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서큐버스-58화 (58/80)

〈 58화 〉 마족 길드

* * *

“5급 기준으로 체력 포션 150브리아, 마력 포션과 기력 포션은 모두 175브리아. 그게 우리가 취급하는 가격.”

나는 잠잠히 에우포리아의 가격대를 알렸다.

“시내의 다른 5급 연금술사들은 최소가 평균가인 200브리아는 받거나, 적게는 250에서 많게는 300까지도 후려치더라도, 300보다도 이상은 너무 나갔어. 여지껏 확실한 바가지를 쓰고 있었어.”

“그, 그런……!”

아비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완벽하게 멍한 얼굴, 생각보다 강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인이고 친근할수록 할인을 해주고 있다는 보장은 없어. 되려 알지 못하는 면에서 더욱 교묘히 이용하려 들 수도 있지. 특히나, 그게 마족이라면.”

“…….”

그녀가 바위와도 같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다른 색상의 눈망울들을 이리저리 굴려댄다.

깊은 생각에 빠져든 듯한 기색.

“몽환의 숲 루스카의 초입에 위치한 연금공방 에우포리아. 우리 공방을 들러…….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자금의 절약을 원한다면.”

그렇게 나는 명백한 의도성의 호객을 마무리했다.

“나에게…… 공방을 바꾸란 소리네?”

“뭐, 그거야 당신의 선택이겠지.”

나는 태연을 가장하며 개의치 않는다는 기색을 표했다.

이런 손님은 진국의 단골이 될 가능성이 드높다.

같은 업종이면서도, 정보를 알렸다는 호감으로.

청홍의 오드아이의 임프가, 신중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기우뚱댔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인데? 나, 혹시 여지껏 바가지 쓰고 있었던 걸까? 나의 253년밖에 되지 않는 짧디짧은 마생에서, 그래도 100년 이상은 족히 이용해 왔던 곳인데? 다른 곳에서 이렇게 후한 가격에는 결코 못 구한다며, 매번 사탕발림이 가득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정녕 여지껏 나를 속이고 있었단 말이야? 이제 끊어야 할 때가 온 걸까?”

“그건 자신이 정할 일이지.”

나는 건조하게 덧붙였다.

아비카가 두터운 청홍의 속눈썹이 좌우로 양분되는 눈매를 꾹 내리감았다.

“일단, 약속이니까 퀘스트는 수주해야겠지……. 그리고, 일이 끝난 뒤에는 왜 내게 그런 가격으로 판매했는지 물어야겠어. 아니, 다른 곳도 다 비슷한 가격으로 한다거나, 자신들의 포션은 같은 5급이라도 남다르다며 이런저런 변명을 덧붙이려나? 왜 동포의 패턴이 훤하게 보이는 걸까나……. 에휴, 그냥 하지 마…? 이걸로 잠잠한 작별…?”

나는 심히 혼란한 그녀에게 그저 지긋이 웃어 보였다.

이제 바람을 넣기는 이걸로 족하다.

이미 넘어온 듯하니까.

아비카가 주먹들로 옆구리를 짚으며 당차게 외쳤다.

“나! 지금부터 당신이 운영하는 공방에만 갈 거야! 새카만 장대비가 쏟아지는 주간의 악천후든, 시뻘건 핏줄기가 쏟아지는 야간의 광월야든! 이거 굳건한 마신님에 대한 맹세다!?”

“내가 운영한다는 표현은 심히 곤란해. 실제 공방주는 5급 연금술사인 리나 녹스 에파네 페를렌데. 나는 나의 적법한 여주인인 그녀를 거드는 조수일 뿐이야.”

나의 답변에 아비카가 진실을 파악했을 때보다 멍한 표정을 헤벌쭉 지었다.

“주, 인……?”

“사무적인 관계라고 생각해.”

나는 그녀의 순한 미모에 떠오른 의문에 해답했다.

함께 대화를 하고 있는 규리스도 의아했는지 다소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아비카가 자신이 개입할 일은 아니라 판단했는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대신 머리를 부여잡고는 성마른 비명을 내질렀다.

“규리스으! 호, 혹시! 다른 퀘스트들도 좀, 있어!? 나, 갑자기 자금에 엄청난 금전적 출혈을 입은 기분이야아! 가, 갑자기! 엄청 많은 퀘스트들을 뛰어야 할 것만 같은 느끼이이임! 낭비는 싫어하기에, 나름 돈은 저축했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다친 감각~!!!”

손등을 들춰 턱밑을 받친 규리스가 요사스럽게 웃었다.

“트호호호홋!!! 최근 심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어, 황급히 뛰어든 모험가들이 보이는 전형적 반응이네요! 볼 때마다 가관이라니까아안~! 기록 수정구로 영상을 남기고는, 시간이 날 때마다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어어~! 어맛!? 접수원이 이러면 안 되는데!? 죄송해욧! 트홋홋홋홋!!! 트홋홋홋홋!!!”

웃음을 참는다면서, 규리스가 더욱 실내가 떠나갈 듯한 박소를 터뜨려댔다.

그러고는 생각하는 눈동자로 검지를 넌지시 입술에 덧붙인다.

“으음~! 몸을 여럿으로 나누는 분신술을 펼치면 가능할지도요!? 아니면 자신의 본체로부터 소체들을 나누는 분열술을 사용하든가~!”

“나는 그런 건 불가능해~! 그런 능력의 일족들도 있다지만, 애초 그건 환술의 개념에 가깝잖아!? 임프는 오직 철저히 전투 특화라구!”

아비카가 호소하듯 접수대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애원했다.

눈매에 음산한 음영이 드리워진 규리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면, 지상에 나가 약탈을 하시는 건 어때요?”

“약탈?”

“네에~! 비단 길드의 마족 모험가들만이 아닌, 길드 바깥의 마족들도 원정단이라는 미명하에 왕왕 저지르는 짓들이요! 명목상과 표면적으로야 저희 길드는, 사회의 안전과 공익을 추구하는 조합이기에… 그런 한없이 사적인 목적의 행동을 추천하는 게 금지되었지만요? 트홋홋홋홋!!!”

“음, 저항할 힘도 없는 약자들을 건드리는 건 별로야. 최소한의 자신과 명예를 갖춘 강자들이라면 모를까?”

그윽하게 눈매를 아비카가 그닥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눈을 부릅뜬다.

“다만 강자들이라면!? 쓰러트리고 생명이고 영혼이고 금품이고 다 빼앗으면 흥겨울 듯하지만!? 아핫!”

미약한 투기마저 일순 발휘하는 아비카가 한쪽 팔뚝을 들춰 보였다.

짐승적인 뾰족한 송곳니들을 내보이며 순한 얼굴로 더없이 사납게 웃었다.

약자는 단지 성향상 거를 뿐, 강자들에 대해서는 폭발적인 도전욕과 잔혹한 살의.

역시 그녀도 결국 마족이었다.

“어머나아! 그런 취향이셨군요! 트홋홋홋홋!!!”

“응! 나 그런 취향이었어! 아핫핫핫핫!!!”

규리스와 아비카가 동시에 팔짱을 끼고 길드가 떠나가라 폭소를 터뜨렸다.

같은 스타일이나 다른 느낌의 두 보브컷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떠들썩하게 빗발쳤다.

중간에 낀 괜한 민망함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계의 길드는 중간계의 길드와 꽤나 판이한 성향을 지닌다.

주로 마군도의 마물들과 마수들의 개체수 억제 및 조절.

감시역의 소수 마족들과 폐마족들이 주로 배치되는 변경의 개척촌들에 출몰해, 남자 마족은 포식하고 여자 마족은 강간하는 야만마족들의 토벌.

중간계에서의 지상인들의 대부분의 주적은 마물들과 마수라지만, 마계에서의 마족들에게 마물들과 마수들이란, 원할 시에는 멋대로 부릴 수 있는 펫이자 이따금은 필요에 따라 줘패고 노는 샌드백들이다.

고로 중간계에서 마물들과 마수들에 품는 인식과는 제법 상이하다.

이상 증식한 마물들과 마수들이 커다란 위협이 되는 때가 있더라도, 마계는 중간계와는 색다른 인식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규리스처럼 마왕군에 입대해 마혈문을 지닌 경우가 아니라면, 결국 마계에서의 마물들과 마수들이란 마족들에 부려지는 장기말들에 불과하다.

탐욕의 적월의 주인장 그랄 역시 안면 대신 혓바닥에 마족의 문신을 새기고 있다.

“트홋홋홋홋!!! 만약 길드가! 정식으로 그런 퀘스트들을 발주한다면 다녀오시겠나요!?”

“아핫핫핫핫!!! 그래도 안 가! 나는 자신을 지킬 최소한의 힘조차 없는 약자들은 관심 없어!”

애초 마계의 길드는 중간계에서의 약탈 및 파괴 퀘스트들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거야 마족들이 자의적으로 저지르는 일들이고.

지상의 길드들에서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다 오기.’라는 퀘스트를 줄 리는 없지 않은가?

마족들이 중간계에 대해 인식하는 개념이란 딱 그 정도다.

이건 당연히 길드가 목적성을 가지고 내릴 법한 성질의 퀘스트들은 아니다.

지상에 나가 노니는 자들의 행위들이야 애초 한없는 일탈이자 유희에 가까우므로.

양측의 세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족들의 주적은 야만마족이니까…….”

구체적으로는 마족, 저악마, 악마들의 주적은, 변경의 야만마족들과 야생악마들이다.

현세의 마왕에 대치하며 정면으로 대적하는 존재, 야만마왕 불드라크의 보다 사악하고도 잔혹하게 어긋난 마의 일족.

마왕 루시퍼 치하의 마의 일족들로도 하여금, 전율과 충격에 휩싸이게 하는 존재들.

팔짱을 끼고 격렬히 어깨를 흔들며 폭소하던 아비카가 내게 눈길을 돌렸다.

“응? 갑자기 웬 야만마족?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을 때려잡는 퀘스트들은 없어?”

“으음~! 얼마까지만 해도 몇 개 있었던 것 같은데, 다 수주되어 버렸네요! 뜨기만 하면, 등급에 관계없이 살의들과 전의들에 활활 불타며 서로들 낚아채려 치열한 쟁탈전이 일어나니깐~!”

“아쉽네! 나는 이렇게 보여도, 야만마족들과 야생악마들과 꽤나 많이 싸워 봤거든! 물론 일시적인 파티 플레이였지만!”

“막상 아비카 씨도 제약이 크다고 파티에 가입하지는 않으으니깐! 지크 씨와 참으로 비슷하네요! 트호홋!”

역시 아비카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강자 수준인 것이다.

그녀의 전투법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녀에게 나지막한 통보를 날렸다.

“일단 지금 원하는 퀘스트는 양보할게. 나머지는 규리스와 잘 타협하며 알아서 찾아.”

“뭐……?”

한참 폭소를 터뜨리고는 투기를 거둔 아비카가 선한 눈매를 내게 흘렸다.

청과 홍이 좌우로 양단된 색상의 두터운 속눈썹이 서서히 치켜뜨인다.

“그, 그러고 보니……? 다들 뭔가 미묘하게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지? 대체, 어떻게?”

“음. 규리스의 지리 조사를 조금 도와주려 했거든. 나도 동시에 퀘스트를 병행하며.”

아비카의 오드아이가 뽑혀 나올 듯이 크게 부릅뜨였다.

“뭐, 뭐!? 원래 당신이 하려던 거였어?”

“아직 도장 안 찍었으니까 상관없어.”

아비카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양손으로 맞쥐고는 나와 규리스를 번갈아 훑었다.

“그, 그으……!”

도저히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이, 방황의 눈짓과 몸짓으로 처량하게 헤맨다.

“네에……. 정말로 괜찮은 거잖아요. 지크 씨가 저렇게 양보하신다면야.”

팔짱을 끼고 옅게 미소 짓는 규리스의 양눈과 여섯 홑눈들이 어쩐지 다소 힘없이 깜빡였다.

내심 기대하고 있던 걸까?

겹친 손가락들을 정신없이 꼼지락거리며 쭈뼛대는 아비카가 힘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저, 정말로…… 괜찮은 거야?”

“상관없대두. 가져가. 진짜 목이 마른 사람부터 우물물을 마셔야지.”

접수대에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고 있던 나는 눈을 감으며 지긋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가운데에서 화사히 웃는 규리스가 들춘 양손을 뺨에서 맞잡았다.

“그럼! 지금의 퀘스트는 아비카 씨가 가져가는 거예요~!? 그렇게 진행합니당!?”

규리스가 즉각 오른팔을 놀려 접수대에 놓인 무언가를 붙잡았다.

박력적인 바스트의 모핑을 자아내며, 첨단에 검붉은 결정석이 박혀 희미한 빛을 흩뿌리는 큼직한 도장을 번쩍 들춘다.

콰앙! 접수원의 인장이 의뢰서를 내찍는 소리가 울렸다.

여파에 휘말린 접수대의 몇몇 종이짝들이 청승맞게 흩날렸다.

의뢰서 중앙에 찍힌 도장을 따라, 검붉게 발광하는 선명한 적광이 돌연 피어나 양피지의 테두리를 야금야금 잠식하듯 휩싸기 시작한다.

도장으로부터 내달리는 회로처럼 발생하는 빛줄기가 몇 번이나 휘돌며 에워싼다.

길드의 접수를 담당하는 접수원 장본인의 마혈을 응고한 마혈석을 매개체로서, 본격적인 퀘스트의 발령을 선포하는 권한을 지닌 접수원의 인장.

접수원과 모험가의 동의에 의해 찍힌 순간부터 본격적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모험가 역시 자신의 짜낸 핏방울을 도장에 떨어트림으로써, 접수원과 모험가 사이의 마혈의 맹약으로 굳게 체결된다.

담당 접수원이 바뀌어도, 솔로 혹은 파티 리더일 모험가의 피가 계약에 대한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위조된 의뢰서로 퀘스트를 스틸하려는 시도나, 해당 모험가를 배제하고 대신 퀘스트를 낚아챈 행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된다.

여러 다양한 마술적 편의로써의 활용.

“으, 음…….”

아비카가 가파르게 떨리는 눈매로 입술을 달싹댔다.

이윽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의 건틀렛을 풀고, 내부에 추가적으로 낀 글러브까지 벗는다.

뽀얀 보랏빛의 톤이 미약하게 가미되었을 뿐인 피부색.

한없이 곱고 가녀린 여성의 섬섬옥수이나, 권면에는 두툼한 골질이 발달된 무투가의 상징을 증명하고 있었다.

모든 손톱들을 줄이고 있던 손에서 엄지손톱만을 슬쩍 늘려 검지의 지문 부위를 딴다.

핏방울이 맺혀 흐르려는 검지를 접수대 너머의 규리스가 들춘 의뢰서에 내뻗었다.

아비카의 핏방울이 떨어지자마자 규리스에 의해 가해진 것과 비슷한 여파가 자아내진다.

검붉은 섬광이 양피지의 테두리를 몇 번이나 휘감자, 종이짝의 색상 자체가 아예 검붉게 변색되어 버렸다.

두 마신의 피조물들 사이에, 서로가 목적성을 띄었던 계약의 체결이 완료된 증명.

서로의 임무가 완료되자, 양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운 규리스가 화사한 희소를 머금었다.

“끄읕~! 퀘스트 수주! 축하! 축하아! 축하드려요!? 아비카 씨!? 아니, 이게 축하까지 할 일이려나……? 흐음.”

여덟 핑크빛 홍채를 깜빡대는 규리스가 검지로 입술을 짚고 의문의 수렁에 빠지는 속에, 아비카가 더없이 깊게 가라앉은 눈길을 나에게 흘렸다.

오른손의 검지에 발생한 열상을 재생술로 순식간에 말끔히 봉합하며, 왼손을 놀려 글러브와 건틀렛을 주섬주섬 재착용하며 다소곳하게 속삭였다.

“좋은 가격대의 공방을 알려 준 것도 모자라서…… 본래는, 당신들이 진행하려던 퀘스트의 양보까지…….”

단정하게 자른 보브컷에 청홍의 커다란 오드아이가 실로 선량한 인상, 여무투가 임프가 다가온 것은 순간이었다.

“……정말, 고마워.”

일순간 진한 향기가 훅 와닿았다.

나의 양어깨를 자신의 양손으로 굳게 움켜쥔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이마를 바짝 맞붙였기 때문이다.

5종 이상의 향초들로부터 추출된 혼합 아로마를 사용한 감미로운 향내와, 젊은 여자 특유의 새콤한 살내음.

그녀의 머릿결만큼이나, 좌우가 청홍으로 정확하게 양분되는 두터운 속눈썹이 내리감겨 파르르 떨린다.

천사처럼 선량한 미모의 임프가 짙은 보랏빛의 고운 입술을 달싹댔다.

“강인하기에 아름답고, 강건하기에 빛나는 그대여…. 나와 우리를 구성하는 마신의 핏방울이, 그대의 신념과 혼백에 굳게 깃들기를. 이곳 지옥의 땅의 가혹하고도 처참한 환경도, 결코 그대의 존재를 침탈하지 못하리라. 그대가 그것들보다도 굳건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밀림의 맹독충들의 잔악한 독침들이 쑤셔지더라도, 마사막의 쇠마저 녹일 초열풍이 불어닥치더라도, 마설원의 성채조차 쓰러트릴 극한풍이 찢어발기더라도, 어떠한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그대를 범접할 수 없다. 우리의 가호와 기도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니…….”

약 30초 정도의 축복을 마친 그녀가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감미로운 향기도 자연히 멀어졌다.

이마에 맞붙었던 잔잔한 온기가 남았다.

아비카가 그윽하게 내리감았던 눈매를 곱게 떴다.

“마신의 핏방울의 제6번째 핏줄기. 우리 일족의 축언이야. 마경에 수렵이나 대범람의 조절을 위해 나가는 전사들은, 과연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기에… 이렇게 전사의 안위를 기도하는 풍습이 정착하게 되었지. 당신에게 만물의 마종을 주관하는 가장 어둡고도 깊은 권세를 갖추고, 지고하고도 지대하기에 무구한 마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랄게.”

나의 양어깨를 붙든 그녀가 손들마저 거뒀다.

철갑의 손가락들 사이에 끼워져 있어 정확한 촉감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련한 감정으로 떨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다시 눈높이를 낮춘 그녀의 안색을 연거푸 살폈다.

가식으로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명확한 진심이다.

“축복……이라.”

마족이 누군가에게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존재던가?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써?

나는 기존의 선입견들이 파편처럼 깨지는 신선함에 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모든 마족들을 안다고 자부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혼돈 악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더라도, 리나 씨와 같은 별종들도 나름 있을지는 모르는 노릇이니.

비슷한 혼돈 악의 성향이긴 하나, 나의 방침은 그저 순종하며 따르고도 남을 파릴케마저.

규리스가 아련한 눈길로 여덟 눈들을 깜빡댔다.

“괜찮으신 거죠? 지크 씨?”

“…됐어. 퀘스트 따위야 날을 잡고 길드에서 죽치면 언제든 가능하니까.”

나에게 언제나 밝은 인사를 건네던 쾌청한 활력소와도 같은 존재이던 그녀에게, 이 정도의 아량은 괜찮겠지.

“고마워! 지크!”

화사한 눈웃음을 짓는 아비카가 급격히 가까워진 어투와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확실히 그녀에게 호감을 산 것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매우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려 접수대 너머의 규리스에게 통보했다.

“…어쨌든, 금일로부터 정확한 2주 후인 칠흑의 월 창암의 주 질투의 요일에 보는 걸로. 사실 연금술사인 내게는 길드 퀘스트나 알케믹 퀘스트나 큰 차이는 없어. 보상금이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뿐.”

나는 찡긋 윙크하며 맞붙인 검지와 중지를 눈썹에 붙였다.

“모험가와 접수원의 콤비, 환상 케미잖아?”

“그, 그러시군요…….”

미약하게 안면에 홍조를 붉힌 규리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으음, 딱히 퀘스트의 진행이 아니더라도. 모험가 스스로 습득한 소재 역시 상시 매각이 가능하니, 그거라도 챙기면 될지도요?”

“그건 당연하지. 당일 공방으로 찾아와. 당연히 마경에서 며칠은 야영해야 할 테니 준비도 갖추고.”

“네에~! 예쁘게 차려입고 갈게요!”

용무의 끝.

나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규리스와, 싱그러운 눈웃음을 띈 아비카에 번갈아 시선을 흘렸다.

“가는구나?”

“응, 용무가 끝났으니까.”

아비카가 투박한 금속성 건틀렛을 착용한 오른팔을 들췄다.

“지크…… 또 보자.”

“안녕, 아비카.”

“그래! 추후에 함께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자구!?”

더없이 밝은 눈웃음을 짓는 그녀가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렸다.

나는 비슷한 미소로 응대하며 여자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걷기 시작하며 길드를 빠져나간다.

촤르륵! 돌연 후방에서 낱장 흩날리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거미의 몸체를 번쩍 들춘 규리스가 고도를 높이며 의뢰서들이 꿰인 문서철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낚아채려는 아비카와 실랑이를 벌인다.

폭소하는 규리스와 애원하는 아비카.

실로 다급한 기질과 성정이 돋보인다.

“저런 마족이 있었을 줄은…….”

내가 너무 마족을 잘 안다고 자부한 걸까?

비교적 거주구들이 있는 중심과, 척박한 외곽으로 나뉘는 마계.

중앙의 마왕에 통치받는 200만과, 변경의 야만마왕에 통치받는 100만.

마계의 300만에 달하는 마의 일족 전원을 만난 것도 아니면서?

마수 1,250만, 마물 1억 5천만 모두를 만나는 것도 역시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

다시 발을 놀려 길드를 빠져나가던 나는 도중 발걸음을 멈춰섰다.

“이유를 묻지 못했네…….”

그녀가 나를 응원한다고 밝힌 이유.

추후, 알 수 있을까.

금일의 퀘스트는 놓쳤어도, 잠재적인 고객을 얻은 셈이다.

어쩌면, 한없이 순박한 인상에 건틀렛과 그리브, 흉갑과 드레스에 숨겨진 속살이 어떤 형체일지 실로 궁금한 미인까지도.

“아니지…….”

이따금은 내게는 과분한 게 아닌가 싶은 리나 씨에 이어, 아찔한 마족의 미인인 파릴케마저 얻은 참이었다.

이제 곧 두 여자들과의 동거가 시작될 텐데, 그저 인사만 하던 사이인 그녀에 이런 공상을 품는 것은 너무 나갔다.

“카페나 들릴까.”

어쩐지 미묘하게 들뜬 싱숭생숭한 마음.

길드의 입구에 도달한 나는 다시 등을 돌렸다.

흉갑을 입고 나풀대는 드레스, 가슴붕대가 휘감긴 훤히 개방된 등짝의 바위처럼 단단하게 발달한 근육을 바라보았다.

“아비카…….”

나는 분명한 운명의 바람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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