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음몽(?夢)
* * *
몽침(夢?).
꿈의 침투.
생물은 생명 활동의 연장선으로 수면 활동을 지닌다.
수면 도중 필연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불특정한 무의식의 집산인 꿈을 꾸게 된다.
아름답고도 사악한 악의 꽃들의 일족이자, 애욕과 열락의 이슬을 머금어 밤에 피어나는 장미들.
환몽(?夢).
몽마가 보이는 환상의 꿈.
몽마를 상징하는 절대적 요소이자, 몽마를 몽마로서 완연하게 하는 상징적 요소.
현실과 몽중의 경계를 넘나드는 꿈의 거주민인 몽마의 진정한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라 봐도 좋다.
현실에서는 나약한 몽마라도, 꿈에서는 하나하나가 자신이 개입해 펼치는 꿈의 세계의 주인들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혈통, 강인한 정신력, 봉마와 퇴마의 효력을 지닌 특수한 장신구를 착용하고 수면하는 경우들이 아니라면 사실상 몽마의 침입을 막을 방안은 전무하다.
현실에서 힘자랑을 일삼던 막강한 강자라도, 몽중에서는 몽마에게 꼼짝없이 농락당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강한 몽마는 현실에서도 덮치며, 신중한 몽마는 꿈으로 덮치는 것이 전형이다.
“몽침의 말씀이시군요.”
“응….”
수면의 악마이자 체액의 악마인 몽마의 흡정은, 대상자의 꿈에 침투하고 있는 것만으로 발생한다.
그저 대상의 몽중에 체류하는 것만으로, 조금씩 생력을 흡수하며 몽마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다.
사실 이 상태로 어떤 행위 없이도 흡정이 이루어진다.
본격적으로 나서면 음몽(?夢)을 통해 희생자의 몽정(夢?)을 유도한다.
내가 몽마도 아닌데 줄줄 꿰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질리도록 체험해 보았으니까.
“어떠한 이유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나의 능청맞은 질문에 현숙하게 젖어든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내가 시큰둥한 이유는 있다. 덧붙여 그렇게 선호하지도 않는다.
꿈에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할 온갖 플레이들이 가능하지만, 직접 그녀의 뽀얀 미육을 붙잡고 흔들다가 잔뜩 쾌락을 방출하는 것에 못하다.
가뜩이나 비정상적인 사정량으로 저지르는 몽정은, 확실하게 주변을 끈적한 물바다로 만들기에 썩 별로다.
다 큰 남자가 오줌을 싸지른 기분이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면 이미 끝났는데 끌릴 리가?
리나 씨의 시선이 창가에 비치된 사람만한 유리관에 꽂혔다.
“호문쿨루스……. 지크가 키운 거로구나.”
“당신이 저를 이렇게 바꾸기 전의 녀석도 저랬겠지요. 그 느낌을 알고자 합니다.”
“정말 잘 컸네…? 성장을 촉진해 성체로 완성하거나, 개변을 가할 대상에 이식술을 시도해도 괜찮겠는걸.”
“누군가에, 무엇으로 쓰냐가 문제이지요.”
그녀가 더없이 아련한 눈길로 유리관의 호문쿨루스를 그저 끝없이 주시한다.
나는 양손을 휘둘러 그녀의 엉덩살들을 찰팡 철썩였다.
“끼햣!?”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 겁니까? 물건이 죽어 버린다구요? 험지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반려에게, 어서 아찔한 보상을 선사해 주시길.”
나는 그녀의 엉덩살들이 뜯겨질 정도로 쥐어짜며 침대로 끌어당겼다.
미끄러질 듯이 매끈한 촉감의 넘쳐나는 둔살들.
스팽킹에 허벅지들을 바짝 오므린 그녀가 마지못해 끌려왔다.
“아, 알았으니까……. 당기지 좀 말래…?”
탄실한 백옥 같은 각선미를 감싼 롱부츠들의 무릎 부위가 침대에 얹힌다.
엉금엉금 걷는 무릎걸음들이 슬쩍 띄워지더니 나의 좌우 허벅지에 안착한다.
그대로 상체를 낙하한 그녀가 양손으로 나의 옆얼굴을 만지며 고개를 바짝 낮췄다.
바로 눈앞에 벚꽃처럼 진한 핑크빛 홍채가 도달했다.
코끝이 맞닿아서 서로의 교차하는 숨결이 느껴진다.
꿈결처럼 달달한 몽마의 향기가 밀착했다.
여성이 남성에 올라타 코앞에서 내려보는 체위, 적나라한 여성상위가 완성되었다.
아니러니하게도, 꿈을 컨트롤한다지만 막상 자신의 꿈은 컨트롤할 수 없는 존재가 몽마다.
“리나 씨는 무슨 꿈을 꾸는지 궁금하네요.”
“그래……?”
나는 여전히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엉덩살들을 좌우로 바짝 젖혔다.
그러고는 발기 상태이던 육봉을 그녀의 엉덩이골에 직립해 끼웠다.
“흐햣!?”
찰싹하는 살소리와 함께 나의 해면체 안쪽이 리나 씨의 엉덩이골에 바짝 끼워졌다.
육봉의 비부들의 강타에 그녀가 세찬 비명성을 내질렀다.
두툼하고도 풍만한 골반을 밑부터 위까지 완전히 횡단해 엉덩이골 위로 우뚝 솟은 커다란 귀두가 보인다.
손바닥들을 가득 펼쳐 쥐어도 남아도는 말캉한 엉덩살들을 주물대며 제각기 따로 휘돌린다.
가하는 세기에 따라 풍만한 뽀얀 마시멜로들이 이지러지며 형태를 변환한다.
마치 손가락들이 하얀 살점들에 좍좍 파묻히는 것 같다.
히프를 야살스럽게 주물대던 왼손의 손가락들을 자연스럽게 엉덩이골로 침탈시켰다.
엉덩이골에 팽팽히 함몰된 에나멜처럼 검은 빛깔의 T팬티.
살을 타고 검지와 중지를 은밀한 포인트들을 향해 미끄러뜨린다.
불과 손가락 두께에 불과한 밑단이 각각의 비부들에 파고들도록 꾹 짓눌렀다.
“아, 흐, 으으으읏……!”
고운 아미를 가득 찌푸린 리나 씨가 은밀한 비경에 가해지는 손장난에 골반을 바르르 떨었다.
쩍 젖혀진 연홍빛 입새에서 실선이 늘어진 뾰족한 송곳니들이 적나라하게 돋보인다.
새빨갛게 홍조가 물든 그녀가 격렬히 고개를 비틀며 연신 골반을 들썩였다.
몽마는 성감대가 어떤 종족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발달했다.
중지가 누르며 더듬고 있는 T팬티 너머의 음렬이 이미 축축한 게 그것을 증명한다.
사실 그냥 이대로 여성상위로 직행해 격렬히 흔들어 버리는 편이 그녀도 좋지 않나?
“꿈에서 하자는데…… 끝까지 이러네……?”
“이따금 꿈에서는 여러 메시지를 던지시니까요. 매우 색다른 느낌이긴 한데, 사실 흥이 깨지는 점이 없다고도 못하죠.”
“오늘은 조금 달라……. 그러니까.”
지금 들어갈게. 양손으로 나의 뺨을 쥐고 이마를 맞댄 그녀가 야트막한 후렴구를 덧붙였다.
“꿈에서 보자…….”
그녀의 오른손이 들춰져 나의 눈매를 덮었다.
눈을 감지 못한 사자에 안식을 선사하듯이, 그대로 나의 눈꺼풀을 부드럽게 흘려내며 감겼다.
그와 동시에 급격한 졸음이 쏟아졌다.
밑도 끝도 없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기저에 생겨나, 의식을 송두리째 끌어당기는 거대함이었다.
수면 유도 음마술. 슬립 탭.
마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침투한 수면의 악마의 마력이, 나를 저항할 수 없는 수마에 빠트렸다.
나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득한 졸음에 빠져들었다.
의식을 상실하기 직전, 꿈결 같은 저편에서 촉촉한 속삭임이 아련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나는 꿈의 낙원의 지배자…. 몽중의 주인으로서 이 아늑한 세계에 명하노니…. 펼쳐져라…. 녹아들어라…. 흘러들어라…. 저항할 수 없는 달콤한 미몽이여……. 드림 컨트롤.”
…….
“아늑한 꿈은 경계의 저편…. 순간의 현실에 걸쳐, 영원의 환몽에 도달하리라……. 드림 인베이전.”
현실에서 완벽히 이격된 나의 의식은 끝도 없는 어둠으로 추락을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강의 와중, 돌연 찬란한 빛무리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따스하면서도 존재를 아늑하게 휘감는 듯한 온기.
저 빛의 정체는 뭘까.
누가 발하고 있는 걸까.
내면으로부터 떠오른 순수한 호기심을 인식하는 순간, 어둠에 갇혔던 나의 주변 세상은 돌연 휘황한 광채를 발했다.
“…….”
세상에 색상이 펼쳐졌다.
색색의 향초들이 피워내는 은은한 온갖 과실향.
뒤섞이듯이 풍기는 여러 다양한 향미들과 공간에 가득한 원목 특유의 나무 냄새.
“여긴……?”
적게 잡아도 30미터는 될 듯이 길고 거대한 방의 너비.
전체적으로 황동빛 데코레이션이 가득 쓰인 내부에는 다채로운 예술품들과 장식품들의 복합적인 기조가 지배했다.
높이는 15미터도 넘지 않을까 싶은 방의 어디에 시선을 돌려도, 온갖 초상화들과 동식물들의 풍물들을 담은 액자들이 벽면에 즐비하게 매달려 분위기를 장식하고 있다.
나는 찬란한 샹들리에들이 천장을 수식하는 만찬장에 있었다.
꽤나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기질의, 자신의 부를 과시할 줄 아는 귀족 누군가의.
마귀족들 특유의 음험하거나 퇴폐적인 느낌은 안 드는 걸로 보아, 마족들의 연회장은 아니고 지상 어딘가인가 보다.
그리고 나의 눈앞에 몇십 미터도 넘게 펼쳐진 장탁자.
호사스러운 액자들이 제각기 다른 높낮이로 좌우 벽면을 수식하고, 장탁자에 일정한 거리로 늘어선 은촛대들이 색색의 향초들을 태우는 가운데, 나열하기조차 힘든 온갖 진수성찬과 산해진미가 테이블의 시작에서 끝까지 가득 펼쳐져 있었다.
나는 눈처럼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장탁자 중심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시선을 내렸다.
꽤나 멋드러진 금실과 은실의 자수가 아낌없이 들어간 검은 벨벳의 예복.
최소한 백작급 이상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중후한 연미복.
의아함의 연속에서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앞치마에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선 하녀복의 메이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엇인가, 문제라도? 주인님?”
“리나 씨……?”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완전히 달라진 복장.
그녀는 검은 원피스에 프릴이 달린 하얀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마저도 하얀색 카츄샤를 낀 전형적인 메이드의 복장이었는데, 평시의 트윈테일이 아닌 등허리의 아래까지 흘러내린 찬란한 금빛 생머리다.
날개는 딱히 꺼내고 있지 않고, 치맛단 아래로 늘어진 끄트머리가 뒤집힌 하트 형상의 악마 꼬리만이 살랑댈 뿐.
서큐버스와 메이드의 아찔한 조합.
메이드복의 리나 씨라… 저 모습은 처음이네.
산양의 뿔이 돋은 서큐버스 메이드가 꿈결처럼 아늑한 목소리를 흘렸다.
“……주인님. 문제가 있으신가요?”
잠시 허공에서 교차하는 침묵의 시선.
몽마들은 하나하나가 훌륭한 배우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흡정을 위해서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대상의 성향과 취향을 간파해야 한다.
각자들이 다양한 성격들을 지니면서도, 원할 시에는 어떤 배역도 될 수 있다.
태생적으로 연기력을 타고난 가장 우수한 배우들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역할 플레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즉각 응했다.
“…흥미로운 꿈이로군.”
“꿈이란 은연중의 욕망. 가장 은밀한 무의식의 발현이랍니다…. 현실에서는 어떤 껍질로 완벽한 위장을 갖춘 위선자도, 꿈에서는 못다한 자신의 환상을 펼치죠…. 한없이 발칙하고, 음탕한 사고의 편린을 끝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이 꿈의 매력이에요. 꿈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답니다……?”
나는 상석의 팔걸이에 왼팔을 짚어 턱을 괴었다.
드넓은 만찬장에는 나와 리나 씨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거나, 정보와 지식의 조합을 통해 적당히 구현된 실존하지 않는 장소.
공손히 시립한 그녀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주인님. 모처럼 분부하셨던, 식사가 식는답니다?”
나의 뒤로는 아늑한 불길을 머금은 벽난로가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들도록 하지.”
뒤에서 꿈결처럼 아른대는 따스한 훈기를 느끼며, 나는 앞에 세팅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나는 은식기를 달각대며 큼직한 접시에 놓인 것부터 썰기 시작했다.
딱 적당히 구워져 불그레한 육즙이 표면까지 뚝뚝 흘러나오는 스테이크.
우측의 접시에서는 후추를 곁들인 마늘빵이 곁들여진 당근과 치즈를 올린 수프를 떠먹는다.
너머의 광주리에 가득 담겨 김을 풍기는 흰 빵들의 하나를 가져와 이빨로 뜯는다.
흡사 종잇장을 찢는 듯한 미세함과 부드러움.
하도 달콤해 씹는 감각조차 없이 몇 번 침에 적셔지니 그만 꿀떡 넘어가 버렸다.
곁의 둥그런 은쟁반이 활짝 열린 클로슈에는 드레싱이 잔뜩 쳐진 신선한 샐러드가 산뜻한 산취를 발산했다.
상큼하고도 신선한 채소의 진가를 전력으로 돋보이며 입안 가득 알싸한 식감을 선사했다.
오른손을 내뻗으면 딱 닿는 적당한 위치, 레드 와인이 목까지 차올라 찰랑대는 와인잔을 손바닥으로 받쳐 들이켰다.
코끝까지 치미는 아늑한 포도의 향과 목덜미로 진득하게 꿀렁대는 달콤함.
잔을 비움과 동시에 리나 씨가 양손으로 공손히 받쳐든 와인병을 들고 와서 섬세히 따랐다.
팔까지 올라오는 검은 장갑을 낀 손들이 아닌, 어여쁜 백옥색의 새하얀 맨손들이다.
꿈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우며 하나하나가 맛난다.
“훌륭하군…….”
이 많은 것들을 나 혼자 먹기도 무리다. 단 한 명을 위해, 과분할 정도로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만찬이었다.
이렇게나 호사스러운 진수성찬이 차려진 장탁자에 앉은 사람은 좌장인 나뿐이다. 그리고 곁에 시립한 하녀인 리나 씨.
본래는 좌우로 귀족들이 들어차 시끌벅적하고, 악사들이 류트와 하프를 켜는 감미로운 음률 속에 만찬이 진행되어야 했을 것을.
하지만 명백한 세팅이겠지.
그런 것들은 불필요하다는 의미. 이 세계에 나와 그녀만이 있으면 된다는 의지.
결국 자고 나면, 잊을 꿈에 불과한 것을.
벌써부터 알싸한 취기가 목덜미를 달구며 치미는 것을 느끼며, 손바닥에 받친 와인잔을 몇 잔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마력을 끌어올리면 취기를 몰아낼 수 있지만 그런 자리가 아니다.
모든 빈객들이 소거된 혼자만의 만찬을 즐겼다.
“꿈이라 믿을 수 없을 굉장한 맛이로군……. 모두가 진미야.”
“그렇지요? 주인님이 평시에 즐기시던 식단만을 참조해서 구현했습니다.”
양손을 앞치마에 모아 공손하게 시립하고 있던 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날렸다.
식사를 마친 나는 허벅지에 얹혔던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나의 식사 개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리나 씨가 현숙한 눈길을 흘렸다.
“……주인님, 혹시 무언가 필요하신 것이라도?”
“아니, 없다. 네가 정말 훌륭한 식사를 차려 주었구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그녀가 공손히 손을 모으며 고개를 꾸벅 낮췄다.
“저희 몽마는 주인님과 같은 식사도 가능하며, 섭취한 음식물을 마력으로 전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양분을 얻기까지 훨씬 많은 열량이 필요하죠…. 몽마는 정기, 흡혈귀는 생혈, 인랑은 폭식…. 각자 정해진 섭리죠. 궁극적으로는, 어떤 종족과도 완전히 같은 식사를 공유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너와 나는 공동체인 것이지. 각자 다른 세계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다가, 너무도 뒤늦게 조우한 운명. 서로의 부족한 점과 필요로 하는 점을 메우며, 기꺼이 완성을 향해 함께 헌신하는 존재. 나는 전생에서도, 전전생에서도, 어떤 모습이라도 우리는 언제나 운명이었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 자부한다.”
나의 말에 그녀의 눈빛에 돌연 커다란 떨림이 일어났다.
그 어떤 것으로도 겉잡을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였다.
꾹 감겨져 파르르 떨리는 두터운 금빛 속눈썹들이 아름다운 눈매.
일순간 떠올랐던 어떤 감정을 힘겹게 갈무리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새를 벌렸다.
“…주인님, 언제나 감사해요.”
“아니, 뭘. 너가 당시 날 구한 것에 언제나 감사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몇백, 몇천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위해 살아간다고.”
나의 답변에 그녀가 다시금 그윽하게 눈매를 내리깔았다.
격정적인 감정의 폭풍은 현재 그녀에게 부여된 메이드의 격식을 철저히 흔들고 있었다.
나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잠잠히 말했다.
“이따금 이렇게 꿈에서 이야기해 오는군.”
“꿈이란 것이 아쉬우신가요…? 제가 당신과의 꿈의 기억을 삭제하고는 한다는 것도…?”
“어째서 나의 기억을 지우는 거지?”
그녀가 슬픔과 기쁨이 혼재된 복잡한 표정을 떠올렸다.
“……쑥스러우니까요. 현실에서는 말하지 못할 것도, 이따금 무심결에 내뱉곤 하거든요….”
“우리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
“여자의 치부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본디, 꿈이란 것은 결국 잊혀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개인의 일기장에 기록해 두지 않는다면요. 유달리 강한 기억력이 아니라면야….”
“그건 어차피 잊어버릴 내용을 어째서 꿈에서까지 말하는지 설명이 되지 못하는데. 그러면 현실이든, 꿈이든, 아예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나는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포갠 양손을 매만져댔다.
“주인님이 이따금 요청하시는 캠비온… 제가 낳을 우리를 반반씩 닮았을 어여쁜 반몽마…. 그것도 호응하지 못해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일이 먼저예요…. 모든 연금술을 탐구하는 자들의 비원인, 진리의 발견과 근원의 도달…. 짧디짧은 통상적인 마생 천 년을 쏟아부어도 턱없이 모자랄 방대한 과업…. 그 숙원들이 해결되기 전에는, 세상사의 어떤 일에도 흥미가 가질 않는 걸요…….”
그녀의 고개가 한없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면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있어서 그녀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담담히 호응했다.
“여자가 낳은 자신의 아이를 보고 싶은 것은 남자로서는 당연한 거야. 하지만 내가 아이를 원해도, 너가 극구 싫어한다면 할 수 없는 거겠지.”
그녀가 겨우 고개를 들췄다.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 핑크색 눈빛은 금세라도 부서질 것처럼 잘게 떨린다.
“저는 온갖 괴짜들과 별종들이 많은 몽마들에서도, 독보적인 여자에요…. 그러니까 몽마 주제에 창관에서 물장사는 안 하고, 연금술이나 하겠다고 땅을 파고 있죠. 주인님이 없으셨다면… 저는 영원히 정체해 버렸을 거예요. 한동안은 되지도 않는 머리와 수단으로, 애써 탐구하며 낑낑 머리를 썼겠죠.”
서큐버스 메이드의 구구절절한 회한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순간은 한계를 만나 때려치웠겠죠…. 마왕군에서 나오는 봉급으로 술과 노름, 폭력과 약탈에 투신하는 적지 않은 마족들과 다르지 않게, 낙오자들의 무리에 합류해서 방탕한 여생을 마무리했겠죠…. 주인님을 만나서, 여러 면모로 비약적으로 상향을 겪을 수 있던 은혜에 관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주인님과 마신님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그녀가 재차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저게 과연 평시에 보던 리나 씨의 모습이 맞나?
혹시 자신이 연기하는 메이드 역할에의 과몰입인 걸까?
으스대는 고질병이 있어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굽히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던 자신만만하고도 당돌한 그녀가.
아니면 어차피 나의 기억을 지울 것이기에, 그녀의 감춰진 진짜 본모습을 보이는 걸까?
평시에 내게 보이던 모습은 가짜고, 이게 그녀의 진짜 성격이란 걸까?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하고 낮추려 들지 마….”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어졌다.
설령, 이 꿈은 또 결국 잊어버리고 말더라도.
“너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오롯이 빛나는 태양과 만월을 투영하는 여자다. 너의 깊고도 짙은 도량은 칠흑해 아드리안보다도 깊으며, 어떤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열정은 마계의 밤하늘의 붉디붉은 안티 스텔라보다도 붉게 타오르니까. 적어도, 현실에 상주하는 나머지 300만이나 되는 버러지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나는 여지껏 어떤 관계에서 보인 눈빛보다도 뜨겁게 그녀를 응시했다.
“통상적인 마족들이 웬 빈사 상태의 흄을 구조했을 것 같나? 천만에. 그냥 방치해서 헬하운드들의 개밥이 되게 했거나, 주웠다 하더라도 더한 마개조를 가하거나 마기에 버틸 수 있는 구속구로 속박했을 거다. 이 마계에 수없이 많은 지상에서 납치된 다종족들의 노예들처럼. 하지만 너는 결코 그러지 않았지.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곧게 검지를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너는 실력으로나, 성품으로나, 결코 그런 쓰레기들에 뒤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부족했던 것은 타고난 그릇의 한계였을 뿐이지. 그건 현재 드높은 지점을 향해 탄탄히 비상하는 추세고.”
이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연인이라는 점을 떠나, 극히 사적이면서도 객관적인 평가.
“허…… 허, 억!”
놀란 그녀가 손으로 쩍 벌려진 입을 가렸다.
가려진 손 너머의 호흡이 거칠게 헐떡이며, 벚꽃처럼 진한 핑크빛 눈망울에는 물기가 그렁대기 시작한다.
금세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처럼 후들대기 시작한다.
감정을 필사적으로 추스르는 그녀가 거듭 눈매를 깜빡여 물기를 털어낸다.
조심스럽게, 침조차 메말라 갈라진 목소리를 흘린다.
“당신이 이 세상에 전생하셨을 때……. 제가 강제적으로 가했던 행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계신가요……?”
나는 뒷머리에 깍지를 끼며 넉살 좋게 받았다.
“그런 건 있지도 않았어. 되려 어마어마한 포상이었지. 야한 미인에게 봉사받는 걸 싫어할 남자는 없을걸?”
가려진 손 너머의 홍채가 바스라질 듯이 떨어대는 그녀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뱉어낸다.
“빈사 상태로 숲에 쓰러져 죽어 가던 당신을 주워, 음탕한 음마인 저의 욕구를 위해, 무단으로 개조해 버린 것은요……?”
“이 세계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까 상관없어. 말했다시피, 그건 남자한테 어마어마한 포상이었어.”
결국 서럽게 오열하는 그녀가 소리 높여 흐느꼈다.
인형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정묘한 이목구비가, 비통감에 가득 찌푸려지며 흐려진다.
핑크빛 원색의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들에서, 끊임없는 빗줄기가 흐른다.
그녀를 깊게 짓누르고 있던 마음의 응어리가 완벽히 해소된 순간이었다.
“지, 크……! 흐, 흑흑흑……!”
나는 재차 물었다.
“어째서 이따금 이렇게 꿈에서 이야기해 오는지 아직 말해 주지 않았는데.”
보는 사람의 혼이 부서지는 것처럼 구슬피 흐느끼는 그녀가 애절하게 말했다.
“현실의 당신을 보고 있으면…… 울고 싶어지니까.”
아무리 가려도,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의 빗줄기들이 손등을 적신다.
“현실에서 당신에게 말한다면 울 것만 같기에…… 그래서, 이렇게 꿈에서 말하는 거예요.”
서럽게 오열하는 그녀가 양손으로 눈매를 가렸다.
“그래.”
나는 무뚝뚝하게 답변했다.
“감정은 쌓이기 전에 터트리는 편이 좋아.”
참으려 해도, 끝도 없이 솟구치는 폭발적인 감정이 흘러넘치는 하소연이 된다.
“어째서…… ! 매번, 그렇게. 위험한 곳에 몸을 내던지는 건데요……? 그러다가, 정말 죽어 버리면 어쩌려구요……?”
나는 의자를 완전히 그녀의 방향으로 틀었다.
“당신이 죽으면……! 도대체, 저는 어떻게 살아가라구요?”
나는 굳게 그녀를 주시했다.
“자신의 여자를 위험한 곳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까.”
묵묵히 검지를 들었다.
“나의 서큐버스.”
그녀를 가리켰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
“허……억!”
일순간 그녀가 모든 동작을 멈췄다.
터질 듯이 커진 눈망울에서 일시에 모든 눈물이 흘러내려, 비구름이 걷힌 하늘처럼 맑아진 눈망울만이 깜빡인다.
약간의 정적. 나는 묵직하게 침묵을 깼다.
“나는 너를 수호하는 집사이자 기사다. 몇 번을 새삼스레 말해야 하나?”
메이드복의 서큐버스가 지긋이 고개를 숙였다.
“그, 렇군요…….”
“그래.”
나는 잠잠하게 한없는 동의를 표했다.
그녀는 완벽한 침묵에 빠져들어 조용해졌다.
나는 굳건한 시선으로 고개 숙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날 굳게 정했던 나의 맹세. 어떤 존재의 근본도 뒤흔들 세찬 풍파가 들이닥치더라도, 나의 신념을 결코 깨부수지는 못해. 그것은, 너를 만났을 때 굳어진 결의. 나의 굳은 서약이다.”
잠시 고요한 침묵이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나의 꿈에 들어온 장본인. 이 환몽의 세계를 구축한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녀가 결정한다면 이 꿈의 세계는 즉각 파열하는 유리창처럼 깨져 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이 꿈은 잊게 되겠지.
그녀가 딱히 기억을 유지시키지 않는 이상, 나는 필연적으로 잊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낌새가 없는 것을 보아, 그녀는 아직 나의 꿈에 체류하고 싶은 듯했다.
얼마나 고개 숙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정지한 듯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던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췄다.
모든 눈물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인형처럼 너무도 정교하며 영묘한 이목구비에는 홀가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에 대한 죄책감, 발전이 뒤쳐지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모든 콤플레스를 마침내 떨쳐낸 그녀가 후련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당시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연기하기가 매우 힘들었던 압도적이며 주도적인 몽마에 가깝게 돌아가 있었다.
완전히 기세를 일변한 리나 씨가 요염히 스텝을 내딛었다.
그에 맞춰 연회장의 모든 조명들이 깜빡 점멸하며 순간적으로 불이 꺼졌다 켜졌다.
“주인님…….”
그녀가 영혼조차 녹아들 듯한 달콤한 애성을 흘리며 다가왔다.
스텝에 맞춰 만찬장의 모든 촛불들에 몽환적인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휙 켜졌다 훅 꺼진다.
서큐버스 메이드로부터 진한 몽마향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꿈이라서, 깨면 잊는 게 아쉽다고 하셨나요?”
그녀로부터 발산되는 몽마향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드넓은 연회장에 화향이 가득 차오를 정도였다.
그에 반응한 나의 하물이 빳빳하게 곤두서 연미복의 바지를 찢을 듯이 불뚝댔다.
나의 발치까지 다가와 발끝을 맞댄 그녀가 무릎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기울이며 보는 요염한 암고양이 같은 인상의 치명적 미인.
돌연 그녀가 양손으로 원피스의 치맛단을 훌쩍 들췄다.
여성의 금기와도 같은 비소가 펼쳐진 순간 시선이 집중되었다.
언제나 봐왔기에 이제는 나의 몸처럼 느껴지는 비경, 하지만 비부에 가파르게 매몰된 T팬티와 연결된 좌우의 가터벨트, 밑으로 다시금 이어지는 다이아 패턴의 스타킹이 극상의 조합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으로부터 늘어져 살랑대는 악마의 꼬리.
서큐버스가 입고 있으니 음탕함의 결정체가 따로 없다.
그녀가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나의 상석 좌우의 팔걸이가 스르륵 녹듯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평범한 의자에 앉은 형상이 된 나에게 요염하게 왼다리를 들추며 다가왔다.
들춰진 오른다리도 함께 다가오고는, 부드러운 쿠션에 앉듯 사뿐히 착석했다.
따스한 온기, 그리고 육덕진 체중이 나의 맞붙인 허벅지에 얹혔다.
그렇게 나의 허벅지에 올라탄 형상이 된 그녀가 양팔로 나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보면서 탐닉했을지 모를, 허나 이제는 자못 달라진 핑크빛 홍채가 타오르는 열정을 머금고 나를 주시한다.
나는 양손을 낮춰 그녀의 스타킹에 감싸인 두툼한 엉덩살들을 잔뜩 움켜쥐었다.
“현실로 헤어나기 싫을 정도로 황홀한 꿈이라면…… 깨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몽마에 의한 희생자들의 최후의 꿈인데.”
휘감은 팔목을 나의 목덜미에 고정하고, 적당히 허벅지를 들썩대는 그녀가 안정적인 자세를 잡았다.
이윽고, 녹을 듯한 애성으로 속삭인다.
“주인님께 봉사하는 것은, 메이드로서의 본분……. 그저, 가만히 맡겨 주시겠나요?”
달콤히 웃는 그녀가 그윽히 눈을 감았다.
너무도 느릿하게 입술을 내밀어 온다.
나의 서큐버스가 키스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