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90, 익숙한 인물
* * *
최근 이은별은 심심했다.
“하아··· 지루해.”
그녀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중얼거렸다.
심심한 이유는 별게 없었다. 종강을 했다 보니 자연스레 할 일이 사라지게 되었고, 넘쳐나는 시간만큼 지루함이 몰아치는 것이다.
원래라면 알바라도 하고 있겠으나··· 아쉽게도 오늘은 그 가끔 나가는 알바조차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또 자신의 친구들은 각자 일이 있어서 놀지도 못하고···.
여러 가지 조건이 어긋나다 보니, 그녀는 이렇게 집안에 박혀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집안에서 미리 공부를 하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공부는 하기 싫은 그녀였다.
그녀는 하얀색 천장을 멍하니 보면서 생각했다.
‘···세원 선배나 불러서 같이 놀까.’
불러서 적당히 룰 몇 판 돌리면서 오소리 새끼를 찢어버리다가, 슬슬 질릴 때쯤에 야스를 하는 것이다.
저번에 야외 야스를 한 뒤로 벌써 열흘이나 지났으니, 욕구가 꽤나 쌓여 있는 상태의 그녀였다.
그런 만큼 상당히 끌리는 선택지였다.
하지만.
‘아니, 아니야···.’
은별은 얼마 안 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그를 부르는 건, 오히려 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그는 꽤나 바빠 보였다.
자신과 만났었던 날 뭔가를 얻긴 얻었는지, 최근엔 원룸에서도 잘나가지 않는 분위기였다.
집중하고 있는 사람을 무턱대고 방해할 정도로 그녀가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밖에서 한 번 더 해보고 싶었는데···.’
솔직히 그때 공원에서 한 것은 무척이나 긴장되긴 했지만, 그만큼 흥분되기도 했던 경험이었다.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함과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쾌락이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그걸 상기하자 다시금 아랫도리가 젖는 기분이었다.
“··· 큼큼.”
슬슬 자극이 오던 그녀는 이내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자위나 할까?’
쌓인 욕구를 해소하는 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죽이는 데에는 자위와, 컴퓨터 게임이 제격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시원하게 한 발 빼고는 바텀에서 구르는 벌레를 픽 하는 것이다. 완벽한 플랜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컴퓨터 전원을 키고, 이내 팩시브에 들어갔다.
일단 본격적인 딸딸이 전에, 혹시 뭐 업데이트된 그림이 있나 확인할 생각이었다.
이세원에게 들킨 이후 좀 심한 그림을 그리는 팔로우들은 지웠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저장해놓은 팔로우들이 많은 그녀였다.
이 정도면 전희(??)로는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몇 분간 업데이트 목록을 확인하던 그녀는 이내 신기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요 열흘간 아무런 소식도 없던 ‘hala’라는 작가의 계정에 갑자기 그림이 올라온 것이다.
hala, 즉 이세원의 계정이었다.
그걸 확인한 이은별은 잠시 감탄을 했다.
“오.”
아무래도 드디어 그가 만화를 다 그린모양.
“이렇게 배식을 해주네.”
마침 반찬이 필요했던 그녀는 잘 되었다 생각하면서 망설임 없이 팩시브에 포함된 링크를 눌렀다.
그러자, 핀박스로 화면이 넘어가며 그의 상단에 update로 떠있는 한 게시물이 보였다.
그가 방금 막 올린 [S바이러스]라는 신작이었다. 썸네일에 박힌, 마약에 취한 듯한 남녀가 대규모 난교하는 모습이 보인다.
꽤나 자극적인 표지였다.
저기서 과연 S는 무엇을 뜻할까··· 지금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S의 심오함을 생각하며 천천히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은 웬 오글거리는 내레이션 네모 말풍선과 함께 들어갔다. 마치 한국형 만화의 전형적인 도입부를 따라 한 모습이었다.
나리이션이 지나자, 그림은 평범한 사회의 모습을 비추었다.
평화롭게 일상을 영위해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여느 때와 같이 회사에 출근하며, 학교를 가며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오.”
아무래도 힘을 빡 준 모양인지 평소보다 퀄리티가 높아 보이는 그림이었다. 선은 깔끔했고, 뒤에 그려져 있는 배경은 정교하다.
이 정도면 웹툰과도 비벼볼 만한 퀄리티였다. 덕분에 은별은 빠르게 만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것이 사람을 공격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평범하게 길거리를 거니던 사람들 중, 어떤 남자가 발작을 시작한 것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척추가 구부려진다.
어? 이봐요 학생 괜찮아요?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걸 본 선량한 시민들이 그를 도와주기 위해 다가갔다. 현실에서는 이미 뒤진지 오래인 인심이, 그래도 만화 속에서는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 따스한 마음에 제 마음속까지 따스해지길 잠시.
이내 발작을 멈춘 남성이 돌연 근처에 있는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악!
뭐, 뭐야!?
그러고는 곧장 옷을 벗고 따먹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어찌나 힘이 센지, 여 회사원의 정장이 찢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체가 드러나는 데에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남성의 거대한 거포가 보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굴을 파랗게 물들인 여 회사원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섹스.
퍼억! 퍽! 퍽!
꺄악! 끄흐, 아항!
크아아아!
난데없이 일어난 시내 한복판에서의 음란행위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여자’들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남자’들 몇 명은 지래 겁을 먹고 몇 발자국 뒤로 멀어진다.
그래도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 몇 명은 남성을 말리겠다는 듯 다가가기도 했다.
이봐 학생 미쳤어?! 왜 이래!
그러나 이미 사건은 벌어진 뒤였다.
이번에는 따먹히고 있던 회상원이 길바닥에서 일어나더니 근처에 남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회사원의 아래쪽에서는 새하얀 백탁액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쉽게도 처음 감염된 남학생은 조루였던 모양이다.
으, 으아아악!
도, 도와줘요! 강간 마야!
마치 폭탄들이 연쇄작용을 일으키듯, 소란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만 알수 있던 건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단 것.]
으아아아악!
도, 도망가! 도망가!
시내의 모퉁이에서, 지하에 있던 노래방에서, 성인용품점에서, 근처의 모텔에서. 사람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마치 무언가에 도망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의 뒤로 눈의 초점이 풀린 나체의 사람들이 뒤따랐다.
시내에서 흘러나온 욕망이 한데 집약되어 폭발하기라도 한듯, 초점이 풀린 이들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강간했다.
남성이 여성을 따먹고, 여성이 남성을 따먹는다. 어쩔때는 여성 정상인에게 남성 감염자 몇 명이 달라붙기도 했다.
평범한 일상이 야스 퍼레이드로 뒤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멸망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했다는 것.]
“푸흡! 뭐야 이게.”
만화를 감상하던 이은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중한 분위기의 내레이션과는 달리 만화의 상황은 무척이나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건 무슨 스토리인가. 어떤 사고 회로를 거쳐야 이런 게 나오는가.
감염이 되면 무차별적으로 야스를 한다니. 과연 야한 만화에 어울릴법한 엽기적인 설정이었다.
물론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과격한 소재이기에 좀 더 흥미를 일으켰다.
아무래도 연출과 구도에도 꽤나 신경 쓴 모양인지, 나름 야릇한 장면도 많이 나왔다.
은별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머지 만화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건]
시점이 바뀌었다.
한낮의 시내를 비추고 있던 그림은 이제 어느 지하철을 비추려 하고 있었다.
출입문이 닫혀 폐쇄된 지하철이었다.
감염이 퍼져 어느새 대규모 난교장이 된 지하철이 보인다. 빈 좌석들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염자들을 길바닥에 누워 열심히 오입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앞 쪽 전철칸의 창문이 확대된다.
[우리가 생존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그곳에는, 생존자들이 있었다.
초동진압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까스로 감염자들을 격리시킨 생존자들이.
모두들 지친 표정으로 앞의 좌석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 명이 넘는 가지각색의 등장인물들이 보인다.
아무래도 이들이 사건의 주요 인물들인 듯했다. 아마 이들 중에 주인공도 있겠지.
과연, 초기 등장인물들이라 그런가 다들하나같이 선남선녀밖에 없어보였다.
이은별은 재밌다는 눈빛으로 그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
달칵달칵.
그러고는 마우스를 건드려 등장인물 중 하나를 확대시킨다.
열 명이 넘는 등장인물 중, 특히 눈에 띄는 등장인물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장면을 크게 차지하지도 않고, 그저 구석에 박혀 있는 녀석들 중 하나였지만.
그럼에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녀석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상판대기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거··· 세원 선배 아니야?”
그곳엔, 이세원과 닮은 꼴의 남성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