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94, 아린이의 속마음
* * *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든지 아린이만큼 포용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녀 덕분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아린이와 헤어지자마자 곧바로 은별이에게 전화했었다.
아린이를 설득했으니, 이제는 다이렉트로 은별이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린이에게 했던 것처럼 싱글벙글하며 “혹시 쓰리썸할 생각 없어?”라고 물어보았고······.
“미쳤어요?! 아니 다른 여자가 있었어요?! 아니···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걸 그렇게 해맑게 부탁하는 게 말이 돼요?!”
······욕을 한 바가지로 처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짜증을 내는 우리의 은별 양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하악질 하는 걸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음.’
그래, 이게 정상 반응이지.
너무나도 예상안의 반응이었던지라, 오히려 마음이 편하게 놓였다. 역시 아린마망이 지나치게 마음이 너그러운 거였다.
확실히, 누구든 양다리 소식을 들었다면 일단은 서운함부터 들겠지. 충분히 이해 가능한 반응이다.
‘네가 정상이라 다행이야.’
평소였다면 이미 잔뜩 졸아버려서 그녀에게 사죄를 날렸겠으나, 이미 한 사람을 설득시키고 온 나는 자신감이 잔뜩 차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혼신을 다 담은 사죄가 아니다.
바로 강철처럼 단단한 철면피다!
그래서 나는 뻔뻔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에이, 은별아. 고작 쓰리썸가지고 뭘 그래.”
“쓰리썸이 고작이에요?!”
전화기 너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확실히 쓰리썸이 ‘고작’은 아니긴 하지.
여러 야스 플레이 중에서도 상당히 도전적인 난이도를 자랑하는 플레이였다. 일단 3명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여러 의미로 하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좀 봐주라. 그렇다고 몰래 양다리를 할 순 없잖아? 나름 용기내서 말한건데 그건 플러스로 삼아.”
“아니, 허··· 뭐 이렇게 당당해요?”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음에서 나오는 헛웃음이었다.
이 당당함을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전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고민하는 게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래도 화내지는 않겠지?’
내가 이렇게 당당히 나서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첫 번째로, 애초에 우리는 사귄다기보다는 단순한 야스 파트너의 관계이다.
물론 평범한 야스파트너라기엔 꽤나 정신적 교감 수치가 높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일에 관련해서 구속력이 약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완전한 양다리는 아닌 것이다!
두 번째로, 이곳에서 쓰리썸은 생각보다 거부감이 있는 플레이가 아니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여성의 성적 스펙트럼은 남성보다 넓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같은 동성(??)의 몸을 보더라도 남자보다는 크게 거부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역전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그러니 쓰리썸을 죽어도 못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예상이 가능했다.
뭐,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서운함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차차 풀어주면 되는 일이었으니.
그리고 세 번째로, 나는 욕 먹을 걸 알면서도 자수했다!
본래 경찰들도 자수를 하면 정상참작을 해준다고 하는데, 남녀관계에서도 자수하면 정상참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해.”
물론, 그렇다고 내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내가 비밀로 하고 둘을 만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니 여기서 슬슬 딜(deal)을 해야 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 한데··· 앞으로 당분간은 네가 원하는 플레이 대부분 들어줄게.”
“······그 말 진짜죠?”
내 말에 그녀가 퉁명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퉁명하긴 하나, 약간의 기대감이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그걸 본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방금 그 제안이 꽤나 솔깃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당연하지.”
어차피 그녀가 요구하는 거라고 해봤자 대부분 뻔했으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도 별로 거부감 없는 플레이였기도 하고.
원한다면 상황극까지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럼··· 골든 그것도 가능해요?”
“아, 그건 빼고.”
그건 좀 더티하니까 패스.
“아니─!”
아무튼, 그런 식으로 몇 번 정도 거래를 마치자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한 번 만나요.”
“예에!”
그걸 들은 나는 소리 내서 쾌재를 불렀다.
와! 쓰리썸!
와! 3P!
남자의 로망으로 이루어진 플레이가, 지금 막 현실로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다!
기쁨이 마음속에서 넘실거리는 게 느껴졌다.
“참나, 엄청 좋아하네. 그럼 언제 만나요?”
“음··· 3일 뒤 저녁에 만날까? 그날은 내가 살게.”
“오, 좋아요. 그때 봐요.”
그렇게 우리는 대충 약속 날짜를 정하고 대화를 마쳤다. 다행히 전화를 끊는 그녀는 그렇게 많이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내 회심의 거래가 통한 모양이었다. 참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헤헤.’
3일 후 저녁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
──그리하여 3일 후, 저녁.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 어느덧 약속의 날이 되었다.
문득 바깥을 바라보니, 하늘 위에 아름답게 떠오른 달이 보인다. 신기하게도 오늘 떠오른 달은 만월(?月) 이었다.
아린은 길거리를 느긋하게 걸으며 약속 장소를 상기했다.
‘근처 술집이라고 했지 아마···.’
일단은 안면을 틀 겸, 가볍게 셋이서 대작을 나눌 계획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과 곧바로 3P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술로 머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실로 합리적인 계획이었다.
술이란 마법의 액체였으니, 일단 들어가면 어색한 사이의 인간과도 미친 짓을 할 수 있었다.
아마 3P를 하는 데에는 좋은 부스팅이 되겠지.
처음 보는 어떤 여자의 나체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꽤나 부담이 되는 자리임은 확실했으나, 이상하게도 술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별로 무겁지 않았다.
성아린은 잠시, 며칠 전 이세원과 대화를 나누던 때를 떠올렸다.
“······.”
그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유쾌한 척하며 “쓰리썸 할래?”라고 말했을 때를 말이다.
그 말은 곧, 자신 말고 다른 여자가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꽤나 당황했겠으나, 그녀는 침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듯,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생각보다 더욱 오래되어 있었다. 어쩌면 희여멀건한 백탁액으로 농도 판별을 하기 전보다 훨씬 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하긴, 그럴만 하지···.’
애초에, 그가 다른 ‘남자’들 보다 성욕이 왕성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서로 시간, 거리가 안 맞아 일주일에 한 번씩 정도밖에 못 만난다는 것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욕구가 자주 쌓이고 있었을 거라는 건 쉽게 추리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여자가 유혹한다?
장담하건데 아마 그대로 넘어갈 것이라고, 성아린은 99%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세원이란 그만큼 좆으로 움직이는 인간이었으니까.
이세원이 듣는다면 은근 서운해할 말이긴 했지만··· 부정하기는 어려운 사실이었다.
직업이 야짤작가인 인간이기도 하고, 애초에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 먼저 덮친 것도 그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에게는 유혹도 은근히 자주 들어왔을 것 같았다.
‘잘생기긴 했으니까···.’
그것은 객관적으로도 판단된 사실이었다. 당장 몇 주 전에 만났었던 제 친구들의 반응이 그것을 근거하고 있었다.
물론,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있긴 했으나··· 막상 친해지면 그리 어색하지도 않은 인간이었으니.
다가갈 매력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가 언젠가 다른 여자가 생길 수 있다고, 아린이는 확실한 근거를 들어 예상하고 있었다.
아아, 이세원의 신뢰도는 이토록 처참한 것이다.
“······.”
그렇기에.
그가 자신에게 먼저 고백해왔을 때는 오히려 기쁘기도 했다.
설마 그가 먼저 용기 내서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런 속마음을 숨기느라 혼자 속앓이를 했던 그녀였다. 이세원은 그걸 고해성사까지 하면서 오히려 시원하게 긁어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선, 자신을 은근히 생각해 주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심증은 심증일 뿐이었고, 굳이 밝히면서 욕을 먹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먼저 고해성사를 해준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플러스를 줄만 했다.
그렇다면 뭐, 정상참작을 못 해줄 이유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운함이 사라진 건 아니다.
아무리 그녀가 너그럽다고 해도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사실, 이세원이 무리수로 제안한 쓰리썸을 수락한 것도, 꽤나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저 이세원이 부탁해서 그랬다··· 그런 착한 마음씨로 고개를 끄덕인 건 아쉽게도 전혀 아니다.
‘어떻게 생긴 년인지는···.’
오히려 꽤나 음습하고, 불온한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기에 수락했을 뿐.
순간, 길거리를 거닐던 그녀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확인은 해 봐야지.’
그가 자신도 모르는 여자와 쿵떡쿵떡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같이 얼굴을 맞대고, 셋이서 쓰리썸 하는 게 낫지.
최소한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개뼉다구같은 년인지는 제 두눈으로는 확인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약, 몸매도 얼굴도 어중간한 상대다?
그렇다면 자신이 친히 도륙내 줄 생각이었다.
어중간한 사람이 그에게 붙는 건 도리어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가슴속에 자그마한 칼을 품고 술집에 느긋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이은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 아, 넵···.”
갸름한 얼굴과, 무척이나 관리가 잘 된 몸이 보인다.
길쭉하게 잘 빠진 기럭지와, 인싸 특유의 기 세고 친화력 좋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성아린은 어색하게 인사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조, 좀 예쁘긴 하넹···.’
칼날을 세운지 몇 분도 안 되서 쫄아버리는 그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