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101, 거래
* * *
일단 나는 못부터 박았다.
[hala: 일단 말해두겠는데, 방금 전에 언급하신 그 캐릭터는 안 됩니다]
상대방의 의도는 뻔하다.
망가로 내 아바타가 따먹히지 않았으니 커미션으로라도 신청해서 야짤을 얻을 생각이겠지.
거의 은별이 씹물만큼 투명하게 의도가 엿보였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니다.
다른 캐릭터는 몰라도, 적어도 내 아바타가 따먹히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나였다.
‘그걸 어떻게 그려 씨발···.’
일단 내가 자괴감이랑 쪽팔림에 사로잡혀서 그리지를 못한다.
그래도 이은별 때는 내가 하는 입장이어서 그나마 덜 쪽팔렸지.
만약 ‘qwer1’이 신청한다?
첫인상의 느낌으로 보건대 아마 내가 100% 당하는 입장일 것이다.
나 상남자 이세원.
그런 씹게이같은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qwer1: 아니, 왜요 또;; 이 정도면 작품에도 영향 안 가고, 작가님 돈도 벌고 서로 이득 아니에요?]
과연, 내 예상이 맞았는지 상대방은 곧바로 불만을 쏟아냈다.
일단은 설득하는 말로 나에게 물었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언짢음은 숨길 수 없었다.
확실히 상대방의 말대로면 작품에도 영향 안 가고 내 주머니도 두둑해지겠지.
하지만 이건 실리 이전에 내 쪽팔림이 문제다.
[hala: 그래도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가지구...]
일단은 이유를 말하기 전에 사정이 있다고 뭉뚱그렸다.
언제 어디서든 ‘개인적인 사정’이란 치트키나 다름없는 단어였으니.
‘개인적인’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말하기 싫다고 선을 긋는 거나 다름없었다.
[qwer1: 푸,, 저번에는 개인적인 신념이라더니, 이번에는 개인적인 사정이에요?]
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치트키조차 무시할 수 있는 인성을 보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qwer1: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요]
[qwer1: 얼마면 되나요?]
역시나, 사람의 사정 따위는 무시하고 돈으로 회유하려는 개쩌는 인성.
만약 부패한 부르주아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일단 부패했다는 느낌에서 더더욱 부르주아 같았다.
[qwer1: 20만 원 정도면 될까요? 커미션 하나에 이 정도 돈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일단 그녀는 초반부터 2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불렀다.
저번에 비하면 약간 적긴 하지만··· 애초에 커미션 한 장에 20만 원이라니.
일단 커미션 평균가는 두 배를 훌쩍 넘긴 셈이다.
하지만.
[hala: 죄송합니다.]
내 뜻은 변함이 없었다.
[qwer1: 30만원]
[hala: 죄송합니다]
툭툭, 채팅을 치면서 진짜 얘는 뭐하는 새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가격을 막 지를 수 있는 걸까. 내가 ‘죄송합니다’를 친지 단 몇 초 만에 10만 원을 올려 불렀다.
그 말은 즉, 최소한 30만 원까지는 아무렇게나 부를 수 있는 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qwer1: 아니 대체 사정이 뭐길래 이것도 거절해요? 솔직히 말해봐요. 그냥 이러면 돈 더 받고 싶어서 계속 튕기는 거 아니에요? 이러면 저도 좀 기분 나쁜데]
[hala: ㅠㅠ아닙니다. 이번엔 저 캐릭터로는 진짜 못 그려서 그래요..]
잠시 채팅창에서 신경전이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내가 자신의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누구든 가격을 올려치는 새끼가 있으면 인상부터 찌푸려지겠지. 설령 내가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잠시 말없이 기다리자, 상대방에게서 다시 채팅이 올라왔다.
약간의 고민이 담긴듯한 채팅.
[qwer1: ...50만 원]
그걸 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20을 올렸다.
‘미친, 뭐?’
외주도 아니고, 일반 커미션 하나에 무려 50만원이라니?
평균적인 가격대는 아득히 넘어선 값이다. 외주에서도 은근히 비싼 영역이었다.
치킨이 무려 25개나 되는 값이고, 짱깨를 무려 100번씩이나 먹을 수 있는 가격이다.
그런 걸 단 몇 분의 고민 끝에 이렇게 선뜻 제시할 수 있다니···.
‘야짤에 얼마나 진심인 거야?’
상대방의 재력은 물론, 열정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qwer1: 이 이상은 저도 안 돼요. 커미션 한 장에 50만 원도 차고 넘칠 정도로 부른 것 같네요]
확실히 그렇다.
덕분에 나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딱 한번, 자괴감과 창피함을 참으면 50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오게 된다.
다음달 월세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며, 내 돈 사용의 폭도 좀 더 넓어질 수 있겠지.
최근에 타블렛이 좀 낡은것 같은데··· 이참에 돈을 더 모아서 새로 장만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안 돼.’
나는 키패드를 두드려 상대방에게 문자를 보냈다.
[hala: 죄송합니다..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이번에는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네요.]
어차피.
돈은 지금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50만 원이라는 거금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저 아까울 뿐.
현재의 나는 월세를 낼 돈도 충분했고, 가끔씩 치킨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사치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니, 굳이 50만 원을 받기보다는 내 멘탈을 지키는 게 나을 것이다.
내 멘탈은 소중해서 50만원 정도는 기꺼이 포기할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수전노같이 대뜸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렇게 정중하게 거절하는 게 더 나아 보이고.
[qwer1: 흐음...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제가 포기할 수밖에 없죠]
다행히 상대방은 여기서 딜을 멈추었다.
하긴, 이렇게나 여러 번 거절하는데 굳이 가격을 올리기도 그럴 것이다.
한순간에 50만 원짜리 거래가 공중분해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아쉬움이나 그런 게 담기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뜻만큼은 확실히 전했으니. 내가 굳이 튕기면서 가격을 올린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 그런가, 상대방의 기분도 별로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qwer1: 그래도 이건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냥 캐릭터 하나 그리는 건데 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도 아직 궁금증은 남은 모양이었다. 기껏 50만 원 거래 요청까지 했는데, 거절하는 걸 보니 궁금증이 생긴 모양.
그 요청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했다.
‘흠···.’
솔직히 너무 많이 거절해서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는데.
이 정도는 살짝 이야기해도 되겠지.
나는 키패드를 두드려 상대방에게 대답했다.
[hala: 별건 아니고... 그냥 아는 지인 중에 그 캐릭터랑 닮은 사람이 있어서요. 그래서 양심적으로 좀 꺼려진다고 해야 하나...]
물론, 완전히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고.
적당히 거짓을 섞어서 말했다.
아무렴 ‘저게 나다!’라고 제대로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럼 마치 게이같지 않은가.
“······.”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났다.
상대방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한동안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여러모로 불편한 시간이었다.
답이 너무 없어서 그냥 유튜브나 돌아다녀야 생각이 들었을 무렵.
그녀가 답했다.
[qwer1: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서 저번에도 그딴 그림을 그린 거예요?]
앗.
[hala: 아니, 그.. 일단은 많이 차이 나게 그렸어요]
일단 솔직하게 답했다. 실제로 내가 그린 아바타랑 본체는 은근히 많은 차이가 나니까.
사실 분위기랑 체형만 비슷하지, 나름 디테일적인 면에는 다른 면을 많이 넣었다.
[qwer1: ㅋㅋ 그래요. 그렇다고 해요.]
다행히 상대방은 이걸 금방 넘어가 주었다. ‘그렇다고 해요’에서 뭔가 의미심장함이 느껴졌지만.
일단은 넘어가 주는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
하마터면 아는 지인을 자기 멋대로 야짤로 만드는 음습한 녀석이 될 뻔했다.
세상에, 도대체 누가 아는 지인을 야짤로 만든단 말인가?
“······.”
···이건 생각해보니까 은별이군.
‘갑자기 화나네.’
나중에 엎드려뻗쳐 시키고 엉덩이나 때려야겠다. 찰나의 기분 변화에 따라, 은별이의 처우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용건을 끝마친 나는 진짜 진짜로 유튜브에 들어가려고 했다.
거절도 확실히 했고, 대화도 충분히 나눴다. 이제는 서로 좋게좋게 헤어져야 할 때.
드디어 나는 인두겁을 뒤집어쓴 보복운전 차량 새끼들의 최후를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후후, 벌써부터 휴식을 취할 생각에 전립선이 찌릿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때.
띠링!
다시 울리는 문자 소리.
‘이런 시발.’
좀 쉬자.
나는 욕지거리를 날리면서 다시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메신저는 ‘qwer1’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할 이야기가 남은 모양이었다.
[qwer1: 잠시만요, 그러면 그 캐릭터 말고 그냥 평범한 커미션으로 신청할게요.]
아무래도 커미션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남아있는 듯했다. 내 아바타가 안 되니 그냥 일반 야짤을 신청하려는 모양.
나는 조금 놀랐다.
‘대체 야짤에 얼마나 진심인거지?’
어떻게든 뭔가를 얻어 가고 말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뭐 이번에는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고, 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hala: 네 가능합니다. 근데.. 이번에 요청할 것도, 저번에 신청했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인가요?]
[qwer1: 네. 아, 그래도 그쪽 취향 고려해서 특별히 돈은 추가로 지불할게요^^]
qwer1이 저번에 신청했던 것은, 금태양이 밧줄에 묶여서 따먹히는 그림이었다.
약간의 눈물이 섞인, 분한 듯한 얼굴로 위쪽을 쳐다보는 표정이 일품인··· 내 입장에선 그리기 참으로 좆같았던 그림.
아무래도 상대방은 이번에도 똑같이 그러한 취향의 그림을 신청할 모양이었다.
‘후, 그건 좀 그런데···.’
뭐 그래도 이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니까. 거기다가 돈까지 추가로 준다고 하니까 무작정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나는 상대방에게 무슨 그림을 요청할 건지 물었다.
다행히 그 정도는 내가 그릴 수 있겠다 싶은 그림이었다.
S 바이러스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를 어디 감옥 같은데 묵어달라는 내용. 당연히 옷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이번에도 구속이구나.’
아무래도 우리 qwer1친구는 구속에 진심인 모양이었다.
돈 많은 양반이 S기질이 다분하다는 게 좀 슬펐다.
내 주류 구독자랑 비슷하게 M기질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받을만한 요청이었다. 약간 역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멘탈이 크게 상처받지 않을 정도.
이곳에서 지내면서 나도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다.
자, 이제는 돈 문제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hala: 얼마를 주실건가요?]
나는 지금 유튜브가 보고 싶다. 쓸데없이 말 돌리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qwer1: 20만원]
[hala: 흐음...]
저번에 받았던 거에 비하면 애매한데.
[qwer1: 너무 그러지 마요. 애초에 20만 원도 많이 부른 거잖아요. 일반 커미션 가격에 이 정도면 거저먹는 거 아닌가요?]
하긴, 그렇긴 하지.
보통 평균적인 커미션의 단가는 7만 원 정도로 알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개개인마다 차이가 극명하기는 하지만··· 20만 원 정도면 평균가의 거의 3배나 다름없는 가격이었다.
사실, 저번이 특이 케이스인 편이었다.
그때는 그런 그림이 처음이기도 했고, 내가 여러 번 튕기기도 했으니.
상대방도 딜을 했을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나는 그냥 수락하기로 했다.
[hala: 22만원]
[qwer1: 그 정도야]
대신 치킨값 한 마리 정도는 올려서.
이 정도면 충분한 값이라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이고 뭐고 지금 당장 유튜브로 빠져들어가고 싶다.
그래서 대충 거래를 마친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거래였고, 상대방도 합리적인 가격에 만족스러울 테니.
드디어 나는 희희낙락하며 유튜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좀 더 유들유들 해지는 기분이었다.
침대의 포근한 감각이 온몸을 감싸고, 자극적인 영상들이 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조금 깨닫는 게 늦었다.
[qwer1: ^^그럼 잘 부탁 드려요]
야짤에 50만 원까지 지를 수 있는 새끼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