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서큐버스-57화 (57/80)

〈 57화 〉 마족 길드

* * *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청초하고도 단아한 미성이 울린다.

길드에 진입해, 모두의 시선을 이끌어들인 여자 임프였다.

철커덕, 철커덕. 사바톤과 그리브가 일체화된 철의 발걸음 소리가 정적에 빠져든 실내를 울린다.

눈썹의 높이에 맞춰 단정하게 자른, 결코 목덜미를 넘지 않는 길이의 일자 중단발이 보폭에 맞춰 살랑인다.

옆머리 좌우에는 중단이 둔각으로 꺾인 사면체 표면의 커다란 쌍각이 솟고, 앞이마 좌우에는 도깨비 뿔처럼 원뿔형 표면의 작은 쌍각이 솟았다.

추가적인 머릿결로 두상을 빙 둘러 땋은 벼머리, 기이하게도 정수리를 중심으로 청과 홍으로 반반씩 나뉘어져 자란 머리색에 좌우가 정확히 양분된다.

백색에 가까운 연보랏빛의 한없이 선한 인상의 얼굴에는, 이쪽 세계의 거주민들이 품는 눈빛과는 상당히 다른 순박한 성정의 청과 홍의 오드아이가 반짝인다.

그녀의 양분된 머리색과 정확히 동일한 색상의 패턴.

포효하는 메갈로 와그의 선명한 안면 부조가 세공된 브레스트 플레이트.

발목까지 늘어진 드레스가 보폭에 맞춰 감미로운 일렁임으로 살랑대고 풀럭댄다.

갑옷과 치마라는 심히 이색적인 조합.

금속성의 발길을 내딛는 상체의 양팔에도 금속성의 건틀렛이 장착되어 있다.

그녀의 순수하고도 선량한 외형과 심히 어울리지 않는다.

한없는 이질성과, 더없는 대조미를 선사하는 청홍의 미인.

복장이 너무도 이색적이기 때문인지, 압도적 흡입력을 발휘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이동하는 그녀.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접수대를 향해 발을 옮겼다.

“이상하네. 오늘의 길드의 분위기는. 마치, 무슨 일들이 있었다는 듯이……. 마력의 발현에 의한 미약한 여파도 느껴지고. 바깥에서 나뒹굴던 인큐버스와, 저기 벽면에 뚫린 구멍은 뭔데?”

아까 자행된 전투의 여파마저 곁눈질로 훑는 그녀가, 고개를 틀어 접수대에 있는 나의 방향을 향해 걸어왔다.

나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섰다.

현재 그녀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지금 나의 심경에는 실로 싱숭생숭한 상념이 휘몰아치고 있다.

대체 왜? 그녀가 여기에?

설마 이곳 길드 소속인가?

나와 같은? 대체 언제부터?

서로의 우연히 흐른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순간.

철커덕, 우두커니 발을 멈춰 섰다.

“…….”

서로의 인식이 이루어졌다.

멍한 눈의 그녀가 그대로 굳어졌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무언가가 굳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일순간 시공이 정지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실로 오랜 정적이 가라앉는다.

“어……?”

이윽고, 침묵이 깨어졌다.

사슴처럼 순한 눈망울이 둥그렇게 뜨이고, 무언가 말을 전하려는 듯이 입술이 가파르게 달싹댄다.

별안간, 그녀로부터 폭발할 듯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어!? 당, 시이이이인!?”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가속한 그녀의 신형이 코앞에 당도했다.

나도 순간적으로 놓칠 정도의 스피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청홍의 뒤섞인 스트림의 마력색이 일렁대며 허공에 녹아든다.

“뭐야!? 왜 여기에 있어!? 혹시 의뢰!? 일을 맡기러 온 거야!? 아니면 모험가!? 힉!? 설, 마아아아!?”

“여기의 모험가니까.”

나의 건조한 답변에 그녀의 눈이 뽑힐 듯이 부릅뜨였다.

“우리이이이! 같은 길드 소속이었구나!? 응!? 으응!? 으으응!? 인구 12만의 헬유레이아에 속한, 32개나 되는 지나치게 많지 않나 싶기까지 한 모험가 길드에서! 딱 같은 길드였다니! 정말 몰랐어! 응!? 대체 어떻게!? 설마 정말 기막힌 우연인 걸까아!?”

168센티미터 안팎인 리나 씨와 파릴케보다 조금 큰 170센티미터 정도일까.

그녀에 휘둘리는 신세가 된 나의 양손에서 미약한 잔상마저 일어났다.

무엇이 이리도 기쁜 걸까.

완전히 풀린 분위기, 잠시 정적이 지배하던 길드에 동적이 찾아들었다.

모두 제각기 움직이며 다시 접수원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재차 떠들어대며 술자리들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휘감은 손길로 휘두르는 것은 삼가 줘. 탈골은 골치 아프니까.”

“어, 으응? 힉? 꺅!? 아, 미, 미안!”

자신의 양손으로 움켜쥔 나의 양손을 뽑힐 지경으로 위아래로 세차게 휘젓던 그녀가 뚝 그쳤다.

강아지처럼 신이 나 방방 뛰던 그녀가 기세를 가라앉혔다.

사과와 상기가 혼재된 표정으로 옆구리를 짚는다.

이윽고 그녀가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다.

“아비카 녹스 셀리크 드레이니카! 253세! 제9군단 악심의 충만의 나이트 시커! 제6핏줄기의 소악마족! 하급전사야!”

입가 주변부터 좌우의 턱선까지 세 갈래의 발톱에 할퀴어진 듯한 표식의 마혈문.

너무도 순수하고 선량한 외모를 투영하는 그녀에 있어, 마족의 문신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제5마군도 굴라 출신! 고향도, 복무지도 그쪽이지만 군무가 아닐 때는 이쪽 길드에 모험가로 등록해서 활동하고 있어! 헬유레이아의 마계 전역에서 모여든 활기를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활력이 넘쳐나거든! 함께 충전되는 느낌이랄까!? 마침 마평원 제르디아도 있기에 육체의 단련과 용돈벌이에도 딱이야!”

청초한 흰자위에 붉고 푸른 오드아이의 시선을 이채롭게 빛냈다.

새카만 눈자위 유형의 마족이 아니다.

“이제, 청등급으로의 승급이 코앞이라 길드에서의 승급전을 앞두고 있지만? 적혈급으로의 진입도 코앞이라 마왕군에서의 진급도 앞두고 있지만? 청등급의 모험가이자 적혈급의 중급전사가 된다는 소리야! 푸훗!”

송곳니들은 짐승처럼 비죽하나, 나머지는 가지런한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화사히 웃는다.

카티샤처럼 전형적인 마족의 투영인 상어이빨도, 트노시아처럼 짐승의 송곳니들로만 이루어진 형태도 아니다.

파릴케처럼 하얀 눈자위와 고른 치열 유형의 마의 일족.

“주변에서는 다들 이례적인 상승이래…. 100년도 되지 않아, 적혈급으로의 돌파를 이룬 천재라며…. 나는, 그저 언제나 진심을 다해 무예의 길을 갈고닦을 뿐인데….”

멋대로 묻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늘어놓고는 머쓱한 듯이 은근슬쩍 덧붙였다.

“…….”

어째서일까?

나는 미약하게 마음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전혀 몰랐어. 당신은, 그렇게나 나를 많이 불러 주었음에도.”

“그래? 이제부터 서로 이름으로 부르면 되지. 편하게 아비카라고 불러! 당신의 이름은?”

아비카가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끌어올린 채 선한 눈망울을 깜빡댔다.

“지크……. 흄 베이스 호문쿨루스. 아직 성은 없어.”

“호문쿨루스? 플라스크 속의 소인간을 말하는 거야? 왜 이렇게 커? 엄청 작지 않나?”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건조히 내뱉었다.

“이식술을 받았으니깐…. 지금 보이는 나의 겉모습은, 한때 인간이었던 흔적에 불과해.”

“그래서 성이 없는 거야? 하지만 원래 인간일 때의 성이나 중간 이름이 있었을 거 아냐?”

“…계승하지 못했어. 리나 씨의 성인 페를렌데를 아직 받지 않았기에. 예전의 이름은 안 써.”

의미가 있는 업적을 이루고 난 이후, 그녀와 함께 시청을 방문해 마족성을 계승받기로 했다.

그때야말로 그녀와의 일체화에 절반 이상 접근하는 순간이 된다.

“사정이 있구나! 그나저나 가까이서 보니 중간계의 흄과는 꽤나 상이한 외모네? 혹시 다른 사방계의 인간인 걸까?”

“대체…… 왜 내게 꾸준히 말을 걸었지? 어째서 계속해서 인사를 건넨 거야?”

“응? 그야 당신을 응원하니깐!”

크고 선명한 눈망울과 갸름한 얼굴로 퍽이나 서글한 인상의 미인.

저악마와 악마와 달리 비교적 완연한 인간형을 갖춘 마족은 미남과 미녀가 많은데, 남자들은 음험하거나 여자들은 요망한 퇴폐적 외형들이 두드러진다.

그에 비해 그녀는 더없이 순한 암사슴 같은 인상이다.

지상의 시골의 순박한 처녀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눈빛이랄까.

원판들은 나름 잘생기거나 꽤나 예쁘긴 하지만, 못되게 생긴 인상들이 많은 마족들에 비해 한없이 선량한 퓨어함과 클린함을 선사한다.

옆머리와 앞이마의 좌우에 네 개나 돋은 아크릴처럼 매끈한 질감의 붉은 뿔, 청과 홍의 오드아이에 선명하게 세로로 갈라진 동공들이 아니면, 중간계의 선량하고 예쁜 젊은 수녀님이라 해도 믿을 정도.

물론 인상만으로 마족을 판단하는 것만큼 극히 어리석은 짓도 없다지만.

“그래서? 길드에는 무슨 일이야? 혹시 퀘스트? 등급이 어떻게 돼?”

“어머! 아비카 씨!”

여지껏 잊혀진 규리스가 성대한 바스트의 모핑과 함께 팔을 번쩍 들췄다.

자신의 호명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비카가 함께 팔을 들춰 발랄히 응대했다.

“안녕~! 규리스!”

곧장 걷기 시작한 아비카가 나를 지나쳤다.

나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접수대에 양팔을 올려 걸쳤다.

전방은 여성적인 볼륨을 한껏 살린 흉갑으로 가리나, 후방은 완벽하게 오픈되어 가슴붕대만이 휘감겼다.

그녀의 바위처럼 단단하게 발달한 등 근육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권각의 투혼을 담은 육체를 무기로 삼아 싸우는 무투가의 증명이었다.

화사히 웃는 규리스가 모은 손등을 뺨에 맞붙였다.

“지크 씨! 소개할게요! 이쪽은 다크 하트 길드의 72년차이자 홍등급 모험가인 아비카 씨! 제가 담당하는 모험가셔요! 그리고 아비카 씨!? 지크 씨도 같은 홍등급이시랍니다? 어찌 서로 구면인 듯하시네요!”

“헤에, 그렇구나!?”

“…….”

심히 어색한 상황이었다.

소개랄 것도 없었다.

이미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비카가 내게 푸르고 붉은 싱그러운 곁눈질을 흘렸다.

“응! 서로 매우 잘 알고 있는 사이야! 같은 길드였다니! 이거야말로 화설산의 용혈에서 발생한 불꽃이 마사막에 도달해 불폭풍을 일으킬 정도의 우연이네!”

그녀가 목울대 밑으로 손가락들을 비집어 인식표를 내보였다.

목걸이의 형식으로, 가로 3센티미터에 세로 5센티미터의 직사각형으로 연마한 마철강 표면의 중심부에 루비를 박은 형상.

나는 목에 차는 감각이 불편해 주머니에 넣고 있거나 지갑 혹은 차원구에 보관한다.

“그것도 같은 홍등급이었을 줄이야! 계속 너무 겹치는 거 아냐!?”

의심할 여지도 없는 나와 동일한 홍등급.

암영급에서 적혈급으로 진입을 아직 남긴 그녀가, 이미 적혈급에 진입한 나와 동일한 등급이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가 모험가로서 파헤친 세월이 훨씬 많기에 당연한 것.

길드에 가입한지 3년도 되지 않는 나보다, 모험가에 오래 투신한 그녀가 먼저 상위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똑같은 여덟 등급을 지닌 마강계와는 달리, 길드의 등급은 순수한 강함만은 아니다.

길드에 가입해 헌신한 세월과, 수행한 퀘스트들에서의 성공률과 같은 여러 실적을 복합적으로 합산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힘인 마강계의 등급은 훨씬 강한 마족이, 오래 전부터 활동하며 실적을 쌓은 마족보다 길드의 등급은 낮을 경우가 있다.

어차피 모험가야 군무가 아닐 때에 사회에서 몸도 굳지 않을 겸 잠깐 누리는 여흥으로 인식하기에, 그닥 신경 쓰지도 않는 마족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서!? 길드에는 어떠한 일로 오신 건가요오~!? 트호호호홋!!! 트홋홋홋홋!!!”

“요즘 식비나 생활비라거나 기타 자잘한 지출이 많아져서 말이지, 급전이 필요해졌다랄까!”

“어머! 그러시군요~! 아비카 씨! 그러면 당연히 퀘스트를 뛰어야죠! 트홋홋홋홋!!! 트홋홋홋홋!!!”

규리스의 다소 요란스러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한결같이 싹싹한 접객에 아비카도 발랄히 응대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규리스가 있는 날 직접 찾아온 건 평범한 의뢰가 아니야. 혹시 손톱 퀘스트 있어?”

“손톱…… 퀘스트 말씀이신가요.”

규리스가 여덟 눈들을 동시에 깜빡이며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속칭 클레오파트라 머리라고 불리는, 서로가 동일한 보브컷.

규리스는 비대칭의 가르마로 한쪽 눈매를 일렁대며 가리는 대신, 아비카는 눈썹에 맞춰 단정하게 자른 앞머리가 한없이 청초한 인상을 구사한다.

어떻게 보면 단정한 여대생의 느낌이랄까?

규리스가 요염한 기교와 화술을 내세워 남자를 잡아먹는 암족제비와 같은 인상이라면, 아비카는 누구에게도 편안함을 선사하는 순수한 암사슴과도 같은 인상이다.

극상의 대조미.

“우연의 수준이… 아닐 수도 있겠군….”

나를 몬스터 웨이브에서 구원하고는, 모험가 길드로 인도한 규리스.

나의 닫힌 마음에 끝없는 인사를 건네던 유일한 대상인 아비카.

리나 씨와는 조금 다른 치유일지, 안식일지 모를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던 존재들.

규리스도. 아비카도. 얼어붙은 나의 마음에 미약한 흔들림을 자아내는 대상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을, 오늘 길드에서 한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우연을 뛰어넘는 운명인가?

“응? 지크 씨, 지금 뭐라구?”

“아니, 신경 쓰지 마…….”

두 여자의 쏠린 시선에 고개를 내저어 부정을 표했다.

규리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아비카가 순하게 크고 맑은 눈망울을 지긋이 고정했다.

접수원 아라크네 퀸이 화사한 눈웃음으로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어머~! 지크 씨가 그렇게 굳은 것은 처음 보네요! 아비카 씨와 무슨 인연이라도!?”

“아니, 너무도 의외의 얼굴인지라. 그것도, 같은 길드에 있었을 줄은…….”

2년을 넘어가는 세월 동안 내게 꾸준히 인사와 격려를 건네던 그녀.

이따금은 반응도 하지 않고 지나쳤는데, 그녀는 한결같았다.

굽히지 않고, 꺾이지 않는 오뚜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

오늘 나를 먼저 부르는 것도, 결국은 그녀였다.

나는 운명의 바람을 느꼈다.

싱그러운 웃음을 흘리는 아비카가 다시 규리스에 시선을 돌렸다.

접수대에 그녀와는 실로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금속성의 건틀렛들을 포갠 채, 밝고도 낭랑한 미성을 드높인다.

“규리스, 혹시 최근에 연금공방으로부터 들어온 의뢰가 있어?”

“공방이요……?”

“응. 아마도 개시일은 금일로부터 2주 후일 텐데?”

“…….”

나와 규리스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봤다.

기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상황.

“으응! 어제 내가 단골로 들리는 공방에서, 불쑥 말을 꺼내지지 뭐야? 내가 워낙 애용을 해주는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라도 보답을 하고 싶다네? 무려 필요가 없는 나머지 부산물들은 가지라며 몽땅 양도까지 하며?”

“하…… 으, 음.”

“그래서 직접 퀘스트를 수주하러 왔어! 손톱 등급의 퀘스트라는데? 마침 사실상 적혈급에 근접한 딱 내가 할 수 있는 단계까지니깐! 본래는 2주 뒤에 개시지만, 언질은 받아 놓았고, 아직 누가 가져가지 않았으면 나에게 전적으로 의뢰를 양도한다는 공방주의 서명이 포함된 증명서도 지참하고 있어! 혹시, 누가 벌써 가져간 걸까나아? 그럼 곤란한데에~!”

규리스가 손가락들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혹시, 의뢰주가, 다클라디온 연금공방의 공방주… 자르길 녹스 슐크 겔티스가…?”

“응! 맞아!”

나와 규리스는 더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아직 의뢰서에 접수원의 권한으로써 본격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인장을 찍지는 않은 상황이다.

이미 찍었으면 발뺌도 못하는데, 마침 딱 기가 막히는 타이밍.

정말 우연을 초월하는 운명인 걸까?

“누가 가져갔어? 그럼 할 수 없겠구. 퀘스트가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구.”

아비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규리스가 가파르게 잘게 떨리는 시선들을 내게 돌렸다.

“과연 운명인 것인가?”

나는 통상적인 마족들과는 한없이 다른 그녀의 뿔이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산양이나 염소나 황소처럼 동물성이 느껴지는 마족들의 뿔과 달리, 아크릴처럼 매끈한 질감의 붉게 빛나는 적각들이 실로 이채롭다.

신창세기 당시, 마신의 흩뿌려진 핏방울에서도 가장 진한 농도가 형체를 이룬 발현인 임프들의 상징.

임프들 특유의 응혈성 마각, 자신들의 존재를 이루는 마신의 굳은 핏방울의 투영.

완성체인 데몬은 100퍼센트, 반푼이인 레서 데몬은 50퍼센트, 쭉정이인 데블은 25퍼센트의 악마혈을 보유.

마족을 상징하는 데블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데블과 동류로 분류되는 수많은 일족에서 가장 진한 25퍼센트의 악마혈을 완연히 보유하는 존재들.

피가 굳은 형상을 투영하는 응혈성 뿔이라지만, 구조를 유지하는 마혈의 경화를 풀면 즉각 액화하는 구조라고 두뇌에 주입된 마종 대백과사전의 지식이 전한다.

“임프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인데.”

“응? 정말?”

마족들은 한없이 다양한 색상과 형태의 뿔들을 자신들의 강렬한 개성들만큼이나 지니지만, 임프들은 모두가 저런 매끈한 형태의 붉은 뿔들을 지닌다.

자신들의 존재 의의나 마찬가지며, 마신의 가장 진한 핏방울의 상징이기에.

피부색, 머리색, 눈색, 치열, 날개, 꼬리 등은 여전히 제각기 다르더라도, 임프들의 뿔은 무조건 저런 형태다.

저악마의 다음 가는 존재인, 소악마라는 위명을 적법한 무위로써와 혈통적으로 능히 계승하는 선택의 일족.

통상적인 마족들은 상위의 경지인 마강계로 나아갈수록 돌파의 문턱이 드높아지며, 일반적인 암영급에서 적혈급으로의 진입은 수백 년도 소모되는 것에 비해, 그녀는 100년만에 적혈급을 뚫었다는 것이 입증이다.

임프들에 마왕군의 군단장, 부군단장, 전사장 및 온갖 중요 보직들에 위치하는 강자들은 즐비하다.

그래 봤자 사회적으로는 훨씬 더 수가 많은 데블과 동류지만.

“지크 씨…… 어찌 하실 건가요?”

“왜? 다들 무슨 일 있어?”

의아함이 어린 시선들을 머금고, 나와 서로를 교차하며 쳐다보는 소악마와 마수의 여자들.

“정말 운명일지도.”

생각해 보니 전생하고 양보 따위는 모르고 살아왔다.

이쪽 세계 거주민들의 빡센 성정에 뼛속까지 깊이 지독하게 물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현생의 나의 성격과 성향도,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거듭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다.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운명이라면…….”

내게 일상의 감미로운 활력소와도 같은 안식을 선사해 준 그녀를 위해.

추후의 잠재적인 고객도 얻고.

“그 공방, 취급하는 포션의 가격이 얼마인지 물을 수 있을까?”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비카의 오드아이가 동그랗게 뜨였다.

“응……? 포션의, 가격? 왜, 왜애……?”

“나도 연금술사거든. 같은 동종 업계의 종사자로서, 다른 업소들은 어떤 가격대를 유지하나 조금 궁금해서.”

아비카의 크고 순한 눈망울이 더욱 동그랗게 뜨였다.

사실 이미 알고 있기에 물을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몽환의 숲 루스카의 초입에 위치한 연금공방 에우포리아는, 몬스터 웨이브마다 특혜를 본다는 미명하에 상시 폭발적인 할인가를 시행하고 있으니까.

“여, 연금술사였어…? 당신? 그, 그렇구나…. 오늘 정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네….”

분주히 이리저리 눈을 굴려대는 아비카가 손가락들을 툭툭 맞부딪혀댔다.

“이, 일단…… 내가 가장 많이 구입하며 사용하는 5급 체력 포션은, 275브리아이긴 한데.”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변에 미소를 머금었다.

“마력 포션은?”

“300브리아….”

“기력 포션은?”

“325브리아인데…… 왜…? 혹시, 너무 싸서? 아니면 설마 비싸거나?”

일목요연한 견적.

나는 더는 듣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5급 기준으로 체력 포션 150브리아, 마력 포션과 기력 포션은 모두 175브리아. 마력 포션과 기력 포션은 같은 원리에 다른 발현일 뿐인데 왜 가격차가 나는지도 모르겠고. 여지껏 평균가보다도 더한 바가지를 쓰고 있었어.”

아비카의 턱이 뚝 떨어졌다.

“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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