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07, 송하라
* * *
“큼큼··· 그럼 우선 계약서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번엔 내가 리액션을 안 해줘서 그런가, 송하라는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분위기를 전환했다.
이제 보니 그녀가 옆에 찬 크로스백도 꽤나 고급스러운 브랜드였다. 브랜드 이름이 뭐였더라 샤X이었나···.
물론 그것도 반응해주진 않았다.
“한 번 읽어보시고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보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빳빳한 질감으로 이루어진 종이 뭉텅이가 내게로 건너온다.
조항도 여러 개에다가, ‘갑’이니 ‘을’이니 복잡한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계약은 신중히 하는 게 맞았으니 나는 시간을 들여 계약서를 읽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 진짜 작가님이 그 그림들을 그린 거예요?”
그렇게 잠시 독서시간을 갖고 있자, 문득 송하라가 물었다. 딱히 내색은 안 해도 신기함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러면··· 그 제가 신청한 것들도 하나하나 다 확인하면서 그린 거예요?”
“네?”
여기서 나는 잠깐 놀랐다.
설마, 커미션 얘기를 저쪽에서 먼저 꺼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보통 내가 만난 애들은 어떻게든 숨기기에 바빴는데··· 여러모로 새로운 반응을 보여주는 그녀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그렇죠. 제가 계정을 다른 사람이랑 공유하는 것도 아닐 테고. 당연히 일일이 다 그립니다.”
“아하···.”
그녀는 대충 그런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잘 안 들리게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래서 그리기 싫어했던 거구나······.”
아무래도 자신의 채팅 내역을 생각하면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모양.
하긴, 뭔가 생각나는 게 많을테지.
나름 편하게 대화를 자주했던 우리였다.
그래도 이 인간은 채팅으로 별로 민감한 이야기는 안 했지만, 사람은 뭔가 찔리는 게 있으면 괜히 불안감이 생기는 법이다.
“···크흐흠!”
그러다가 잠시 뭐가 생각났는지, 몸을 움찔 떨기도 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점점 붉게 물들고 있는 상대방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도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지, 손에 든 블랙커피를 다시 마셨다.
쫍쫍.
이번엔 아까보다 더 빠르게 커피의 양이 줄어들었다.
마시는 속도만 보면 블랙커피가 아니라, 존나 맛있는 프라푸치노라도 마시는 듯한 모습.
확실히 차가운 걸 마시면 얼굴의 열이 식기는 하지.
당황했단게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
어쨌든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다.
나는 계약서를 읽고, 상대방은 가만히 그런 나를 기다린다.
나름 이름있는 기업이라 그런가, 다행히 계약서는 업계 표준으로 나온 듯했다.
경력 있는 작가면 더 좋은 수익 비율을 받는다고 하던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그래도 궁금한 게 생기면 가끔씩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계약하면 다른 작품들처럼 광고도 받는 건가요?”
“네. 그건 추후 정해지면 다시 안내해 드릴 생각입니다.”
“계약하면 연재는 언제부터 가능합니까?”
“사실 아무 때나 상관은 없습니다. 작가님께서 준비되시면 일주일 안에라도 가능해요.”
“어··· 핀박스에 있는 만화들은 어떡하죠?”
“그건 그대로 놔두셔도 돼요. 대신 정식 연재를 할 때는 만화를 조금 수정해야 할 겁니다.”
잠시 일과 관련된 전문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금수저긴 해도 이 바닥에서 쌓은 경력이 있는지, 상대방은 내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니, 슬슬 계약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상대방의 안내에 따라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지장을 찍었다.
자, 이로서 나는 법의 공인을 받은 합법 노예가 된 것이다.
대기업의 돈을 불려주는 일하는 개돼지가 되었으나,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자유를 약간 잃은 대신 돈은 예전보다 더 들어올 테니 말이다. 거기에다 무려 ‘웹툰 작가(예정)’이라는 직위까지 얻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탁탁.
그녀가 흐트러진 종이 더미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제 할 대화는 모두 다 끝냈고, 계약도 원만하게 잘 끝낸 상태.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맞았다. 상대도 바쁜 직장인일 테니, 오래 잡아둘 수도 없고 말이다.
나는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는 상대방을 보며 생각했다.
‘막 대시하거나 하지는 않네···.’
일단, 상대방이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갑자기 시계를 자랑하는 모습도 그렇고, 애초에 상대방이 채팅창에서 내(아바타)가 취향에 들어맞는다고 직접 얘기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리를 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 제 전화번호입니다. 혹시 또 물어볼 게 있으시면 편하게 연락 주세요.”
“아, 네.”
물론 중간에 전화번호 교환을 하긴 했지만, 이건 사실 일과 관련된 일이라 대시라 보긴 어려웠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진짜 이대로 헤어질 생각인 모양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약간 아쉬운 기분이 들긴 했으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예전처럼 내가 여자에 굶주려 있었다면, 도리어 내가 잡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는 무려 여성 두 명과 야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배부른 부르주아.
상대가 굳이 접근하지 않는다면 나도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상대방의 성적 취향이 약간 무섭기도 하고 말이다.
‘아.’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지.
“아, 그러고보니.”
“네?”
내가 말문을 열자 송하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황갈색 빛 눈동자에서 내 모습이 비친다.
“저희 채팅에서 한 이야기 말인데요···.”
“네? 네에···.”
‘채팅’이라는 말에 아주 약간 상대방의 몸이 움찔 떨렸다. 달콤한 향이 나는 카페의 분위기에 일순 긴장감이라는 것이 맴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혹시 제가 누굴 닮았다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나요?”
꿀꺽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미약한 목넘김 소리가 카페의 음악을 뚫고 도처에 울려퍼진다.
물론 그 조차도 미약해서 금방 사라질 뿐이었지만, 귓가에 들려왔다는 건 확실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후, 상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글쎄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흠, 그런가요.”
“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른 일이 있어서 그만··· 다음에 봬요."
“아, 넵.”
그녀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살짝 미심쩍긴 하지만, 의외로 침착한 모습이었다.
‘모르는 척 하는건가.’
뭐 어쨌든, 이걸로 계약은 끝났다.
문득, 여기오기 전에 두 여자들이 보냈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무슨 해프닝이 생겨 내가 좆을 놀릴까 걱정하던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봐봐.’
결국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잖아.
*
···카페에서의 대화가 끝난 후.
“프흐아···!! 하아, 하아···!”
밖으로 나온 송하라는 곧장 모퉁이로 숨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쿵쿵, 몰아치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날이 뜨거워서 그런가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그녀는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카페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뭐, 뭐야 미친······.”
뭔데 갑자기 저게 현실에서 튀어나오는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남자였다고?’
인터넷에서 보여준 꼬라지만 보면 무조건 ‘여자’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아니, 물론 그림의 취향을 보면 진짜 마조에 레즈비언이 아닐까 가끔 상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덕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우선 당황하고 보는 법이다.
그 예상 값이 크게 벗어날수록, 들이닥친 상황이 인상 깊을수록. 마음속의 동요는 더욱 커지곤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까까지 느낀 동요는 무슨 해일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분명 일을 하러 간 것뿐인데, 느끼는 심적 피로감은 무슨 소개팅이라도 나간 듯한 수준.
만약, 다년간의 사회 경험과 손에 든 블랙커피가 없었다면 분명 겉으로 당황을 드러냈으리라.
그녀는 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하아···.”
사실, 그냥 남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동요를 드러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성비가 개판 난 성인만화 시장이라고 해도, 남성 작가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
실제로 베스트툰 회사에서도 남성 작가가 몇 명 정도 일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에 만난 상대방은 그냥 평범한 남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외모가 좀 잘생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채팅창에서 꼴린다고 희롱하던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다.
그걸 회상한 그녀는, 잠시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생각해보니 채팅에서 한 말실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으으!”
미친, 왜 그런 말을 해가지고서는!
덕분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는가.
심지어 그가 마지막에 채팅 내용을 언급했을 때는, 무슨 목 앞에 칼날이라도 들이밀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설마 그걸 그쪽에서 먼저 언급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상대방도, 자신이 호감이 있다는 걸 알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그 캐릭터가 현실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가의 지인 수준이 아니라, 그냥 작가 본체였다.
“···응?”
그렇게 혼자 여러 감정을 느끼며 발작하고 있자,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그렇다는 건. 애초에 자기를 보면서 그런 그림들을 그렸다는 것 아닌가?
‘···미친놈인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단히 실례되는 생각이었지만, 자동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자기 몸을 사용해서 야짤을 그릴까.
나르시시즘에 걸린 게이라도 쉽게 행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이세원이 들었다면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며 오열하며 변명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후, 이럴때가 아니지.”
아무튼 그렇게 한참 동안의 발작이 끝난 후.
그녀는 모퉁이에서 나와 자신의 회사로 향했다.
좀 이상한 남자같이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침 연락처도 교환했으니. 이걸 계기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다.
“아 팀장님 오셨어요?”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자 자신의 부서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 한 명이 자신을 반겼다.
그녀는 그 직원에게 다가가 말했다.
“응, 오자마자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혹시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부탁이요? 뭐, 상관없긴 한데··· 무슨 부탁하시려고요.”
본래라면, 그녀는 계약만 주도할 뿐.
그다음에는 따로 담당자를 배정해 주는 게 보통이었다.
부서의 팀장인 그녀는, 이미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으니까.
원래 이번에도 대충 알려줄 것들만 알려준 후, 상대방의 성격에 맞게 담당자를 배정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번에 만나고 온 작가님. 내가 담당자로 들어가려고. 그러니까 서류에 기입 좀 해줘.”
“어··· 담당자요?”
“응.”
“저희야 상관은 없는데, 팀장님은 괜찮으세요?”
송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히려 무조건 자신이 맡고 싶었다.
“그럼 알았어요. 헤헤, 직원하나 일 줄어들었다고 좋아 하겠네.”
그렇게 송하라는 이세원의 담당 편집자로 들어갔다.
앞으로 일과 관련된 얘기를 하려면 좋든 싫든 자신과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만나는 시간도 길어질테고, 서로 친밀해질 기회도 생기겠지.
“후, 후후···.”
잠시 그녀의 행복회로가 돌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