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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87화 (87/125)

〈 87화 〉 87, 영화

* * *

이세원과 약속을 잡은 후 다음날.

“후, 진정하자···.”

이은별은 굳이 약속시간보다 20분 먼저 나와서 불안함을 한껏 느끼고 있었다.

쿵쿵.

심장이 맥박치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불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영화관 건물의 내부에서는 잔잔한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정작 앉아있는 그녀는 불편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이세원 탓이었다.

오늘 그와 만난다고 하니 괜스레 긴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왜이러지···.’

분명 예전에도 그와는 자주 놀았었던 그녀였다. 같이 밥도 먹어보고, 노래방도 가봤으며, 술을 마셔본 적도 많았다.

그때는 분명 별로 떨리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긴장이 되는 건지···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이유는 대충이나마 짐작이 가긴 했다.

평범하게 친구 사이로 만났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무려 야스까지 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따먹은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따먹혔던 야스였다.

서로 알몸까지 보고, 자신의 창피한 것까지 모조리 다 파헤쳐진 상태였으니.

편하게 대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날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때는 엄청 놀랐지···.’

자신이 즐겨보던 작가가 알고 보니 이세원이라는 것도 놀라긴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남자’가 그런 하드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신기했던 그녀였다.

평범한 야짤이 아니다.

‘여자’들도 호불호가 조금씩 갈리는 그런 하드한 그림들이었다.

심지어 초창기 그림들 중에는 꽤나 그로테스크한 그림도 몇 개 섞여있기도 했었다.

그러한 그림을 ‘여자’도 아닌 저런 외모 멀쩡한 ‘남자’가 그리고 있으니··· 여러모로 신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 무슨 사고방식인지.’

어째 그에 대해 알아갈수록 점차 모르는 것만 많아지는 것 같은 그녀였다. 까도 까도 뭔가 나오는 게 마치 양파 같았다.

그렇게 한참 잡생각을 굴리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겠다는 듯 두 볼을 착착 두들겼다.

살짝 긴장되기는 하지만 오늘은 즐겁게 놀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도 어제 안 좋은 일을 겪었으니 자신이 기분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즐겁게 놀고 분위기가 풀리면 그를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오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 섹스도 하고···.’

그걸 생각하자 순간, 그녀의 얼굴이 잠시 빨개졌다. 만나기 전부터 이런 야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자신이 변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자각하는 은별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놀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영화 자유예매권도 두 장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굳이 예약 대신 좀 더 비싼 자유 예매권을 고른 이유는, 자신이 고르는 것보다는 그가 영화를 고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그의 취향을 조금 알 수도 있었고.

만약 예약을 잘못했다가 괜히 지루함을 느끼는 불상사를 피할 수도 있었다.

“아, 오빠! 여기에요!”

그렇게 자신이 가진 카드들을 점검하고 있자, 앞에서 익숙한 형상이 보였다.

이세원이었다. 그가 영화관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은별을 발견하자 똑같이 인사를 건네주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헤헤, 네.”

은별은 어색하게 고개를 긁적였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로부터는 영화를 보기 위한 가벼운 사전 준비가 시작되었다.

“오빠 팝콘은 뭐 드실 거예요? 카라멜 기본?”

“둘 다 반반씩 하자.”

영화관 필수 템인 콜라와 팝콘을 시키고.

“오, 이 영화 재밌어 보인다.”

“그래요? 그럼 이거 보실래요?”

“음··· 아니 좀만 더 살펴보고.”

스크린에 뜬 갖가지 포스터와 예고편을 보고 어떤 영화를 선택할지 고민한다.

다행히 이번에는 상영 중인 영화도 다양했다.

최근 유행하는 로맨스 영화부터 시작해서, 히어로 액션 영화, 코미디 영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성인영화까지.

꽤나 다양한 장르가 모여져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저것들은 전부 상영 시작 시간도 비슷했기에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은별은 포스터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이세원을 보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영화를 선택할까.’

그래도 ‘남자’니까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선택할까, 아니면 누구나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코미디 영화를 볼까.

어쩌면 그림을 주로 그리는 사람이니까 애니메이션 영화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뭐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뭐든지 재밌게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19금 성인영화를 같이 관람하고 싶긴 하지만··· 그 의견을 피력했다간 또 변태라고 오인받을까 봐 애써 참는 중이었다.

“아, 정했다.”

그렇게 혼자 잡생각을 하고 있자,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왔다.

그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어떤 영화 포스터를 가르키고 있었다.

“은별아 이건 어때?”

그녀는 그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영화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좀비 영화?”

거기에는, 좀비영화가 놓여 있었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고 폭력성이 최고조를 찍는 좀비영화가.

다른 로맨스 영화나, 히어로 액션 영화에 비하면 딱히 인지도도 없었고 흥행도 되지 못했던 좀비 영화가 말이다.

그는 지금 이 수많은 검증된 영화중에 굳이 저 구석탱이에 놓인 좀비 영화를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이세원에게 물었다.

“어··· 저걸 보자고요?”

“응.”

“다른 재미있는 영화들도 많은데 왜 저걸···.”

“왜, 난 재밌어 보이는데.”

좀비영화··· 재밌긴 하지.

다만 너무 외외라서 놀랐을 뿐이다. 평범하게 로맨스나 액션, 코미디 영화를 생각했던 그녀에게는 너무 예상치 못한 장르였다.

스크린 너머로 난무하는 피와 살점이라··· 확실히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 그녀는 뭐를 봐도 상관은 없었기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는 사고회로가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이다.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만사가 귀차니즘에, 성격도 급한 편인 나에게 영화란 지루함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영화란 기승전결이 명확한 작품이라, 일단 흥미진진한 ‘전결’까지 가려면 필연적으로 ‘기승’부분의 지루함을 견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 지루함이 싫었다.

물론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미진진하게 보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그전, 발단 부분에서 느끼는 지루함은 나에게 익숙한 종류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화 같은 걸 별로 즐겨보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저 가끔 기회가 되면 감상할 뿐······.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자주 챙겨 보는 영화 장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좀비 영화였다.

상대적으로 기승의 텀이 짧고, 역동적인 좀비 영화는 별로 지루한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폭력적인 장면은 긴장감과 집중력을 한층 끌어올려 주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좀비 영화만큼은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은별이가 건네준 예매권으로 좀비 영화를 고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마침 좀비 영화가 있기도 했고, 역전 세상에서 좀비 영화는 어떨지 마침 궁금했기 때문이다.

“시간 됐다 가자.”

“아, 네.”

그렇게 영화 시작 시간이 되고 우리는 상영장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선택한 영화의 이름은 이었다.

대한민국 곳곳에 나타난 좀비들을 피해, 비교적 사람이 적은 보성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살짝 병맛끼가 느껴지는 그런 줄거리의 영화였다. 기차안에서의 추격씬과, 전투씬이 하이라이트라고 한다.

줄거리를 대충 확인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하필 보성이지?’

대피소로 치자면 제대로 된 군부대도 있고, 바다랑도 가까운 부산도 있을 텐데 말이다.

하긴··· 한국 전역에 퍼졌다면 비교적 인구수가 많은 부산은 살짝 위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은 비교적 잔잔하게 이루어졌다.

아직 좀비 사태가 터진 것을 모르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기차에 타고, 기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발한다.

[어? 손님, 손님 괜찮으세요?]

그러던 와중 기차 안에 탔던 한 손님이 시간차로 감염되고, 기차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안전한 곳으로 탈출한다는 게 이야기의 발단이었다.

[꺄아아악! 손님!!]

[이런 씨발 도망가!]

나타난 좀비 한 마리가 기차 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데에는 단 몇 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서서히 사태를 깨달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승무원들에게 말해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보성! 보성으로 갑시다!]

[문 닫아! 닫으라고!]

[안 되요! 아직 친구들 못 탔단 말이에요!!]

영화는 꽤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좀비들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추격씬.

폐쇄된 공간이라는 설정에서 오는 공포감까지.

[캬아아아악!]

“꺄악! 깜짝아!”

거기에 더해 큰 스크린에서 나오는 웅장함까지 더해지니, 은별이가 놀라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내 팔을 움켜잡았다.

뭉클.

부드러운 가슴이 내 팔에 닿으며 부드러움을 선물한다. 따듯한 온기가 팔 너머에서 전해졌다.

‘오···.’

나는 작게 감탄을 날렸다. 굳이 그녀의 가슴이 닿아서 나온 감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현재 상영하는 영화에 관한 감탄이었다.

‘좀비들이 왜 예쁘지?’

신기하게도 좀비들은 대부분 여자였다. 비록 온몸에 피 칠갑이 되어있고, 여러 먼지 때가 묻어있어서 좀 더럽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대부분이 여자 좀비였다. 가슴 크기도 제각각이고, 머리카락 길이도 제각각인 그런 좀비들이 수두룩했다.

역전 세상이라 그런가, 아무래도 이런 사소한 것도 패치해 주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영화의 스토리 보다는 씬 그 자체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좀비 영화란, 기본적으로 역동적이고 격한 몸짓을 하는 씬이 주를 이룬다. 그러한 몸짓이 영화 내내 긴장감을 업 시켜주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 특유의 추격 씬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그런만큼 가슴 위에 달려있는 살덩이들이 흔들리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캬아아악!]

[케에에엑!!]

좀비들이 뛰어다닐 때마다, 가슴이 아름다운 슴부먼트를 보여준다. 그러다가 주인공 일행과 몸싸움이라도 벌일 때면, 가슴골이 노출되거나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오, 오우야···.’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저게 막 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렴 내가 아무리 여자에 미친놈이라고 하더라도, 피 칠갑한 여성에게 흥분하는 취향은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신기할 뿐이었다. 본래는 무서워야 할 좀비들이, 나름의 섹스 어필을 하는 저 모습이 내겐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는 잠시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내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지금 나만이 이런 신기함을 느끼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원래 좀비 영화에선 이렇게 여자 좀비들이 주로 나오는 게 일반적인가··· 지금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건가. 호기심이 들었다.

그렇게 확인한 사람들의 모습은 평범하게 영화를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좀비를 경계하며 눈가를 가렸다.

위화감을 느끼는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약간 어색함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는 꽤나 볼만했다.

*

“와··· 솔직히 기대 안 하고 봤었는데 생각보다 엄청 재밌었네요.”

“···그러게.”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가는 길. 나는 옆에서 감상평을 말하는 은별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녀는 영화를 꽤나 감명 깊게 봤는지 자신이 느끼는 여운을 알려주고 있었다.

“특히, 보성 녹차밭에서 이루어지는 추격씬은 정말···.”

확실히 재밌긴 했다.

어째서 저게 흥행하지 못했나 생각될 정도로, 나도 꽤나 감명 깊게 봤으니 말이다.

한국 특유의 신파극이 약간 섞이긴 했지만, 저 정도면 좀비물 중에서도 꽤나 잘 만든 축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가 감명을 받은 것은 단순히 스토리 때문이 아니었다. 저 영화 덕분에 내 머릿속이 지금 활발히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흐음··· 좀비라.’

뭔가 재밌는 게 생각날 거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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