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86화 (86/125)

〈 86화 〉 86, 위로

* * *

+

[일주일 정도 휴재를 하겠습니다]

잠시 멘탈 터지는 일도 있고.. 슬슬 새 작품도 만들어 볼 겸 해서 일주일 정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마음 편히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휴재한다고 해서 후원을 끊지는 말아주세요.. 만약 그렇게 하면 저는 바지에 똥을 쌀 겁니다.

+

“큭큭.”

이 공지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랄 사람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된다.

공지를 다 쓴 나는, 곧바로 핀박스에 들어가 휴재 공지를 때렸다.

기본적으로 사무적인 어투이나, 어딘가 비굴함이 담긴 내용. 휴재 공지로 이 정도면 적당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때린 휴재 공지 때문일까, 댓글들은 꽤나 빠르게 달렸다.

[bandark: ?? 뭐에요? 무슨 일 있음?]

[암갈비쥐: 아 ㅠㅠ 진짜 멘탈 나갔나 보네 ㅠㅠ]

[증오로 가득해: 그렇다고 휴재를 때리냐 이 ^^발]

덕분에 잠시 댓글 창이 불탔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이미 삔또가 상할 대로 상해버린 나는 저곳이 불탄다고 해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신작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니, 차라리 고로시당한 지금이 오히려 적기이리라.

휴재 공지를 때린 후 잠시 신기한 일을 겪을 수 있었는데, 공지를 보고 뿔난 독자들이 다시 리뷰글에 가서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팩트인 건 맞았는데 글이 너무 비판만 가득하다던가, 나는 잘 보고 있었는데 네 때문에 죽었다던가 하는 댓글이 잠시 게시물에 달렸다.

물론 전체 댓글에 비하면 소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큭큭.”

좋다, 그대로 계속 불태워서 저 새끼의 게시물을 멸망시키는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슬 컴퓨터를 껐다. 이 컴퓨터로는 더 이상 할 게 없었으니까.

이제 나에게는 이제 일주일 동안의 시간이 생겼으니, 우선은 이 자유를 철저히 즐길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놀 생각은 없다.

이 일주일의 자유시간은 나의 핀박스 수명을 등가교환하여 만든 것이니.

일주일간 열심히 신작 구상을 마치고 개쩌는 걸 만들어서 금의환향(???) 하는 것이다.

벌써부터 아랫도리를 적시며 후회 피폐를 찍을 소비자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기분이었다.

“······근데, 뭐쓰징?”

물론, 상상만 할 뿐이다.

지금의 나는 머릿속에 생각나는 소재가 단 한 개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사람들 취향을 저격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 심지어 역전세상의 여자들을 공략한다?

머리가 아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방금 나는 금태양으로 쓴맛을 경험하고 온 상황이었다. 거기서 배운 것들이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남자 하나만 나오는 건 피해야겠군.’

캐릭터 원툴로 밀어붙이다간 언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 아까 금태양으로 확실히 느끼고 왔는데 그걸 또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남캐 분량도 늘려야겠지.’

사실상 오늘 고로시의 대부분의 내용은 남자 컷씬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으니. 필연적으로 남캐 분량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남캐 분량을 가지고 선타기를 하다가 이렇게 엎어진 것이다.

컷씬에서 남캐가 차지하는 범위를 높이고··· 그림도 좀 더 세밀하게 그려야겠지.

“씨발.”

그걸 생각했더니 목에서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겨우겨우 삭혔던 화가 다시금 차오르고 있었다.

이 개같은 세상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세상이 나를 억까해. 어흐흑!”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매트리스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해서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왜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분명 여자 알몸인데, 왜 씹게이같이 남자를 그리라고 종용하는가.

왜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수가 없는 건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아, 창작이란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다.

띠링!

그렇게 혼자 지랄발광을 하며 매트리스 위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머리맡에 대충 던져둔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려온다.

‘···누구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림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채팅창에는 누군가가 따듯한 위로의 말을 내게 건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지망: 힘내세요 작가님 저는 금태양 만화 즐겁게 잘 봤었으니까]

[그림지망: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마시고 얼른 찾아오시길 빕니다]

“크흡!”

그걸 본 나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이렇게 개인 채팅창까지 찾아와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정말이지 고운 심성이었다.

‘그림지망이라···.’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 친구가 인체 비율이 어긋났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지.

그때는 살짝 뜨끔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진심으로 피드백을 날려준 모양.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키패드를 톡톡 두드려서 답장을 날려주었다.

[hala: 감사합니다 ㅎㅎ 낙심 안하였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hala: 조만간 돌아오겠습니다]

[그림지망: 네 ㅎㅎ ]

[그림지망: 아, 그래도 남자 캐릭터 분량은 좀 늘려주세요. 솔직히 여캐 단독샷은 좀 심했습니다.]

[hala: 아]

[hala: 넵]

과연 피드백 만큼은 확실한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여캐 단독샷은 좀 심하긴 했지···.’

아마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홀딱벗은 남캐가 단독샷을 차지한 게 아닐까?

“어우···.”

물론, 여성의 성적인 스펙트럼이 넓다고 했으니 그 정도까진 아니겠으나.

어쨌든 내가 잘못한 건 맞은 것 같았다. 단독샷은 심했지··· 옛날의 내 버릇이 나온 탓이었다.

그 뒤로 나는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며 채팅방을 나갔다.

이제 보니 채팅은 ‘그림지망’ 이외에도 또 하나 날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침대에서 구르는 동안 날아왔던 모양.

새로운 채팅의 주인공은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qwer1’이라는 친구였다.

[qwer1: 엌ㅋㅋㅋㅋㅋㅋㅋ]

[qwer1: 만화가 좀 흔들리는가 싶더니 결국 개같이 고꾸라졌네요 ㅋㅋㅋ]

이 망할 새끼는 지금 놀리는 건가.

[qwer: 뭐, 걱정 마세요. 어차피 사람들 호불호야 항상 갈리는 일이니까. 별로였던 사람도 있으면 재밌게 본 사람도 분명 존재해요. 저는 후자였고.]

··· 아니구나. 그냥 제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한 것 같았다.

몇 번 대화를 나눠보니 이 사람이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말투가 살짝 띠껍기는 하나, 그래도 그 이면에는 어느 정도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방금 막 조리돌림을 당하고 온 나를 보며 쳐 웃는 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뒤에 위로하는 말을 해주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로 했다.

나는 아까 전과 똑같이 키패드를 두드려 답장을 날려주었다.

[hala: 감사합니다.]

[qwer1: 저, 근데 작가님 순전히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진짜 레즈에요...?]

그걸 본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온 세상에 거짓과 음해가 난무하는구나.

[hala: ㅡㅡ]

[hala: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채팅창을 닫았다. 이 인간이랑 더 대화하면 괜히 짜증만 더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을 다시 매트리스 쪽으로 던졌다.

‘··· 그래도 고맙긴 하네.’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찌 되었든, 저들은 전부 타르탈로스에 있던 게시글을 보고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찾아와 준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침울해하고 있지 않을까 하며 배려해 준 게 보였다. 그게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좋아!”

이제는 이 감동을 이용해서 개쩌는 망가를 그릴 차례였다. 내가 곧 한국의 아X나기요, 미야자X 하야오일지니.

내 머릿속에서 창작 욕구가 마구 샘솟고 있었다.

나는 얼른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다시 액정타블렛을 켰다. 단순히 누워서 생각하는 것보단 뭐라도 그리면서 머리를 굴리는 게 더 도움될 것이다.

스윽­스윽­

한동안 방 안에서 펜 긋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시야가 좁아지며, 어느새 내 눈에는 한 평짜리 책상이 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그만큼 내가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점차 변질되어갔다. 주황으로 밝게 빛나던 햇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색으로 은은하게 물들고 있었다.

탁!

그렇게 태양이 지평선에 걸쳤을 때쯤, 나는 타블렛 펜을 내려놓았다.

“···음.”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좆됐군.”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이거다!’싶을 정도로 꽂히는 소재가 없었다. 나오는 구상마다 전부 하자가 있는 것이다.

하긴··· 몇 시간 정도 머리 쥐어짜낸다고 신작이 딱딱 만들어지면 지금 내가 단칸방 생활을 안 했지 시발.

아마 그랬으면 지금쯤 탑티어 웹툰 작가가 돼서 저기 강남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후우···.”

이미 에너지를 전부 사용한 나는, 힘빠진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매트리스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 작품이 터진지 하루 만에 새로운 게 만들어질 리 없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순간 속에서 허탈감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우울함이 서서히 머릿속을 잠식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결국 이렇게 멸망하고 굶어죽을 운명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띠링!

다시 한번 내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린 것은. 확실히 오늘 고로시를 당해서 그런지, 뭔가 알람이 많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손을 흐느적 움직여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이번에는 은별이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이은별: 오빠 괜찮으세요?]

과연, 타르탈로스 죽돌이인 그녀인 만큼 오늘 있었던 일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이렇게 위로해주기 위해 찾아오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약간 우울하긴 했으나, 그걸 굳이 그녀에게 말해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는 법.

나는 키패드를 두드려 괜찮다고 답장을 해주었다.

[이세원: ㅇㅇ 괜찮아. 고마워]

[이은별: ㅎㅎ 다행이다]

[이은별: 그럼 내일 저랑 영화 보러 가실래요?]

“응?”

순간 그녀의 답장을 본 나는 약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지? 뭐지 이 년은?

현재 비탄의 빠진 나를 위로하기 위해 온 게 아니었나?

사실 위로는 대화를 열기 위한 핑계일 뿐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도 눈치 없이 나랑 놀기 위해 연락한 것인가?

그렇다면 정말이지, 공감 능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위로해달란 말이야!

나의 슬픔에 공감해 달라고!

나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문자를 날렸다.

[이세원: 야;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놀자는 말이 나오냐]

어쩐지 점점 게이식 마인드가 되는 것 같은 나였지만, 현재의 나는 예민한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문자를 보내자, 그녀가 당황하며 속사포처럼 답장을 보냈다.

[이은별: 앗;]

[이은별: 아뇨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이은별: 영화라도 보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자는 거죠]

[이은별: 오빠 딱 봐도 지금 만화 때문에 머리 아파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뭐지.”

나는 얼른 고개를 두리번 거려 방안을 살펴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어지러운 내 방이 보인다.

다행히 은밀하게 설치된 몰래카메라 같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난 또, 지금 내 상태를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어디 몰카가 설치되어 있는 줄 알았다.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뻘짓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말을 이어졌다.

[이은별: 그리고 혹시 또 모르잖아요. 영화 보다가 또 무슨 생각이 떠오를지도]

“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렇긴 하다.

창작에는 영감(??)이라는 게 있었으니.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그것에 바탕이 되는 재료가 필요한 법.

어느 정도의 인풋이 되어 있어야 아웃풋이 나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곳에 온 후 딱히 문화생활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해봤자 간간이 컴퓨터 게임만 했을 뿐··· 영화나 만화 같은 걸 본 적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나마 본 영화라고 해봤자 아린이와 봤던 멜로 영화가 다였으니······.

그녀 말대로, 잠시 기분전환 좀 할 겸 영화를 한 편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은별: 만나는 김에 저로 스트레스도 좀 푸시고...ㅎㅎ;]

나는 피식 웃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어찌 되었든 야스가 목적이긴 한 모양이었다.

‘귀여운 녀석.’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주었다.

[이세원: 그래 좋아]

굳이 제안을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