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124, 취향
* * *
아무래도 송하라 양은, 생각보다 몸에 물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의 수둔을 일으킬 수는 없을 테니까.
“콜록콜록!”
그녀가 음료수를 잘못 삼키며, 테이블 위로 넘친 음료수가 보인다.
그래도 입안에 있던 음료수는 어떻게든 삼킨 모양인데··· 컵이 대차게 한 번 흔들리면서 테이블로 쏟아지는 건 막지 못했다.
나로서도 살짝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어··· 괜찮으세요?”
그냥 적당한 주제 같아서 꺼낸 것뿐인데, 설마 이렇게 치명타로 들어갈 줄이야.
방금 전의 이상형 이야기는 스무스하게 잘 넘어가더니, 이번에는 당황한 걸 숨기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공격이 연타로 들어가서 그런가. 예상치 못한 일격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일단은 그녀를 도우기 위해 냅킨을 가져와 건네주긴 했다.
그제서야 조금 진정하는 그녀.
이윽고 냅킨으로 입가와 테이블을 닦아낸 그녀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아니, 갑자기 그 주제는 왜 꺼내요!”
나는 억울했다.
‘아니, 그게 공격이 될지 누가 알았냐고···.’
나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했을 뿐이지, 그게 태클로 들어갈 줄은 1도 생각지 못했단 말이다.
···물론, 이성 앞에서 야짤 얘기하는 건 살짝 이상한 거 같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억울했다.
“그, 언젠가는 해야 할 얘기기는 하잖아요. 이미 돈도 받았고.”
“······.”
실제로 이것도 맞았다.
솔직히 20만 원 날먹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언급한 것 뿐인데, 저런 반응일 줄이야.
“···윽.”
상대방의 빨개진 얼굴이 보인다.
오랫동안 기침을 해서 그런가,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가 배여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절정 직전의 여인을 보는 거 같아, 살짝 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뇌 정지라도 온 듯한 모습.
“그, 그렇긴 한데···.”
야짤이라는 게 그렇게 창피한 걸까.
결국 그녀는 몇 번 입만 뻥긋거릴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색했던 공기가 한 층 더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한 눈짓만이 오갔다.
결국 이 기묘한 침묵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끝이 나게 되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누가 봐도 지금 이 자리를 피하려는 듯한, 뻔한 변명이었다. 아마 잠시 밖에 나가서 머리 좀 식히려는 생각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향하는 잠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대화 주제를 잘못 꺼낸 모양이다······.
*
“후우···.”
화장실에 들어온 후, 송하라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고작 질문 몇 마디 들은 것뿐인데, 얼굴이 무척이나 화끈거리고 있었다.
설마 지금 저 분위기에서, 저런 걸 질문할 줄이야.
“와, 씨··· 깜짝 놀랐네.”
아무래도 이세원이란 인간은 사람을 당황시키는데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연달아서 타격을 줄 수가 없을 테니까.
갑자기 커미션 얘기라니···.
물론, 커미션 자체의 문제는 없다. 실제로 20만 원을 선지불 하기도 했고, 언젠가는 얘기를 나눠야 하는 것도 맞으니.
아무리 금수저인 그녀라도 20만원 정도면 무시하기 어려운 돈이었다.
그런데 그게 현실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평범한 그림 커미션도 아니고, 무려 야짤 커미션인데. 심지어 커미션 받는 작가도 ‘남자’작가였다.
아무리 그가 성적으로 개방적인 성격 같아 보이긴 해도, 이건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이다.
호감적인 이성의 면전 앞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라···.
“으으···.”
상상만 해도 귓볼이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옛날에 자신이 지껄였던 말들이 플래시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대가 ‘남자’인지도 몰랐던 시절에, 카톡으로 지껄여댔던 천박한 말들.
대체 상대방은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런 걸 생각하자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인터넷에선 자유분방한 그녀일지라도, 창피함은 느끼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어떻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긴 했다.
‘후우, 진정하자.’
계속 여기에 박혀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미 화장실 간다는 뻔한 변명으로 자리에서 도망친 상황이다.
이렇게나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도 꽤나 뻘쭘해 할 게 틀림없었다.
물론, 그 인간이 자신을 당황케 한 원흉이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 놔두는 건 아니지.
그렇게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는 다시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고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는 그를 보며 말한다.
“흠흠, 일단 커미션 내용은 나중에 얘기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직접 얘기하는 것보다는 채팅으로 얘기하는 게 편할 거 같아서.”
사실은 얼굴 보면서는 죽어도 말을 못 할 거 같았기에, 채팅으로 보낸다 한 것이지만.
어쨌든 채팅이 더 편한 것은 맞으니까.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세원은 이런 속내를 모르는건지, 눈치없이 다시 한 번 권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셔도 되는데. 저는 이런 거 익숙해서 괜찮아요.”
“아뇨, 꼭. 채팅으로 전해드릴게요.”
“앗, 넵.”
물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생각나는 그림 주제도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주제가 없는 거겠지.
이상하게 그는 성인 웹툰 작가인 주제에, 남성의 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니.
몇 개는 자연스레 걸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거라고 해봐야 이세원을 닮은 남캐를 묶어달라는 거나, 이세원을 닮은 남캐가 침대 아래에서 홀딱 벗은 모습들뿐······.
대체 어떻게 생각나는 게 이딴거 밖에 없는건지. 자기 뒤통수를 한 번 씨게 내려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이런쪽으로 관대한 그라도, 이런 요구를 면전 앞에서 들으면 인상을 찌푸릴 게 분명했다.
결국 이런 쪽의 주제를 걸러내고 커미션을 넣으려면, 속 안에 깊숙히 숨겨두었던 취향을 꺼내야 하는데.
‘······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창피했다.
그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말해줄 수 없다. 만약 그게 밝혀진다면 자신은 창피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커미션 안건은 패스.
송하라는 부쩍 더워진 공기를 식히기 위해, 조금은 사무적인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스케줄은 조정하실 건가요? 아니면 그대로 가실 건가요.”
연재를 미룰거냐, 아니면 그대로 놔둘거냐.
비록 오늘 식사 자리를 위해 끌고 온 명분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언급해야 하는 주제였다.
실제로 오늘 그가 방송을 하면서 스케줄이 좀 꼬인 건 맞았으니.
담당 편집자로서 이런 것 정도는 짚어줘야 하는 법이었다.
“아, 그거 말인데요. 딱히 미룰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일단 그려놓은 그림도 꽤 되고, 오늘 딱히 피곤하지도 않으니까···.”
다행히 다음 대화부터는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처음의 당황스러운 대화는 끝나고, 진지한 일 얘기로 넘어간 상태였으니.
아무래도 서로 돈벌이가 연관된 만큼 진지해질 수밖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진지함과는 반대로 송하라의 눈이 자꾸만 아래쪽으로 향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흠, 그럼 연재일정은 그대로 두는 걸로 하고.”
“네.”
힐끔.
“제가 알기로 작가님 비축분이 없는걸로 아는데, 괜찮으신가요?”
힐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이 조금씩 아래쪽으로 향한다.
“아, 그건 살짝 문제긴 한데···.”
방금 전 커미션 얘기를 하며 잠시 그에 대한 망상을 해서일까.
‘아, 왜이러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의 몸에 시선이 많이 가는 그녀였다.
반팔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가 보인다.
은근 마른 듯하면서도 넓은 등판은, 옷 밖으로도 티가 나고 있었다.
야짤속에서 그녀가 보던 이세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비록 약간의 각색은 있었다고는 해도, 흰 피부에 적당히 마른 몸매는 변함이 없었다.
덕분에 그가 방송에 출연하고 있을 때도 꾸준히 보고 있었지.
···물론 양심상 뚫어져라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선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볼 수 있던 건 참 좋았다.
얼굴은 까지 않는다고 해서 캠은 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설마 몸캠으로 출연할 줄이야.
이러나저러나, 송하라 또한 엄연한 ‘여자’였다.
성욕이 꽤나 강하고. 상대방이 호감 있는 남성이라면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여성.
생리적 현상에 의해 시선이 내려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저, 편집자님?”
문득 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위로 올리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순간 송하라는 낭패를 느꼈다.
‘이런···.’
아무래도 너무 뻔히 쳐다본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자신이 조심했다고 한들, 자꾸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하니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겠지.
살짝···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쫄리긴 했으나.
그래도 일단 그녀는 베테랑 사회인답게 태연스럽게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음? 무슨 일 있나요?”
“아뇨, 별 건 아니고. 아까부터 조금씩 멍을 때리시는 것 같길래."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흐음···.”
그가 잠시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원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뭐, 괜찮아요. 그나저나 이 식당 오랜만에 오니까 정말 맛있네요.”
송하라는 그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다행히 안 들킨 것 같아서.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송하라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식사자리가 천천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