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77, 북마크
* * *
다들 알지는 모르겠는데, 팩시브에는 북마크라는 아주 고마운 기능이 있었다.
북마크가 뭐냐면 쉽게 말해서 자신의 마음에 든 그림을 저장하는 것이다.
어? 이 그림이 꼴린다.
어? 이 그림이 존나 잘 그렸다.
그렇게 느낀다면 언제든지 그림 옆에 있는 하트 아이콘을 눌러서 킵을 해놓을 수 있었다.
북마크 된 그림들은 그대로 자신의 계정에 저장되며, 원할 때에 얼마든지 개꼴렸던 그림을 찾아볼 수 있었다.
굳이 봤던 그림을 찾기 위해 일일이 스크롤을 내리지 않아도 되고, 따로 주소를 저장할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북마크란, 누구나 개인 서고를 만들 수 있는 도서관의 역할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북마크라는 기능은 장점밖에 없는 무척이나 편리한 도구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듯, 장점이 있으면 거기에 반대되는 명확한 단점도 존재하는 법.
개발자 새끼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북마크 된 그림들은 타인들도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니까 즉, 북마크 된 그림들은 ‘공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 계정을 클릭하면 그 사람이 은밀히 가지고 있던 페티시를 샅샅이 확인할 수가 있다.
거유 그림을 그리던 누군가가 알고 보니 여아 캐릭터 그림을 수집하고 있었다던가, 순정만화를 그리던 어느 작가가 알고 보니 그로테스크한 야짤을 북마크하고 있었다던가.
하는 일화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누구나 개인적인 페티시는 가지고 있는 법이고, 북마크는 그런 개인적인 취향을 그러모을 수 있는 아주 편리한 기능이었으니까.
물론, 자신의 사생활이 낱낱이 공개되는 대참사를 막기 위해 개발자들은 비공개라는 좋은 기능을 만들어놓았기는 했다.
문제는 그 비공개 기능조차 거지같이 만들어놔서 북마크를 전체 비공개하려면 은근히 수고로움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북마크가 공개된 채로 내버려 두는 사람도 많았다.
어차피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었으니.
그리고 우리의 이은별 양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북마크를 공개 상태로 두는 인간이었고, 덕분에 지금 나에게 잔뜩 놀림을 당하는 중이었다.
“은별아 이거 봐봐. 이건 무슨 생각으로 저장해 놓은 거야?”
“···으으.”
그녀를 품 안에 넣어놓고는 핸드폰을 이용해 그녀의 개인 서고를 뒤진다.
가슴팍 안에서 덜덜 떠는 그녀가 느껴졌다.
그녀의 개인 서고에는 재밌는 게 아주 많았다.
홀딱 벗은 여인이 야밤의 골목길에서 전봇대에 쉬야를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안대를 쓴 미인이 절정 컨트롤을 당하는 작품도 보였다.
역시 팩시브 활동을 꾸준히 해서 그런지 북마크 된 그림이 거의 백을 넘어가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취향에 맞게 은근히 하드한 것들뿐이더라. 취향 참 확고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멜돔(펨돔)물이 좋은 게 어떤 식으로든 여성이 나오는 그림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도 약간의 별 거부감 없이 같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물론, 남캐들이 짓는 썩소를 보는 건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 정도야 누군가를 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다.
“응? 은별아 묻잖아. 이런 것들로도 자위 해본거야?”
“흐으으··· 그만! 그만 물어봐요···!”
내가 계속해서 추궁하자 그녀가 애원하듯이 외쳤다.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좀만 더 놔두면 머리 위로 김도 모락모락 새어 나올 것만 같은 모습.
나는 문득 생각해 보았다.
가족에게 직박구리 폴더를 들키는 게 나을까? 아니면 이성에게 음습한 페티시 그림들을 들키는 게 나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둘 중 뭐든지 아주 쪽팔릴 건 확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난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비씨에 싸재낀 글만으로도 놀릴 게 수두룩 한데, 하물며 그림이라는 시각자료까지 있다?
이건 못 참지. 부처님도 기뻐하며 개같이 그녀에게 야짤을 들이밀 게 뻔했다.
마치 자료조사를 철저히 해온 ppt 우등생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한 채,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 은별아. 나는 네가 수갑을 좋아하든, 채찍을 좋아하든, 아니면 개목줄을 좋아하든 다 이해할 수가 있단다··· 아, 물론 골든 샤워는 빼고.”
그건 좀 더티하잖아.
차라리 남자 팔다리 자르는 그림을 보는 게 좀 더 건전하지 않을까?
“흐아아악! 닥쳐요! 제발 조용히 하라고요!!”
나는 발작하는 그녀를 보며 껄껄 웃었다.
그녀의 집에서는 대충 그런 식으로 놀았다. 반응이 꽤나 재미가 있어서 놀리는 맛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얼마 동안 대화를 나누자 밖이 어둑어둑 해지는 게 보였다.
어느새 해가 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더 있고 싶었으나, 이미 야스는 할 만큼 했고 나도 집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맞았다.
“잘 있어. 오늘 재밌었어.”
“···저도요.”
내가 인사하자 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문득 궁금증이 생겨서 물었다.
“나 집 가면 너는 뭐 하려고?"
“······자려고요. 피곤해서.”
우리들 만난 시간이 빨라서 아직 저녁 8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잔다니.
종강을 했는데도 꽤나 부지런한 그녀였다.
키가 크려 그러나.
“쯧쯧, 한창때인데 벌써 잔다니. 체력이 그 모양이어서야 되겠어?”
“오빠 때문에 피곤한 거잖아요!”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너무 놀리면 진짜로 화낼 것 같았기에, 나는 대충 손을 흔들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면서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글러먹은나’가 북마크 한 그림들이 실시간으로 비공개 처리가 된 것이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쪽팔렸던 모양이었다.
모두 정보보호를 철저히 하도록 하자.
*
“······후우.”
집에 도착한 후 나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거센 탈력감이 내 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 텅 빈 듯한 느낌.
야스를 하면 이게 안 좋았다.
할 때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만, 끝난 이후에는 상당지 몸이 지친다는 것 말이다.
몸에 있던 양기를 잔뜩 빼내서 그런지, 들어 올리는 팔에는 힘이 없고 머리도 약간 멍한 기분이었다.
물론 재미는 있었다만, 이것은 확실히 단점이긴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침대 위로 다이빙하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엎드린 체 입으로 중얼거렸다.
“일하기 존나 싫다아.”
열심히 놀다 왔으니, 이제는 다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법.
불행하게도 지금 나에게는 아직 완성 못한 금태양 원고를 끝마칠 의무가 있었다.
이제 슬슬 업로드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오늘 조금이라도 못써두면 기한 안에 맞추기 힘들 수도 있었다.
이게 다 과거의 내 잘못이었다. 과거의 내가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더라면 지금의 나는 안락한 침대와 2차적으로 야스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문득 머릿속에서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아니, 과거의 나 새끼는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해야 할 일을 미뤘던 거지?
‘···놀았구나.’
생각해 보니, 과거의 나도 지금과 똑같이 놀음을 좋아했다.
종강 날에는 신나서 은별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갔고, 그 다음날에는 하루만 쉬자는 생각으로 유튜브에 빠져 있었지.
그렇다 보니 연재분이 채워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래 최근에 너무 놀긴 했지···.’
짤쟁이가 자기 본분을 잊고 감히 섹스에만 연연하며 살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의 나쁜 물을을 빼내주어야 할 인간이, 자기 나쁜물 빼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긴 했으나, 이러다가는 언제 굶어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당장 이번 달 월세 낼 때도 다가오고 있었고.
‘일단 월세 낼 돈은 있긴 한데.’
놀라운 점은 진짜로 월세 낼 수준의 돈 정도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걸 시무라 아주머니에게 낸다면? 나는 다시 돈 없는 찐따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니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건데···.
“어으, 존나 귀찮다 진짜.”
진짜 내 몸이 타블렛 펜을 잡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미 섹스를 함으로써 극상의 쾌락을 맛본 상태인데, 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린다면 뇌가 지루해 할게 뻔했다.
심지어 지금 내가 그려야 하는 건 금태양이라는 인간의 남자 고추였다.
당연히 씨발 그리고 싶을 리가 없는 것이다.
온몸이 펜 잡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 슬슬 악마의 유혹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짜 딱 오늘까지만 쉴까···?’
그 악마란 7대 죄악 중 나태를 담당하는 악마였다.
달콤한 벌꿀 같은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솔직히 머리도 잘 안 굴러가는데 오늘 하루를 조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딱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부터 빡세게 일하는 거야.
‘오.’
아무래도 그 나태의 악마는 천재인 모양이었다.
고민은 짧았고, 결단은 빨랐다.
그래, 오늘은 쉬는 것이다.
시원하게 야스를 하고 왔으니, 그냥 오늘 하루를 아예 제대로 조져버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미래의 내가 ‘이 씨발새끼야’라고 욕하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꼬우면 과거의 나를 욕해야지. 만악의 원흉은 그 새끼니까.
어쨌든, 나는 쉬기로 마음먹었고, 이제부터 침대 위로 다이빙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건 해줘야지.’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할 일은 해주었다. 이미 그려져 있던 그림을 팩시브에 투고하는 것이다.
오늘 낮에 이은별에게 보여줬었던, 내 아바타가 있는 그림이었다.
내 아바타가 들어가 있다는 게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애써 그린 그림을 이대로 썩힐 수는 없는 법.
만들어 놓았으니, 이렇게 홍보 차원에서 공개라도 해야 했다.
물론, 내 알몸이 그냥 나오는 상태로 올리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또 무슨 참사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대충 핸드폰에 깔려져 있는 포토샵 앱을 이용해 그림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또 그라비아 아이돌이 될 수는 없으니, 홀딱 벗은 내 아바타에게 약간의 옷을 입혀준 것이다.
위쪽과 아래쪽을 대충 남색으로 칠한다.
그것만으로도 살색은 충분히 가려졌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완벽하군.’
그린 옷이 꼬꼬마가 크레파스로 대충 칠한 듯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그림 자체는 예뻤다.
예쁘면 됐지.
띠링!
그렇게 그림을 투고하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내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이제는 어느정도 인지도가 생겨서 그런지, 그림이 올리자마자 찾아오는 딸쟁이들이 꽤나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댓글들을 확인해 보았다.
과연 내 예상대로였다.
[암갈비쥐: 진짜 지랄하네ㅋㅋㅋ 바지 벗고 후다닥 달려왔는데 갑자기 몸은 왜 가려놓음?]
[쇼고타츄: 차라리 옷이라도 제대로 입혀줘... 왜 색칠만 해놨어요... 이 ^^발 새끼야]
[그림지망: 아니, 여자 캐릭터는 또 알몸이네; 작가님 진짜 레즈에요?]
[두부왕: 내가 볼 땐 이 사람 100%레즈임 ㄹㅇ]
예상대로 활활 불타는 댓글창이 보인다.
개꼴리는 야짤을 생각하며 들어왔는데, 정작 남자 캐릭터가 옷 같지도 않은 걸로 꽁꽁 싸매고 있으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물론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다지 큰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욕들을 들으니 내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마음에 들어.”
물론,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라비아 아이돌 데뷔는 한 번이면 족했으니까.
‘안 돼. 보여줄 생각 없으니 돌아가.’
나는 머릿속으로 근엄한 판사님을 생각하며 킥킥 웃었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내 핸드폰이 울린 건.
띠링!
알람이 울리며 상단에 메시지 하나가 뜬다. 이번에 뜬 건 팩시브 댓글이 아닌 오픈 채팅방 알람이었다.
[qwer1: 뭐에요?]
[qwer1: 요즘 저 캐릭터에 꽂혔나 보네 ㅋㅋ]
[qwer1: 근데 몸은 왜 가림?]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았던, 나에게 30만 원이나 바쳤었던 예의 없는 물주님.
오랜만에 ‘qwer1’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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