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03, 상상도 못한
* * *
“뭐, 뭐야.”
문자가 온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하필 상대방 뒷조사를 하고 있을 때 연락이 오다니,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다.
혹시 내 집안에 몰카라도 설치되어 있는 건가? 순간 공포심이 든 나는 재빨리 집안을 훑어보았다.
두리번두리번.
“휴······.”
다행히 설치된 몰래카메라는 없는 모양. 벽에 어디 어두운 구멍도 안 뚫려있고, 묘하게 시선이 나를 쫓아오는 듯한 귀여운 곰인형도 안 보인다.
그러니 qwer1이 지금 보낸 문자는, 그저 우연히 시간이 겹쳤다는 뜻.
[qwer1: 저기요? 작가님 안 계시나요?]
그렇게 혼자 납득하고 있자 다시금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직 조사를 다 못했는데···.’
그래도 일단은 애써 온 문자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나는 키패드를 두드려 상대방에게 답장을 날렸다.
[hala: 네 무슨 일인가요?]
[qwer1: 그냥, 별건 아니고 그림 그리는 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연락했어요]
아무래도 지금 농땡이 피우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기 위해 연락한 모양.
그걸 본 나는 잠시 쓴웃음을 흘렸다.
“이런···.”
안 그래도 그림 그리기 싫어서 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qwer1은 직감도 좋은 모양이었다.
[hala: 그게.. 잘 안 그려져가지고. 일단은 놔두고 있었어요]
우선은 솔직하게 말했다. 잘 그려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잠시 놀고 있던 것도 맞으니.
물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안 그래도 먼저 연락을 해볼까 생각 중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 됐어.’
원래 팩시브 북마크가 막히면 다음 방법으로 커뮤니티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상대가 비씨와 타르탈로스에 남겼을 흔적들. 아마 시간을 들여 그것들을 조사하며 성격을 파악해볼 수도 있겠지.
아무리 그녀가 조심스러워도 게시물을 하나하나 삭제할 정도로 철저한 사람은 얼마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필시 흔적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너무 번거로울뿐더러, 방금 추리를 통해 좀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정면돌파다.
[qwer1: 흠, 그래요? 이번 그림이 좀 어려운가]
[hala: 아뇨 그리기 싫어서요]
[qwer1: ..?]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요청자 앞에서 그리기 싫다고 대놓고 말한다라··· 꽤나 무례한 행동인 것 같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정도 말은 서로 편하게 주고받던 사이기도 했고, 애초에 나는 그리기 싫다고 꾸준히 어필도 해왔으니 말이다.
그걸 무시하고 어거지로 신청한 녀석의 잘못이다.
[qwer1: 그래도 그려야죠. 이미 제가 돈까지 줬는데 이대로 꿀걱 할 수는 없잖아요?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까 편하게 그리세요]
일단 그녀는 별로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멘탈 나간 작가를 케어하는 편집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hala: 하지만... 그리기 너무 싫은걸요? ㅠ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설득당할 내가 아니었다.
[hala: 그리려고 할 때마다 현타가 와서 손발이 벌벌 떨립니다ㅠㅠ 남캐들 가슴근육이 자꾸 머리에서 아른거려요]
[hala: 그럴 때마다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자궁이 큥큥 떨려와요ㅠㅠ]
마치 3살 먹은 애새끼같이, 때 쓰기를 시작한다. 나에겐 자궁 따윈 없지만, 머릿속 가상의 자궁은 마치 동일본 대지진이라도 난 듯 존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기 싫다. 귀찮다. 그리고 싶어도 손에 안 잡힌다 등. 논리 따위는 하나 없이 오직 감정에 의거한 말들을 계속 내뱉었다.
[qwer1: 아니, 이봐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남자 단독 컷은 자꾸 못 그리겠다는 거예요? 다른 요상한 그림들은 잘만 그리면서]
중간엔 qwer1이 짜증 났는지 이런 걸 물어보기도 했다.
“···그야 내가 남자니까.”
자동으로 입안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지만, 그걸 굳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몇 분 정도 떼쓰기를 반복하자 상대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qwer1: 아니, 그러면 어떡하시려고요. 커미션 의뢰 포기할 거예요?]
나는 슬슬 말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톡톡, 키패드를 두드려 문자를 보낸다.
[hala: 그건 아니고. 혹시 커미션 내용을 바꿀 수 있나 해서요]
이게 본 의중이었다. 남캐 짤을 그리기 싫으면, 상대방을 설득해서 내용을 바꾸게 한다.
물론 그 설득은 논리 없이 단순한 때 쓰기뿐이었지만··· 어쨌든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있으면 그게 설득이지.
[qwer1: 내용을 바꾸자고요?]
[hala: 네]
[qwer1: 흠... 상관은 없는데, 저는 이번에도 남자 단독 컷을 신청할 건데요?]
역시, 그렇게 나오는구나.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하긴, 상대방의 일관성을 생각하면 이게 맞겠지.
대체 구속에 얼마나 진심인 건지, 굳이 의뢰 내용을 바꿔도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바뀌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hala: 그러지말고, 다른 건 안 되나요?]
어떻게든 거지 같은 남캐짤을 내가 그리기 쉬운 걸로 바꾼다.
떼를 쓰든, 논리 있는 설득을 하든, 거래를 하든 상대의 마음을 바꿔놓는 것이다.
[qwer1: 흠...딱히 다른 건 끌리는 게 없는데]
[hala: 진짜요?]
사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hala: 그러지 말고, 사람 취향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왜 상대방의 이름은 ‘qwer1’일까?
저 이름에는 과연 무슨 뜻이 있을까?
물론, 당연하겠지만 qwer1이란 이름 자체에는 아무 뜻이 없을 것이다.
그냥 키보드 자판 아무렇게나 치면 나오는 게 저런 영어 이름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방구석 2년 경력의 자칭 심리학 마스터인 내가 말하자면. 저러한 이름에도 숨겨진 의중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름이란 곧, 자신을 가장 쉽게 나타내는 이정표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란 존재를 고정시켜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은 오히려 익명성 위에서 빛을 발할 때가 많았다.
우리의 친구 성아린이 인터넷에서 ‘레이프 합법화’란 이름을 사용했듯이, 글러먹은 우리의 후배 은별 양이 ‘글러먹은나’라는 이름을 가졌듯이.
닉네임이란 사람의 성향을 가리키는 지표가 될 때가 있다.
설령 그것이 qwer1같은 대충 지은 닉네임이라도 말이다.
보통 이런 경우엔 두 가지다.
진짜 순전히 이름짓기가 귀찮았거나.
[hala: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보죠]
아니면 숨기고 싶은 게 있는 부끄럼쟁이 거나.
[qwer1: 아니; 뭘 솔직히 말해요. 딱히 끌리는 게 없다니까;;]
우선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튕겼다.
나는 키 패드를 톡톡 두드려서 문자를 날렸다.
[hala: 정말요? 아니, 남정네 구속하는 그런거 말고 다른 꼴리는 것도 있을 거 아니에요]
[qwer1: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네. 아니 그리고, 있어도 제가 그걸 님한테 왜 알려줘요?]
[hala: 제가 당신의 욕망을 그리는 짤쟁이니까 그렇죠]
톡톡, 문자를 날린다.
다행히 나에겐 회심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hala: 그리고 애초에, 취향이 그런 쪽밖에 없으면 제 만화는 왜 봅니까?]
그렇다!
생각해 보면 qwer1은 처음부터 모순 덩어리인 새끼인 것이다!
분명 내가 평소 그리는 것들은 m끼가 다분한 독자들을 주 목표로 한 것들밖에 없었다.
주로 ‘남자’가 주도해서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야스를 하는 것이 대부분.
애초에 그짝 취향이 없는 인간이라면 이렇게 꼬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인간은 굳이 나한테 찾아와서 S 끼 다분한 그림을 신청했다.
왜? 어째서?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과연, 이 말은 쉽게 반박이 불가능한지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채팅창에는 아무 답장도 올라오지 않고 있지만, 상대방이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모습은 금방 예상이 되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상대방이 답장을 날렸다.
[qwer1: ...후, 알았어요]
드디어 나온 긍정의 말. 그것을 본 나는 곧바로 손들을고 쾌재를 불렀다.
“예에!”
드디어!
이제 좆같은 남캐짤을 안 그려도 된다!
자아, 이제 너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 보아라. 대체 뭘 숨겨둔 것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였는지 슬슬 내보여라.
무얼, 걱정 마라. 무려 그로테스크한 그림까지 그릴 줄 아는 나였다.
웬만한 취향들은 모두 그려줄 수 있으니 편하게 가져와도 된다.
···하지만.
상대방에게서 나온 건 커미션 내용 같은 게 아니었다.
[qwer1: 원래 좀 더 지켜보고 있다가 놀래켜 주려고 했는데, 뭐 상관은 없겠네요]
[qwer1: 잠시만 기다려봐요]
뭔가 의미심장함을 담은 상대방의 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어떻게 놀래 주겠다는 건가.
이윽고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상대방에게서 나온 건 확실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마치 특정 양식을 복사해 적절히 수정한 것처럼, 장문의 문자가 채팅창에 올라온다.
사적인 말투 하나 없이, 오로지 공적인 이야기만 적힌 문자.
[qwer1: 안녕하세요, 현재 ‘베스트툰’이라는 웹툰 연재 플랫폼을 운영 중인 회사 ‘탑 엔터테이먼트’입니다.
현재 hala작가님의 S 바이러스라는 만화를 재미있게 보고 흥행 가능성이 있다 싶어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특히 바이러스와, 야한 부분을 합친 설정은 정말이지 참신하다고 느껴졌는데요, 거기에 더해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릴 넘치게 전개되는 상황은 절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됩니다. 특히 2화에······························]
[qwer1: ······하여, 작가님이 저희 플랫폼에서 정식 연재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 이렇게 계약 제안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것은 어떤 회사의 이메일과, 전화번호가 적힌.
커뮤니티에서만 들어왔던 계약제의 문자였다. 작품의 흥행성과 가능성, 실력 등을 인정받아야만 온다는 연재 제의 문자.
[qwer1: 짜잔~]
그 귀한게 지금 정식 이메일도 아니라, 이딴 커미션 하는 작은 채팅방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걸 본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엣?”
커미션 내용을 바꾸려 했더니 전혀 상상도 못한 게 날아와 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