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72, 이게 왜 여기에
* * *
이은별에게 말을 꺼낸 직후, 세원은 곧바로 후회했다.
‘흠···.’
방금 자신의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게이같았기 때문이다.
‘나로 몇 발 뺐어?’라니.
마치 나르시시즘에 걸린 게이가 자신의 남친에게 섹스 어필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걸 생각하니 약간의 자괴감이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짓거릴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확실히 효과는 있었으니까.
그의 말에, 은별은 속으로 되물었다.
‘뭐, 뭐라고?’
왜 속으로 되물었냐 하면, 그녀의 몸이 굳어서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왔기 때문이다.
세원의 갑작스러운 일격은 그녀를 잠시 정지시킬만한 파괴력이 있었다.
그녀는 약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발밑에 놓인 휴지통을 쳐다보았다.
‘미친··· 저걸 왜 안 치워서는!’
솔직히 말하면, 아까 정리할 때 눈에 밟히기는 했다. 별생각 안 하고 그대로 지나가서 그렇지.
설마 저걸 살펴볼지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저런 쓰레기 종류는 현관문 바깥에 나가서 버리고 와야 한다.
안 그래도 옷 갈아입느라 시간이 촉박했었는데, 저것까지 치울 여유가 그때의 은별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게 이렇게 스노볼이 구를 줄이야.
‘일단 시치미부터 떼자.’
굳어있어봤자 자기 속마음만 밖으로 내보일 뿐이다. 그녀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무슨 소리예요 오빠. 장난 그만쳐요.”
그녀는 임기응변 능력이 나름 높은 편이었다. 뛰어난 사교성으로 설사 곤란한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주의를 분산시킨다든지, 그럴듯한 변명을 만든다든지 해서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 만약 평범하게 딸친 휴지를 들킨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문제라면, 세원의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은별을 보며 심문하듯이 물었다.
“진짜?”
“네, 네.”
“진짜로 아니라고?”
“그렇다니까요···.”
“막 날 반찬삼아서 자위하거나 그런 적 없어?”
“아, 아니라니까! 자꾸 그런 건 왜 물어봐요!!”
결국 은별은 창피함을 참지 못하고 빼액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얼굴이 점차 화끈거려왔다.
두 볼이 불타는 듯 뜨거웠고, 등 뒤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은별은 살짝 질린 기색으로 이세원을 쳐다보았다.
이 미친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촉은 또 왜이리 좋고···.’
안 그래도 그가 온다는 소식에, 어제 미리 그를 이용해 한바탕 욕정을 해소했던 그녀였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면 긴장하는 마음이 사라질까 하는 마음에 했던 일이었다.
설마 다짜고짜 자길 반찬 삼았냐고 물어볼 줄이야···내심 뜨끔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애써 다음을 다잡았다.
“정말로?”
“네, 그니까 그만 물어봐요.”
그녀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그는 물증이 없을 테니까. 비록 휴지통에 휴지가 쌓여있다고 한들, 그게 자위한 것이라고 완전히 확정난 것도 아니었고.
그를 반찬으로 삼았다는 비약도 결국엔 심증뿐일 것이다. 자신이 어젯밤에 딸을 쳤는지, 원딜라인으로 죄수번호 1/9/6을 찍었는지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애초에 그도 장난으로 물어보는 걸 것이다. 평소에도 은근히 장난을 자주 치던 그였으니까.
자신이 이렇게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으면 그도 자연스럽게 넘어갈게 뻔하다······.
라고 은별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세원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래?”
은별은 잠시 앞을 쳐다보았다. 어색한 몸짓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그가 보인다. 그렇다 어색한 몸짓이었다.
마치 뒤에 말을 꾸며주기 위해 행동으로 빌드업을 하듯, 연기를 닮은 몸짓이었다.
‘어?’
순간 은별은 뭔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난감한 상황이, 지금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마치 뱀의 아가리에 들어온 듯 습하고 답답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싸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그러면 그 그림은 그냥 감상용으로 신청했던 건가.”
“···?!”
그 말에, 은별은 잔뜩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림?’
갑자기 그림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지? 나올 껀덕지가 없었는데?
물론 그가 미대 입시를 준비했었고, 그렇기에 그림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이 상황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웬만해서는, 지금 이 상황에 절대 나올 리가 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그 그림’이라니··· 무언가를 지칭하는듯한 말에, 은별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가정이 스쳤다.
‘설마’라는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되뇌어진다.
창피함 때문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제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의해 다시 핏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세원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별아.”
“네, 네?”
“내가 용돈벌이로 커미션 신청을 받는데 말이야··· 아, 커미션은 알지? 그림 의뢰받는거.”
“아, 알죠···.”
알다마다.
자신만큼 커미션을 자주 신청하는 사람도 드물 테니 말이다. 당장 며칠 전에도 그와 관련된 커미션을 하나 넣었었는데, 커미션이란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 내가 그 커미션으로 최근에 꽤나 재밌는 신청을 받았거든.”
세원의 말이 점차 이어진다.
그녀는 슬슬 목이 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가정이 점차 크기를 키워갔다.
혹시, 만약에.
그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주었던 거라면? 그렇기에 지금 이런 식으로 추궁하고 있는 거라면?
자신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세원의 입에서 정보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은별은 점차 구석으로 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웃으며 부정했다.
‘에이, 설마···하하.’
차분히 생각하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얼마나 희박한 확률인가.
자신이 그림을 신청했던 인간이, 하필이면 같은 대학을 다니던 동기라니. 심지어 그냥 그림도 아니고 무려 야짤이었다.
남자 성기가 막 나오고, 여자 나체가 나오는 그렇고 그런 음지의 작품이란 말이다.
심지어 그 작가의 것은 은근히 하드한 느낌이 나는 그림인데, 그런 걸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이런 ‘남자’가 그렸다?
웬만해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끔 그런 믿을 수 없는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야.”
그녀의 생각을 부정하듯 세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핸드폰 봐봐.”
더 이상 불필요한 대화는 잇지 않겠다는듯한, 차가운 명령조의 말.
그는 어느새 자신의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우우웅! 하며 은별의 핸드폰이 울린다.
은별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방금 막 ‘hala’에게서 온 따끈따끈한 그림이 자신의 눈앞에 비추었다.
‘미, 미친.’
자신이 원하던 대로, 이세원을 닮은 얼굴의 남자가 침대에 엎드린 여자의 엉덩이를 스팽킹 하는짤.
그 특유의 그림체에 맞게 그림 자체가 꽤나 역동적으로 그려졌으며, 자신의 상상을 그대로 구현이라도 한 듯 배경과 구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평소였다면 좋다면서 바지를 벗고 차분한 감상 타임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든다면서 그자리에서 두발정도 뺐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은별은 지금 전혀 그럴수가 없었다.
그림에 나온 여자캐릭터가 완전히 자신을 빼다박았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밤하늘색의 머리카락과, 찡그려진 자신의 얼굴.
그걸 확인한 은별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내가 왜 여기에?’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딸친 휴지통 같은 건 뒷전으로 밀린 상태였다.
지금은 그딴 것보다 더한 문제점이 하나 생겨있었으니까.
그녀의 머릿속에서 의문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가 스스로 풀린다. 싸해진 머리통은 무의식적으로 흩어진 퍼즐들을 맞춰나갔다.
어째서? 자신은 ‘hala’라는 인간한테 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사진은 커녕, 어떻게 생겼다는 이야기 조차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그림에는 왜 자신의 모습이 떡하니 들어가 있는가.
정답은 간단했다.
그의 말하는 듯한 뉘앙스나, 현재 상황, 풀린 정보들이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가르켜주고 있었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온 것이다. 자신이 몰래 그와 관련된 야짤을 신청했다는 것도, 그걸로 딸감삼아 자위를 했었단 것도.
“······.”
은별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핸드폰으로 떨궈졌던 고개를, 다시금 위로 들어 올린다.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는 이 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과연 그는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까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꿀꺽.
은별은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렇게 확인한 세원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화난 사람처럼.
‘흐윽!’
그걸 확인한 은별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싸늘한 얼굴이 상상이상으로 무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입가에는 웃음기 하나 없으며, 눈가에서는 냉기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말한다.
“은별아.”
평소와 다른,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만약 내가··· 이 그림을 가지고 경찰서에 가면 어떻게 될까?”
마치 넌 좆됐다는듯이.
‘마, 망했다···.’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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