 더 철저하게 각을 잡아 옷을 개곤, 마치 테트리스라도 하듯 여행가방 안에 착착 집어넣었다.

“…나보다 잘해. 왠지 분해.”

에스테야는 아무래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 같다.

“좀 가만히 앉아있어, 에스테야. 허리도 성하지 않으면서.”

“…성하지 않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다시 삐죽 튀어나온 입술. 나는 가방을 싸다 말고, 에스테야의 발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에스테야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저항 없이 내 품에 안겨줬다.

“자꾸 귀엽게 그럴거야?”

“…너 왠지 불안하다?”

아니.

누굴 욕정에 미친 짐승새끼로 아…알 만 하지. 그럼. 그럴 만 하지.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이번엔 아니거든.”

“그럼 뭔…흡.”

에스테야의 턱을 끌어당겨선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맞췄다.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너, 좀…능숙해.”

“누구랑 달리 나는 여자를 몇 번 사귀어봤거든.”

“…뭐?”

에스테야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럼, 막…그 여자들이랑 막…나랑 하는 그….”

“섹스도 했냐고?”

“그, 그래! 그, 그, 그거!”

지금 질투하는거야? 뒤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날아와선 지 곁에만 붙어있는 나한테?

“빠, 빨리 대답해, 차서운. 이건 중요한 일이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에스테야는…나에게 처녀를 빼앗기긴 했다. 내가 그의 첫 남자였겠지.

아닐 수도 있나? 아, 아니겠구나.

그녀와 사귀어 줄 마법사가 어디있어. 가시검 칼릭스의 딸자식인데.

“…그렇긴 한데.”

순식간에 에스테야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왈칵 고였다.

아니, 아니…왜 우는데….

“…에스테야?”

“…나만, 나만 너뿐이었던거야?”

에스테야가 내 멱살을 잡았다. 멱살을 잡고 흔드는데…흔들리는 게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체격 차이 때문에.

“나만! 나만 막…!”

대충 무슨 기분인지 알 거 같다. 두근두근 설레는 첫날밤을 보냈는데 나만 동정이었다…같은 그런 기분인가. 이것도 일종의 배신감으로 볼…수 있나?

“…에스테야.”

“왜! 으으…으….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아…. 나, 나, 많이 막 그…미숙했어…? 나랑 하는 거 싫진 않았어…?”

아니.

걱정하는 게 그거야?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없이 귀여웠다. 내가 그렇게 자기를 붙잡고 몇 번이나 덮치고 탐했으면, 그게 싫어서였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정상 아닌가?

“…나랑, 의무감에 한…건 아니지?”

“…내가 널 사랑하지만, 에스테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스테야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지레 겁먹은 에스테야가 딸꾹질을 해 대며 내 손등을 다시 꼭 잡는다.

“너 지금 헛소리한다.”

슥,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에스테야가 점점 뒤로 누웠다. 나에게서 피하려던 거겠지만, 결국에는 바닥에 등을 붙인 채로 내게 위를 내주고 말았다.

“…차서운?”

“지금 당장 증명해줄까? 의무감 따위 말고 내가 널 욕정하고 있다는 거?”

“…말을 해도, 막…욕정한다고 해, 어떻게.”

에스테야가 입술을 다시 삐죽 내밀었다. 뾰로통하게 부푼 뺨을 가벼운 키스로 가라앉혀주곤, 다시 그녀를 일으켰다.

“그러니까 좀 이상한 걱정 그만해, 에스테야.”

“…알았어.”

마지막으로 이미 개어진 양말들을 가방 안에 집어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테야를 답삭 안아들곤 침대로 간다.

“잠깐?”

“아니, 내가 침대로만 가면 다 그런 생각이야, 에스테야?”

“…아닌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건….

그건 시발 부정할 수가 없네. 내 업보다.

“그런게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물어봐라.”

”…왜 마법 써서 안 갰어?”

아.

시발.

맞다.

*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에스테야 체라서스는 무사히 기숙사의 입사를 인정받았고, 다행스럽게도 고유권속의 존재를 소명해 나와 같은 방에 배정받았다.

기숙사는 기본이 2인실이다.

그녀가 다른 마녀나 마법사와 같은 방에 입실한다? 생각만 해도 싫었다. 나에게 변치 않는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NTR은 사도라는 것이다.

솔직히 생전에 NTR 소설을 한 번도 본 적 없다곤 말 못하겠지만…소설 속 텍스트 더미가 주인공 말고 딴 놈이랑 하는 거하고, 내 품에 안겨서 곱게 울던 실재하는 미소녀가 딴 놈한테 박히는 건 정신적인 충격이 규모 면에서 다르다.

절대로.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

“다 챙겼어, 서운?”

“어? 어.”

나와 에스테야는 일주일간 제법 신혼처럼 지내면서 몇 가지의 규칙을 만들었다. 어쨌든 대학은 우리의 오두막과는 달리 공공장소다. 나와 손을 잡거나, 스킨십을 할 때마다 에스테야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면 조금 곤란했다.

해결책은 장갑이었다.

“…이런 장갑을 끼고 있으니까 좀 조폭같기도 하고.”

내가 중얼거리자 에스테야가 쏘아붙였다.

“하얀 장갑은 싫다며. 그건 또 집사같다고.”

“그것도 그런데, 너무 때가 탄단 말이지.”

에스테야는 한 번 손가락을 딱 튕겨서 가방을 마법으로 들어올렸다. 나보다 훨신 정교하다.

하기사, 안다고 해서 다 할 수 있었으면 세상사 맘대로 안 돌아가는게 없었겠지.

“근데 있잖아.”

나를 돌아보는 모습은, 언제나처럼 아름답다.

“너, 그렇게 있으니까 좀…멋있어. 진짜 악마 같아.”

그거야.

네가 나한테 정장과 코트를 쫙 빼 입혔으니까 그렇지.

*

안타깝게도 카트를 끌고 9번 승강장과 10번 승강장 사이의 세 번째 기둥에 들이박는 귀중한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긴 애시당초에 마법의 세상이고, 기차 또한 킹스 크로스 역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니까.

물론 다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말포이가 위즐리를 보는 것만도 못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에스테야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또다른 날달걀이 날아온다면, 녀석의 달걀을 터트려주리라.

여자면 어떡하지?

이번에야말로 남녀평등권이겠지.

그 때, 저 멀리서 너무나도 눈에 띄는 시뻘건 머리카락이 보였다.

세레니아 아드로프다.

“…읏.”

에스테야는 불편한 게 싫었는지, 잽싸게 내 품으로 몸을 숨겼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나부터가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지라…눈에 안 띌 수 없다는 거였다.

세레니아는 이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쓸데없이 젖만 큰 년 같으니라고….

“어이!”

낭랑한 목소리가 쫙 뻗는다. 사람들의 이목이 또다시 우리 셋에게 집중되었다.

저 썅년이 진짜?

“거기 그….”

나는 세레니아의 말을 중간에 끊고 끼어들었다.

“야.”

“…에?”

권속에게 말을 끊길 줄은 몰랐는지, 세레니아의 입에서 순간 조금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적당히 하고 꺼져라.”

주변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저번 거리 한가운데에서 세레니아가 당했던 창피 때문일거다.

이번의 비웃음은 에스테야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우롱해?”

대가리에 우동사리밖에 안 찬 건지, 빨간 머리 젖큰년이 다시 불꽃을 오른팔에 줄기줄기 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에스테야.”

“…응.”

“이번에는 가만히 있어.”

조그맣게 에스테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에스테야를 뒤로 밀어두고는, 장갑을 벗으며 느긋하게 세레니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를 띄고 있었다.

“하! 이번에는 너냐? 저번처럼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

“말이 많네.”

알고 있는가.

젖가슴이 지나치게 크면, 결국 오래 지나지 않아 인대가 너덜너덜해져서 가슴이 쳐지게 되어있다.

흔히 할미젖이라고 하는게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벗은 장갑을 오른손에 꾹 쥐곤, 전력으로 세레니아에게 집어던졌다.

팡!

경쾌한 소리가 역사에 퍼진다. 세레니아의 뺨을, 장갑이 후려치는 소리다.

“이번에 결투를 신청하는 쪽은 나다.”

“…너.”

세레니아의 시뻘건 눈빛에 나를 향한 증오가 깃들었다.

“죽여버릴거야.”

화염의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안타깝게도, 나는 진정한 악마였던 ‘시린 어둠’ 니싱겐의 마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 또한 내 설정이었으므로.

손끝에서 새까만 벼락이 번쩍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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