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서큐버스-67화 (67/80)

〈 67화 〉 다크 솔저

* * *

“크루시아, 니임……!”

갈레인의 공허한 음성이 울렸다.

좌중의 시선은 돌연 현장에 나타난 여성에 압도되었다.

금색 쌍각에 황갈색 중단발머리. 보랏빛 눈동자에 연녹빛 피부.

크루시아 녹스 아테르 리스타엔 메르케니샤.

제8군단 칠흑의 절규의 8만 5천 마전사들을 이끄는 군단장.

“후우.”

지긋이 눈을 내리감은 마족 여성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공터의 여기저기에 그림자로 구현되었던 마물들과 마수들의 두부들이 일제히 형체를 흐트렸다.

크루시아는 나와 갈레인이 충돌하기 직전의 사이로 걸어와 몸으로 가로막고 섰다.

“음…….”

최대한 억제하고 있어도, 결코 감출 수 없게 감도는 묵직한 마력의 잔향.

현재 나와 갈레인이 진입한 적혈급보다 드높은 칠흑급의 영역.

마왕군 20개 군단들을 이끄는 군단장들의 최소 자격 요건.

휘하의 부군단장, 전사장들 역시 모두가 최소한 칠흑급.

마강계는 마왕군의 13계급제와는 다른 고유한 5등급제로 마전사들의 순수한 자질을 분류.

특급전사. 상급전사. 중급전사. 하급전사. 준전사.

특급전사는 재해급 이상. 상급전사는 칠흑급. 중급전사는 적혈급. 하급전사는 암영급. 준전사는 투귀급.

마왕군은 군단장, 부군단장, 전사장 전원이 최소 칠흑급 이상으로, 투귀급들인 준전사들과 암영급들인 하급전사들로 이루어진 통상적인 마족들과는 완벽히 궤를 달리한다.

이론적으로는, 나와 갈레인이 연합을 이루어 초당 종분열을 펼치며 협공을 가해도 일격에 전원이 소멸할 격차를 지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같은 마강계의 영역이라도 갓 진입한 자와, 진입하고 수백 년이 되는 자와, 다음 단계의 진입을 앞두는 자도 터무니없이 거대한 격차가 난다.

나는 의지와 관계없이 육체와 정신을 압박하는 강렬한 무형의 파장에 혀를 내둘렀다.

잠시 버텨 볼까 했지만, 역시 급이 다르다.

나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암흑에 임하시기를. 이 몸의 마혈은 이 심장에 어둡고도 깊게 타오르니. 마의 세계의 적법한 신민이자 잔혹한 낙원의 거주민이 되는 자가, 강인하고도 우아하신 제8군단 칠흑의 절규의 군단장님께 진심과 신실의 인사를 바칩니다.”

나는 움켜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심장에 그러모았다.

전생의 옛날 중국의 포권을 명치에 맞붙인 듯한 자세.

팔목들이 지면으로부터 정확한 수평을 이루는 것이 관건이다.

마왕군의 하급자가 상급자에 바치는 최대의 예우이자 정식의 군례.

마석화의 해제와 함께 나의 전신으로부터 탈피하듯이 벗겨지는 마석편이 찬란한 빛무리처럼 흩날렸다.

전반적인 전투의 종료와 함께, 주변의 대기와 지상으로 흩뿌려진 마석 조각들이 빛나는 결정이 되어 화했다.

애초 나의 마력으로 형상화된 재질들이기에, 지속적인 마력의 주입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영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소멸.

당연히 채산성도 없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크루시아가 나와 동일한 자세를 취했다.

“암흑에 임하기를. 이 몸은 제5마군도 굴라의 마성 하나와 마요새 셋과 마도시 여섯과 마촌 열둘의 영지를 적법하게 지배하는 전율스럽고도 패악스러운 백작위의 마귀족! 이 몸의 영지에는 분쇄되는 육편과 범람하는 유혈이 넘쳐나는 원색의 공포와 원초의 절규뿐이다! 흐아아아아! 칠흑희! 참살성! 열속마탄! 주천사 포식자! 블랙 베히모스 슬레이어! 기타 열 개를 포함한 도합 열다섯 개의 창암하고도 장대한 이명들의 보유자다! 하아아아아! 그득히 검고도 심대한 붉음이라! 이 마신의 잔혹한 화원와도 같은 세계에, 이슬라트와 블리엘과 슬레인의 원천으로부터 마성에 미칠 축복에 가까운 저주가 있기를! …통상적인 군단장들은, 이런 미사여구를 난잡하게 수식하며 자신을 최대한 거창하게 소개하겠지만.”

열혈적으로 장대한 일갈을 터뜨리던 크루시아가 뭔가 제풀에 질린 듯이 눈을 감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이 몸은 크루시아다. 그로 족하니 단지 그뿐이다.”

오연히 발언한 마백작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행위가 멋쩍은 것처럼 가슴에 슬쩍 팔짱까지 꼬았다.

볼륨이랄 것도 없이 감처럼 미약한 융기.

“…….”

바위처럼 굳어 버린 갈레인이 입을 떡 벌리고 그야말로 멍하게 크루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

“네놈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것이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크루시아가 카랑한 어투로 일렀다.

“전투를 중단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더냐? 저 자는 마왕군이 아니니 별수 없더라도, 네놈은 엄연한 지휘 체계하의 내게 속한 하급자 아니더냐? 이것은 상급자의 명령에 반하는 명백한 하극상 행위다. 그 기다란 귀를 찢어 주리? 그럼 귓구멍만 남은 곳에 소리가 보다 선명히 틀어박힐까?”

더욱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크루시아의 전신으로 미약한 마기마저 사납게 피어올랐다.

“…아니면, 이 몸과 싸우기로 정했느냐? 오늘 이 자리에서 나를 패사시키고, 군단장의 직위를 찬탈하기로 결단이라도 굳힌 참이냐? 자칭 차기 마왕? 유감스럽지만 그 꿈도 여기서 끝이겠구나.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나보다 정확한 535년의 마생 경험이 부족했다. 그것이 네놈의 패착.”

어쩐지 크루시아는 심히 저기압이었다.

“아, 아닙니다아!!! 칠흑! 복명!”

크루시아의 협박에 갈레인이 군례를 올려붙이며 황급히 기운을 갈무리했다.

공터의 일대에 맹포히 휘돌며 난폭히 감돌던 마기의 폭류가 가라앉아 간다.

끔찍한 박쥐인간과도 같은 면전인 안면골에 전반적인 수축이 일어난다.

다시 어지간한 서양의 영화배우 뺨치는 준수한 용모가 회복된다.

괴물에서 마족으로 돌아온 갈레인이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흉화를 거둔 갈레인이 크루시아에게 진심으로 복종했다.

“어이, 실화냐구.”

“제8군단의… 군단장!”

“지, 진짜야……? 저게?”

주변으로부터는 군단장이라는 초거물의 행차에 이끌린 마의 일족의 인파가 점차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함께 따라 나와 응원하던 다크 솔저 떨거지들은 명백한 사색에 물들어 있었다.

머리를 완전히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기에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흥.”

크루시아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저 팔짱을 끼고는 곁눈질로 슥 둘러볼 뿐이었다.

“이런, 씁….”

사이에 낀 나는 정말 새우등이 터지며 똥을 밟는 기분이 무엇인지 체감했다.

길드에 소재 매각을 위해 방문해서는 시비에 휘말리고 72악마교단의 일원을 독대했다.

카페에서는 마왕군들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마왕군 군단장과도 조우했다.

진짜 마가 꼈나?

운수가 억수로 안 좋은 날이라고 볼 수 밖에.

“빌어먹을….”

실수 하나만 해도 목이 날아간다.

나라는 존재가 오늘 여기에 있었다는 흔적이 말끔히 상실될 정도.

전생은 안 그랬겠냐만은, 마계에서는 안 될 것 같은 상대에게는 철저히 수그리는 게 그나마 오래 사는 길이다.

힘이 있으면 살고, 힘이 없으면 죽는다.

여기에서는 특히나 그 특성이 극대화된다.

철저한 강자존의 약육강식.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습니까?”

갈레인이 잠기기 직전의 목으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자신의 지목에 크루시아가 가느다랗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눈매에 깊게 드리워진 다크서클의 퇴폐적 미인.

앞이마에는 작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문신하고, 왼뺨에는 턱선까지 흐르는 뱀을 문신하고, 오른뺨에는 타오르는 불길을 문신한 마혈문.

시크한 눈자위와 가지런한 치열은 공통적으로 새하얗고, 검은 눈자위에 뾰족한 상어이빨인 마족의 전형이 아니다.

딱히 날개와 꼬리는 꺼내고 있지 않다.

“그대들이 땅에서 공방을 주고받고는,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하늘로 비상하는 때부터. 더한 유혈과 파괴의 욕구에 미쳐 날뛰기 전에, 친히 개입을 결단했노라.”

퇴폐적인 미모에, 아찔한 노출도의 미인으로부터 다소 허스키하고도 카랑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이곳 마군도에 결코 물질적 피해를 끼쳐서는 아니 되니까. 애초 우리 군단의 본진도 여기가 아닌 제5마군도기에. 그것을 잊었느냐?”

“아, 아닙니다….”

“안다는 녀석이 시내에서 흉화까지 하며 생사결의 사투를 저질러? 벌써 이 카페의 전방에 위치한 이곳 공터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네놈과 이 몸이 딛은 바닥의 포석들이 깨진 것을 보라구. 주변의 벽면들이 온통 갈라진 것이며. 상공에서는 서로 몸을 사리느라 결코 지상에 여파가 끼지지 않게 조절한 것 같다만, 여기는 이런 꼴이 되었다. 금일 발생한 이 물질적 피해들의 보상액은 죄다 제8군단장인 나의 이름으로 청구되겠군. 하급자를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말이야.”

“흐, 엇……!”

크루시아가 음산히 내깐 허스키 보이스로 혹독히 질책했다.

사자 앞에 놓인 생쥐의 형색이 된 갈레인이 쩔쩔맸다.

크루시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질러 버렸군…….”

이제서야 좀 주변의 형상이 인식된다.

애초 땅에서부터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지물들이 휘말려 배상금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하늘에서 겨뤘어야 했다.

갈레인도 그것을 알기에 전투 당시 원거리 계열의 공격들은 철저히 허공과 공중을 지향했다.

지상으로 쏘아진 것들은 나를 피격하지 못하고 지나치면 얼마 가지 않아 스스로 소멸하도록 유지력을 조절했다.

전투를 위해 살아가는 민족.

거주민들 사이의 싸움이 하도 빈번한 마계는, 건축법적으로 모든 합법적 건설이 허가된 건축물들에 최소 3위계 이상의 마력적 여파와 준하는 물리적 충격으로부터 버틸 수 있게, 건축물들의 내외부에 지물형 결계를 설치하는 마강공법을 필히 시행하는 법령을 지닌다.

건물의 중요성과 상징성과 의미성이 드높아질수록 시공에 요구되는 규격도 까다로우며 드높아진다.

나와 갈레인이 벌인 싸움의 스케일은 당시 헬유레이아의 하늘을 보고 있던 시민들이라면 이미 모두가 봤을 것.

서로가 3위계의 마력적 여파 및 준하는 물리적 충격은 거뜬히 뛰어넘기에, 시내에서 싸웠다면 도시 일부를 대파했을 스케일의 싸움을 펼쳤다.

나는 마왕군 소속은 아니지만, 갈레인은 적혈급 이상의 마투는 결코 시내에서 벌이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을 깨버린 셈이 되었다.

시내에서 마투를 벌인 당사자들은 분쟁의 원인을 떠나, 사유 재산 및 건축물과 신민의 생명에 가한 피해의 정도에 따라 극형은 물론이거니와 최대 참형까지 처해질 수 있다.

피가 끓어오르는 투혼에 취해 부린 객기.

나도, 녀석도. 화려하게 일탈을 저질러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가 있지……?”

분명 직접적인 시비는 녀석들이 먼저 건 상황이라도, 물질적인 피해는 내가 자이르를 카페의 창밖을 깨고 날림으로 먼저 초래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조금 뒤에 나타난 크루시아는 그걸 모르는 모양.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갈레인 패거리에 모조리 떠넘길 수 있을까?

여기서 즉각 도망치는 것 역시 고를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다.

결국 장사꾼인 나는 마음속 주판을 굴리며 골똘히 궁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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