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6, 캣파
* * *
사람 간의 분위기란, 꽤나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다.
한참 우울하고 불편한 분위기라도, 막상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경우도 많고.
또는 그와 반대급부로 편안하게 풀려있던 분위기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급격하게 굳는 경우도 많다.
형체도 없고, 무게도 없으나 ‘분위기’는 확실히 우리 곁에 맴돌며 사람 간의 감정을 조종한다.
사람의 직감이란 외외로 민감해서 그런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캐치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지금, 그 직감을 발휘해서 근처의 공기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도 시팔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
“······.”
차차 풀어지던 공기가 다시 굳어지는 데에는 단 한 마디이면 충분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반전이라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시선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하하, 그렇겠네요···. 그래도, 아마 알고 지낸 시간으로는 제가 더 많을 거 같은데요? 아무래도 같은 학교다 보니까.”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이은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입은 웃는데 이상하게 눈가에 유쾌함은 없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린이가 태연하게 물었다.
“서로 과가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서로 그리 자주 보지는 못했을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제가 더 많이 만나고 얘기도 많이 해보지 않았을까요? 아예 사는 동네가 다른 누구보다는 가까울 테니까~.”
순간, 아린이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가 은별이에게 술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아하, 그런데 왜 잠은 내가 먼저 잤을까? 그렇게 만날 시간이 많았으면서 말이야.”
명백한 조소가 아린이의 입가에 담긴다. 비웃는 것이었다.
아린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글쎄, 같이 술을 마신 적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하.”
은별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알코올을 목 안에 넘긴다. 속에서 올라오는 열불을 차디찬 소주로 달래는 모양이었다.
둘의 근처에서 무형(無?)의 칼날들이 슝슝 날아다녔다.
나는 무서웠다.
좀 많이.
‘너희 왜 그래···.’
너희 아까까지 사이 괜찮았잖아···.
서로 어색하지만 자기소개도 하고, 대화도 스무스하게 잘 이어나갔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서로한테 은근슬쩍 살(?)을 날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캣파란 건가··· 역전 세상에도 캣파란 존재하는 건가······.
살다 살다 내가 이런 상황에 빠질 줄은 몰랐다.
그 중심이 나란 것에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살벌한 분위기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러다 싸움 일어나는 거 아닐까 몰라.
‘이,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그래서 나는 무슨 개소리라도 씨부려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주제를 다른 방향으로 트는 것이다.
나는 젓가락으로 양배추 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들아, 이 오코노미야끼 안 먹어? 맛있는데.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어버린다?”
예로부터 음식이란 모두의 관심사인 법!
지금 이 순간조차도 오코노미야끼는 음탕한 가쓰오부시 냄새를 흩뿌리며 자신을 먹어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유혹한다면 저들도 안 넘어오고는 못 배기리라.
“맘대로 하세요.”
“다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술 좀 더 시켜주라.”
“아, 맞네 술 다 떨어졌어요.”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냥 술이나 더 시키라는 대답뿐.
“아, 으, 응···.”
나는 쭈구리 된 채 말없이 소주 2병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들··· 서로 딜교를 하면서 대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소주 병들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탁!
그때 이은별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살짝 붉어져 있는 그녀의 볼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아린이의 몸을 훑었다.
그러고는 살포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먼저 자서 좋겠네요. 그런데 이거 어쩌죠? 그래도 몸매는 제가 더 좋은 거 같은데. 제가 평소에 운동을 좀 자주 하거든요.”
앗, 방금 주제를 돌렸다. 뚫어낼 방법이 안 보이니, 다른 길을 공략하려는 것이다.
비열하게 웃는 은별의 모습은, 미안하지만 약간 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안주를 먹었다.
음, 역시 오코노미야끼는 맛있다.
내가 밀가루를 좋아해서 그런가, 그 특유의 소스와 밀가루 맛이 잘 어우러졌다.
양이 좀 더 많았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전 종류다 보니 먹어지는 속도가 꽤나 빨랐다.
슬슬 다 떨어져가는데 다음 안주로는 감자튀김이나 시킬까. 양으로 따지면은 감자튀김만 한 게 없으니까.
탁!
그때 아린이의 눈이 가슴을 향했다. 표정에 약간의 우월감이 담겨 있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그쪽은 어느 한 부분이 약간 부족해 보여서 말이야.”
아니다.
세상에는 양이 전부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저 양 하나를 보고 감자튀김을 시키기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맛은 있지만, 너무 무난한 맛이다.
애초에, 지금 이 상황에서 기름진 걸 먹었다간 속이 뒤집힐지도 모르고.
“에이, 크기야 기준선만 넘어가면 되죠~. 그것보단 비율이 좋은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 얘는 큰 걸 좋아하는데? 그리고 나도 비율 좋아.”
그래서 나는 그냥 마른안주에 있는 먹태를 시켰다. 그 왜, 황태랑 거의 똑같은데 이름만 다른 거 있지 않은가.
별로 느끼하지도 않고, 깨작깨작 먹기 좋으며, 맛도 그리 자주 접해본 맛은 아니었으니. 주문할 가치는 충분했다.
이야, 나의 선견지명에 감탄이 나오려고 한다.
“크윽···.”
그때 이은별이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계속된 공방전 끝에 이제 할 말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세상에, 아린이가 이렇게 말빨이 좋았을 줄이야.
그 소심한 찐따는 어디 가고 지금은 한 마리의 여우 새끼가 군림하고 있었다.
성장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절로 웅장해졌다.
아니, 이걸 성장이라고 봐야 하는가···.
나는 슬슬 나서기로 했다.
“자, 자. 얘들아 그만.”
손바닥을 휘휘 내저어 그녀들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이대로 계속 뒀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물론, 둘 다 상식은 있으니 몸싸움까지 벌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더 이상 분위기가 나빠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거 바깥에서 보면 꽤나 재미날 거 같은데, 정작 중간에 끼인 나는 죽을 맛이었다.
“서로 그만 으르렁대고 진정하자. 음······.”
나는 잠시 그녀들을 보며 잠시 미래를 그렸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술만 마시고 헤어지는 게 좋겠네.”
“네?”
“어? 잠깐 뭐?”
순간 두 여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혈색이 돌아 붉게 상기된 두 명의 얼굴이 보인다.
약간의 당황이 서려있는 얼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이 자기도 뭐 하잖아. 그렇다고 억지로 할 수도 없고.”
쓰리썸을 못 한다는 게 약간 아쉽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억지로 모텔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미 원하는 바를 이루기도 했다.
애초에 3P는 그냥 던져본 말이었고, 본 목적은 둘의 존재를 서로에게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서로 얼굴을 맞댄 시점에서 본 목적은 이뤘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다른 누군가랑 잔다고 해서 딱히 뭐라할 애들도 아니었고, 설령 하더라도 내가 충분히 달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쯤에서 대충 마무리하는 게 맞다.
쓰리썸을 못한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좀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적당히 먹고 마시다가 들어가자.”
어차피 만날 시간은 많다. 오늘이 안 되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고, 다음이 안 된다면 다다음이 있다.
여러 번 만나다 보면 서로 사이도 좋아지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나는 너희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나에겐 둘 다 얼마 되지 않는 소중한 인연이란 말이야.”
이곳에 떨어지고 친구하나 없었던 나에게, 겨우 생긴 말동무이자 친한 친구였다.
굳이 야스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둘은 소중했다.
그러니 그 둘이 말싸움하는 건, 개인적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닌 것이다.
“······.”
“······.”
내 말이 끝나자, 테이블에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이토록 진정성 있게 말했는데, 여기서 더 딜교를 나누기에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편하게 대화를 이어가기도 어색할테고.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음···.’
괜히 말했나.
역시 나는 이런 진지한 말과는 안 맞았다. 오글거리는 분위기랑은 더더욱 안 맞았고.
봐라, 괜히 나섰다가 분위기만 씹창나지 않았는가.
이런 씨발, 덩달아 내 얼굴도 오글거려서 빨개지려 하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이미 먹태를 시켰는데··· 이런 분위기에 먹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배에서 잠시 고통이 올라왔다.
꾸르르르륵!
장이 요동치는 소리. 그 불쾌한 감각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씨발.’
타이밍 하고는.
오코노미야끼를 너무 맛있게 먹었나. 아니면 매운 짬뽕탕이 원인인가. 배에서 벌써 내보내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내 대장 속에서 이 씨부럴것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거 못 막는다.
여러 생리현상 중 가장 위험하다는 급똥이었다.
어떡하지··· 아무리 그래도 두 여성 앞에서 “나 똥 때리고 옴”이라 말하기는 좀 그런데.
그렇다고 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참을 자신도 없었다.
“나, 잠시 바람 좀 쐐고 올게.”
그래서 결국 나는 적당한 구실을 만든 뒤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화장실도 건물 계단 쪽에 있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내가 없는 동안 저 둘은 더 어색해 할 테지만··· 어쩔 수 없지. 급똥은 중요사항이었으니까.
부디, 내가 없는 동안 저 둘이 싸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아.’
어떡하지. 저질러 버렸다.
이은별은 문밖으로 나가는 이세원을 불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계속 기싸움을 하던 게 그의 기분을 다운시킨 모양이었다.
저렇게 굳은 얼굴로 자리를 나간 것을 보면.
‘크, 큰일났다!’
이은별은 속으로 외쳤다.
잠시 말싸움을 이어가느라 정작 이세원을 신경 쓰지 못했다.
애써 만들어준 자리에서 정작 싸움이나 하고 있으니, 기분이 나쁠만했다.
물론, 이세원은 단순히 급똥 때리러 간 것이지만··· 원래 말이란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수백 가지로 왜곡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만큼,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 이세원의 모습은··· 두 여성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심지어 방금 전에는 쓰리썸은 파기다, 라고 선언까지 해버렸지 않은가.
그의 기분이 나빠졌다고는 충분히 유추 가능한 일이었다.
은별은 우울한 기색을 띄운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냥 잠시 발끈해서 서로 견제를 넣었을 뿐이지, 그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아무렴,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하나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자신이 꽤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굳이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을 자주 배려해 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잘못을 많이 하긴 했지.’
그녀는 잠시 자신이 옜날에 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야스각 때 도망친 거랑, 뒤에서 몰래 야짤을 신청한 것,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잘못한 것들이 많았다.
솔직히 몇 개는, 자신이 생각해도 정나미가 떨어질 것들도 있었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또 그중 몇 개는 그가 충분히 약점으로 쥐고 흔들 수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꺼내기는커녕 오히려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듯, 모르쇠로 덮어주기도 했다.
물론 가끔 야짤 이야기를 꺼내긴 하지만··· 그건 사실 악의 없는 장난에 가까웠으니.
비록 외모가 좀 사납긴 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속이 깊은 인간인 것이다.
적어도 이은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음, 이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꽤나 잘못한 것 같았다.
이쯤되니 슬슬 쓰리썸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의 기분을 풀어야 한다.
은별은 잠시 앞을 쳐다보았다.
자신과 비슷하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상대방이 보였다. 걱정 섞인 얼굴로 이세원이 나간 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은별은 그걸 보며 생각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저런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럼 되었다.
처음 쓰리썸 제안을 들었을 때 화낸 이유 중엔 그에 대한 걱정도 있었으니.
그가 ‘소중한 인연’이라고 직접 말까지 해줬으니, 자신을 그걸 존중해 주는 게 맞다.
물론, 선시비가 걸린 것은 약간 억울하긴 했지만··· 여기서는 자기가 양보하는 게 맞다.
“저기요.”
“···응?”
그래서 은별은 입을 열었다.
자신의 푸른빛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얘기했다.
“그··· 제가 죄송해요. 살짝 흥분해서 그만, 말이 쌔게 나와버렸네요.”
“응?”
순간, 성아린의 두 눈이 크게 띄였다. 설마하니, 먼저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야, 네가 먼저 사과하면 내가 뭐가 돼··· 먼저 도발한 건 난데.”
“아뇨, 거기에 반응한 건 저니까.”
“아냐, 내가 미안해. 술을 먹어서 그런가 괜히 놀리고 싶었나 봐.”
아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쯤에서 화해하자는 제스처였다.
은별은 피식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사실 싸움이라고 해봤자 말싸움밖에 없었으니, 속에 있는 앙금은 그렇게 많진 않았다.
사실상 이세원은 급똥때리러 간 것이지만, 그 돌발행동 덕분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아직 분위기는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험악하지는 않은 정도. 갑작스러운 화해에 살짝 부끄럽기는 했으나,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덕분에 주위에 짙게 깔린 무거운 침묵도 조금씩이나마 풀려갔다.
“잘 부탁해.”
“네, 저도요.”
그렇게 두 여성은 이세원이 올 때까지 조금씩 대화를 나누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