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의 마녀, 에스테야-14화 (14/42)

〈 14화 〉 진짜 입학준비 (1)

* * *

013. 진짜 입학준비 (1)

에스테야의 눈총이 따갑다. 솔직히, 나의 잘못을 인정한다.

“…에스테야?

“말 걸지 마.”

긴 잠에서 깨어난 에스테야는, 내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한참동안이나 울음을 터트렸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며 나를 몇 대나 때리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며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난, 조용히 에스테야의 아랫배를 어루만졌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차서운.”

내 성을 기어코 물어내 알아낸 그녀였다. 앞으로는 화가 날 때 성을 붙여 부르겠다는 엄포와 함께.

“어?”

“너 진짜…짐승이야?”

그 말을 하면서도, 에스테야의 다리 사이로 다시금 정액이 주륵 흘렀다. 내가 밤새 그녀를 껴안은 덕택이다.

“하, 흐으, 씨…아직도….”

그래서 솔직히 무섭지는 않았다.

옷이 더럽혀질까봐 네글리제 하나만 겨우 입고 속옷도 못 갖춘 여자애가 날 좀 쏘아본다고 공포가 들진 않는다.

“…나 못하겠으니까, 네가 내 가방 좀 싸.”

에스테야는 결국 일을 내팽개쳤다. 울먹이며 화장실로 달려가는 그녀를, 나는 끌어안아 제지했다.

“놔.”

“싫어.”

“놔, 차서운. 나, 진짜, 너…또, 또 그러면 자, 자살해버릴거야. 진짜로. 진짜로 죽어버릴거라고!”

에스테야가 품 안에서 몸부림쳤다. 물론, 그래봐야 다리가 다 풀릴 정도로 어젯밤 박히고 또 박혀서 앙탈에 불과했지만…이번에,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쾌락이 아니었다.

그건 부서진 자존감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절망의 눈물이었다.

미안했다.

“…죽지 마.”

두려웠다.

“…차서운?”

”제발, 죽지 마.”

이 조그마한 여자애가 손에 마법을 둘러도, 나를 처음 소환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는데.

나는 그녀를 품 깊이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무언가가 나의 버튼을 눌렀다.

“…죽지 마, 에스테야.”

나 또한 아무도 없었다.

에스테야에게 그 어떤 인간관계도 남기지 않은 것은 부주의한 작가인 내 탓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나 또한 에스테야에게 나의 현실을 반영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곁에 없는 사람.

세상으로부터 밀쳐진 사람.

놀랍게도, 에스테야의 조그마한 손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비어있는 설정은 나의 이상향으로 채워진다. 가설은 옳았다. 에스테야는…내가 영원히 갈구하고, 절대 없을거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왜 나를 용서하지?

대체 무엇 때문에?

“…자살한다고 한 건 미안해.”

에스테야의 가냘픈 팔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채로 맺혀 있다.

“그치만…너무 힘들어. 나, 서운이랑 이렇게…살고 싶지는 않아. 어차피 너랑 나는 이제 함께해야 하잖아. 그러니까…조금만. 응? 조금만….”

그녀의 조그마한 이마가 내 가슴께에 닿았다.

“…조금만 봐주라.”

*

“죽지 마, 에스테야.”

그의 그 한 마디 말이 왜 내 가슴을 울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신비일테지.

그 한 마디에서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비록, 그가 밤마다 나를 탐하고 내가 몇 번이고 까무러치게 만들긴 했지만…그래. 사실, 그건 내 탓이기도 했다.

멀쩡하게 영면의 편안함을 누리던 영혼을 억지로 끌고와서는, 내가 먼저 궁금하다면서 덤벼들었으니까.

어찌보면 그는 피해자다.

차서운을 끌어들인 건 나, 에스테야 체라서스다.

섭리를 읽고 비트는 마녀의 이름을 지녔다면, 벚꽃으로서 그것을 책임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그가 싫지 않기도 했다. 너무 짙은 동질감이 느껴져서.

아무도 곁에 있지 않은 차갑고도 서늘한 공허함.

그게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느껴졌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붙이자, 더 차갑게 나의 명치 어림을 찔러온다.

그의 공허다. 그의 슬픔이다. 그의 외로움이다.

어쩌면, 나의 주문은 나와 비슷한 본질을 지닌 영혼을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섭리에 아무거나는 없고, 내가 아무리 무작위로 영혼을 불러온다 하더라도…영혼의 이끌림이 작용하기 마련이겠지.

그가 나를 아끼는 건 필연적일터다. 내가 그의 육신을 그리 만들었으니, 그가 나를 욕정하는 것 또한 필연적이다.

그리고…내가 그를 아끼게 되는 것 또한 필연적이겠지.

“…자살한다고 한 건 미안해.”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샛노란 야수의 눈. 내가 좋다고 그렇게 만들어놨으면서, 내가 무섭다고 지금까지 울고 있었구나.

“그치만…너무 힘들어. 나, 서운이랑 이렇게…살고 싶지는 않아. 어차피 너랑 나는 이제 함께해야 하잖아. 그러니까…조금만. 응? 조금만….”

그 다음 말을 쉽사리 꺼내기 힘들었다.

뭐라고 하지? 조금만 덜 박아줘? 조금만 덜 괴롭혀 줘? 조금만 덜 섹스하자?

아니야.

너무…너무 수치스러워.

붉어진 얼굴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의 가슴께에 이마를 찧었을 무렵, 머릿속에 적당한 말이 떠올랐다.

“…조금만 봐주라.”

*

나와 에스테야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연인도 아니고, 섹파도 아니다. 섹파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이다. 그 시작은 그녀의 일방적 선언이었고, 지금까지의 과정은 나의 일방적 겁탈에 가까웠다.

조금만 봐달라는 말이 그래서 더 와닿는다.

옛말에 몸정이 맘정된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겪는 일들이 적당한 사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엽사 찬가 속 내가 만들어놓은 ‘데미안 아르고스의 딸’은, 분명 한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에스테야처럼.

그리고 나처럼.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이 세상의 육신으로 전생했을 때, 나는 황당했다. 그 다음에는 1차원적인 눈앞의 쾌락에 만족했다. 사실, 지금 나도 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봐야, 내 몸은 그녀를 달아오르게 하고…그 모습을 보면 나는 절제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속마음을 터놓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차이가 크다. 그것이 겁탈과 연애의 사이를 가른다.

“…노력해볼게.”

장담은 하지 못하겠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사리사욕에 거짓을 고할 때가 없었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그녀에게만큼은 솔직해질 것이다.

“…노력해줄거야?”

에스테야의 입술이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입술을 깨물었겠구나. 나에게 박히는 내내, 밤새 입술을 깨물었겠구나.

나는 그녀에게 해 본 적 없었던 달콤하고도 보드라운 입맞춤으로 그 아픔을 달랬다.

그리고 속삭였다.

“최대한.”

“…좋아. 나도 노력해볼게.”

무엇을 노력한다는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스테야가 조그마한 손을 올려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나 또한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서운.”

에스테야가 마치…내가 그녀를 부르듯 나를 불렀다.

“응.”

“네 외로움. 내가 달래줄 수 있게. 노력해볼게.”

그녀의 조그마한 머리 주변, 내가 뜯어먹었던 화관의 자국이 참혹했다.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으스러진 자국이 났던 꽃잎들을 하나 하나 떼어내주었다.

그리곤, 에스테야의 손에 쥐여주었다.

“…내가 외롭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 질문에 에스테야는 말 대신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곤, 느릿하게 자기 아랫배에 새겨진 각인에 얹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다시 움찔거리며 떤다.

“…느껴져.”

에스테야가 나를 올려다본다.

“이런 말 하긴 진짜 싫지만…이걸로, 우린 이어져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아직 그녀의 고유권속인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나는 가만히 에스테야를 끌어안곤, 그 자그마한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되도록이면 자제할 것이다.

이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여자애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곧 다가올 거대한 위협으로부터…에스테야를 마지막까지 지켜낼 것이다. 그건 내가 만든 위협이었으니까.

딸마저도 찢어죽이려는 광기의 마녀사냥꾼, 가시검 칼릭스. 내가 설정하기로, 그녀가 딸을 마녀로 만든 이유는 하나였다. 갈래갈래 찢어 해부해서 그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그건 내가 만든 위협이다. 에스테야가 그 꼴을 당하게 둘 순 없다.

악마의 육신을 타고났고, 이 세계의 마법관을 창시한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그 원리와 본질 또한 꿰뚫었다.

에스테야는 내 것이다.

하지만, 가시검은…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악랄하고 교묘할지 몰랐다. 나는 그를 설정해두기만 했지, 제대로 된 그 이후의 행적을 쓰진 않았으니까.

말하길,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밤의 살인마’.

설정이 그대로 재현된다면 나조차도 방심할 수 없다.

“…이제 정말 준비하자. 우리, 일 주일 뒤에는 출발해야 해. 에스독 거리 구석의 허클베리 스퀘어 역에 기차가 온단 말이야.”

에스테야가 내 품에서 꼼지락거렸고, 나는 그녀에게 사죄의 의미로 뭐라도 하기로 결심했다.

“가만히 있어.”

“…뭐?”

“아까, 네가 나보고 가방 싸라며?”

눈을 도로록 옆으로 굴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거 참, 이런 애를…어떻게 괴롭히나 싶으면서도 욕망이 뇌를 지배하는지 꾸역꾸역 울려대는 내 자신이 많이 쓰레기같긴 하다.

“…그렇긴 했지만.”

“내가 다 싸 줄게.”

“…정말?”

그녀의 분홍색 예쁜 눈이 반짝인다. 그 뺨에 흐르는 눈물을 엄지로 슥 밀어 닦아주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대신, 내가 사라고 했던 속옷도 챙긴다?”

어느새 장난기를 되찾은 내 농담에, 에스테야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채, 챙기든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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