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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71화 (71/125)

〈 71화 〉 71, 자취방

* * *

저번에도 말한 적 있을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은 결국 빠르게 지나가기 마련이라고.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빠릿빠릿해서, 불필요한 파일들이 생기면 며칠 내에 자동적으로 정리하는 편이었다.

분명 무의식의 어딘가에는 남아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꺼내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당장 며칠 전에 먹은 점심을 잘 기억 못 하는 것과 같다. 몇 달, 몇 년 전에 먹은 특식은 어렴풋이 기억하면서 말이다.

우리 뇌는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 인상 깊은 것을 좀 더 잘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끔 특식을 먹어줘야 한다.

나는 그런 잡생각을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아린아···.’

어느덧 너와의 섹스는 단조로운 일상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애초에 우리 만나는 날이 너무 적잖니. 일주일에 한 번으로는 20대 청년의 혈기왕성한 성욕을 억제하기 힘든 법이란다.

그리고 눈앞에 자신을 먹어달라는 떡이 있는데, 이것을 먹지 않는 것은 떡에게도 실례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타블렛 펜을 탁 내려놓았다.

지금 내 눈앞에는 방금 막 다 그려낸 따끈따끈한 그림 한 장이 명멸하고 있었다.

‘글러먹은나’에게 커미션 신청을 받은 후, 4일간 내가 그려낸 작품이었다.

나체의 내 아바타가 작품 속 여자 캐릭터를 희롱하는듯한 그림···.

이제 두 번 정도 그리게 되니까 내 몸 그리는 것도 살짝 적응이 되더라.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내용은 뭐 간단했다.

작품 속 여자는 침대 위에서 양팔과 양 다리가 수갑에 묶여있었고, 나(그림)는 그런 여자의 엉덩이를 매우 후려친다.

캐릭터의 엉덩이는 새빨갛게 물들었고, 그게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 보여서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로우앵글로서 여자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내 썩소가 잘 보인다는 게 포인트였다.

평소 그녀가 신청했던 내용들보다 살짝 하드한 종류의 내용이었다. 뭐 그래도 따지자면 이것도 sm 플레이의 한 종류니까.

여자 캐릭터는 특별히 이은별을 닮게 그려주었다.

‘너도 날 작품에 등장시키고 싶어하는데.’

나도 그림으로 좀 써도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메인메뉴 상단 바에 있는 시계가 어느덧 1시 22분을 가리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은별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대충 2시쯤이니까··· 지금부터 나갈 준비를 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래, 오늘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기대되네.’

어떤 식으로 놀려줄까. 나는 그것을 가면서 생각했다.

*

한편 은별의 집안.

“후으··· 떨려.”

그녀는 자신의 집안에서 조용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쿵쿵. 일정한 간격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 혼자밖에 없는 몇 평짜리 방은 꽤나 적막해서, 그 심장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일단은 심호흡을 하며 애써 진정시키고는 있긴 하지만···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다름 아닌 그가 지금 자신의 집안으로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다는 것은 좋았다. 솔직히 같이 술을 먹었었던 그날, 이제는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그가 대뜸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온다는 것이니까.

그것은 꽤나 설레는 일이었다.

무릇 여자라면 마음에 드는 이성을 자신의 자취방으로 초대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었으니. 일단 자신은 그 욕망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의 저의가 도저히 예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려는 걸까··· 대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그런 걸 생각할 때면 자동으로 마음속에 걱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이럴 때가 아니야.”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던 그녀는 이내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럴 때가 아니다. 그가 오기 전에 가볍게 집안 정리라도 해야 했다. 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속옷과 옷가지들을 보아라.

이런 혼잡한 장면을 그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가볍게 집 안 청소를 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대충 옷장 안에 쑤셔 넣고, 청소기를 켜서 바닥에 쌓인 먼지들을 훔친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그녀는 가볍게 화장도 하고 가볍게 옷도 꾸며입었다.

평소에 자주 입던 꽉 조이는 청바지가 자신의 다리를 감싸며, 얇은 티셔츠와 갈색의 가디건이 상의를 덮는다.

집안에서 꽉 조이는 청바지를 입다니··· 꽤나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별로 후회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후줄근한 차림으로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띵동!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가만히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얼마 시간이 가지 않아 현관문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 잠시만요!”

그녀는 헐레벌떡 일어나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 뒤에는 저번 술자리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이세원이 서 있었다.

연회색의 반바지와, 검은색의 셔츠. 노출보다는 옷의 맵시가 잘 살아나는 옷이었다.

잠시 그 안의 살결을 잘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일단 저건 저것대로 무척 어울렸다.

세원은 은별을 발견하고는, 살포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은별아. 오랜만이야.”

“아, 네, 네··· 들어오세요.”

그 모습에 은별은 잠시 굳을 뻔했지만, 일단은 애써 정신을 차린 뒤 그를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신발을 대충 정리하고 그가 안으로 들어온다.

집안에 들어온 이세원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짧게 감탄을 날렸다.

“오··· 깨끗하네?”

방 안은 꽤나 깔끔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벽면의 한구석에는 큼지막한 침대가 하나 있었고, 그 옆으로는 컴퓨터가 올라간 책상 하나가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휴지통이 하나 위치해 있어서 쓰레기를 처리하기 편해 보였다.

침대와 조금 떨어진 반대편을 보면 아령이나 요가 메트 같은 가벼운 운동기구들이 정렬되어 있는 게 보였다.

과연 체교과답게 집에서도 가벼운 운동을 하는 모양.

여자애 방 같은 하늘하늘한 분위기는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방이었다.

“하하··· 정리를 좀 했거든요.”

세원이 감탄하는 걸 본 은별은 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그가 오기 전에 허둥지둥 정리한 보람이 있어서. 은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편하게 앉아 있으세요. 제가 마실거라도 내올게요.”

“아, 그래.”

세원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은별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면서 다짐했다.

‘오늘은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물론 그게 지켜질 일은 없었다.

*

침대에 앉은 후, 나는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감상했다.

눈앞에는 책상 의자를 끌어와 정자세로 앉은 그녀가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한 지 꽤나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손과 발가락이 꼼지락 거리고, 시선이 이리저리 휘둘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예쁘게 꾸몄네.’

아아, 그 말대로. 그녀는 오늘 꽤나 화려했다.

얼굴에는 가벼운 화장이라도 한 건지 평소보다 이목구비가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고, 그 덕분에 안 그래도 아름다웠던 외모가 좀 더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밤하늘색의 머리카락은 그녀 특유의 분위기를 더욱 살려주는 듯 했다.

얼굴만 해도 이 정도다.

얼굴 아래로 내려가서는 타이트한 옷차림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몸이 옷에 딱 달라붙어서인지, 그녀의 고운 곡선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잡으면 살짝 넘쳐흐를듯한 가슴과, 얇은 허리, 그리고 빠방한 엉덩이까지.

꽤나 관리가 잘 된 몸이었으며, 그렇기에 무척이나 남심을 자극하는 육체였다.

만약 이곳이 원래 세계였다면 남자들이 다들 한 번 씩은 뒤돌아봤으리라.

‘이런애가 날 딸감으로 삼다니···.’

꽤나 신기한 기분이었다.

야스각은 당연히 섰고, 솔직히 이대로 덮쳐도 그녀는 좋아라 하며 다리를 벌려줄 것 같긴 했다.

당장 제 소중이도 신호만 준다면 언제든지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참기로 했다.

이미 다 잡은 먹잇감이다. 꽤나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을 이대로 놔 줄 수는 없었다.

쥐를 잡아챈 고양이가 그것을 가지고 놀 듯, 나도 그녀를 잠시 놀려보기로 했다.

“···아! 이렇게만 있지 말고 게임이라도 하실레요? 집에 트럼프 카드가 있는데··· 아니다. 룰 하신다 하셨으니까 컴퓨터로 게임해도 상관은 없어요.”

그렇게 혼자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자 그녀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입을 연 모양이었다.

게임이라··· 나쁘지 않긴 하지. 내가 평범하게 놀러 온 거라면 말이다.

나는 조용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야. 일단 이대로 좀만 있자.”

“앗, 넵···.”

그 말에, 그녀가 금세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대로 있고 싶다는데 그녀가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다시 정적이 깔린다. 적막한 방 안에는 TV 조차 없어서 그저 냉장고 굴러가는 소음만 작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우우우웅. 냉장고의 저주파가 공기 중에 울릴 때면, 내 마음도 뭔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정작 이은별은 더 어색해졌는지 입가에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조용이 있기를 잠시, 나는 문득 침대 밑에 있는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통 안에는 적당량의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방 안을 정리하면서 미처 쓰레기통까지 정리할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다.

문득 흥미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호오?’

‘여자’혼자 사는 방 안에 침대 아래쪽 휴지통이라··· 뭔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조합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재미난 생각이 난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 조용히 있는 것도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 만약 내가 이 휴지통을 살펴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한 게 생긴 나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주의를 잠시 살펴보는 척하다가, 이내 휴지통을 흔들기 시작한다.

내가 갑자기 휴지통을 살피려고 하자 그녀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어어? 자, 잠깐 뭐하세요 더럽게!”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몸을 앞으로 내민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저 휴지통을 흔들었다.

“가만히 있어봐.”

흔들흔들.

원통의 휴지통이 움직일 때마다 안에 있는 내용물이 뒤섞인다. 가벼운 쓰레기들이 공중에서 잠시 유영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에는 쪼그라든 사과주스 팩과, 빵 비닐봉지, 그리고 뭉친 휴지 같은 게 보였다.

그래, 뭉친 휴지. 이상하게 이게 특히 많더라.

마치 안의 있는 내용물을 감싸듯, 또는 무언가 진득한 액체를 닦아낸 듯. 꾸깃꾸깃 구겨진 것들이 많았다.

굳이 손에 들어 살펴보지는 않았다. 뭔지 대충 예상이 가니까. 아마 내 생각이 맞는다면, 저건 그 ‘나쁜물’들의 흔적이었다.

솔직히 그냥 장난삼아 쳐다본 건데 진짜 있을 줄이야.

그렇게 잠시 휴지통을 가지고 놀 때였다.

“자, 잠시만요! 그거 이리 주세요!”

탁!

그녀가 내 앞에 끼어들며 휴지통을 가로채간다.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볼에 옅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마치 부끄러운 걸 들키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나는 좀 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뭉친 휴지가 많네 은별아.”

“아하하···제가 비염이 있어서···.”

그 변명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닌데, 적어도 내가 볼 때 그녀만큼 숨을 잘 쉬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 사람이 욕정이 쌓이면 풀 수 있는 법이니까.”

당장 나도 작년에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히토비를 보며 나쁜 물을 빼낼 때가 많았다.

자취의 이점이 이것이었다. 주변에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내 좆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20대의 혈기왕성한 피는 그 자유로움을 마음껏 이용했고, 그렇다 보니 이렇게 휴지뭉치가 쌓이는 것도 당연했다.

집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마음껏 자위하고 대충 치울 수도 있지.

뭐, 결국에는 그 자유로움 때문에 방심해서 미처 휴지통을 못 비운 모양이지만 말이다.

나는 잠깐 상상을 그렸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이성에게 내가 딸친 휴지를 걸린다면 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오우···.’

상상만 해도 창피함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쩐지 지금 내 앞에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그녀가 살짝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당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닌데, 굳이 내가 그녀를 배려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없겠지.

“아니, 진짜 아니에요··· 제, 제가 저번에 코감기가···.”

“솔직히 말하자.”

그래서 나는 슬슬 시동을 걸기로 했다. 그녀가 좀 더 당황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나에게 좀 더 위축될 수 있도록.

두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조용한 어투로 물었다.

“나로 몇발정도 뺐어?”

“······네?”

그 말에 그녀의 눈이 살짝 움찔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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