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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70화 (70/125)

〈 70화 〉 70, ㅍㅂㅈㅇ

* * *

공기가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정지하여 이곳에 잠시 머무르는 듯 했다.

분명 몸에는 자유가 있는데 움직이지를 못하는 기분. 차가운 적막감만이 이곳에서 감돌 뿐이었다.

‘어?’

은별은 말을 꺼낸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후회했다.

다름이 아니라 너무 급발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각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이 무슨 멜로 영화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신이 이세원과 깊은 대화를 나눈 상태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저기압 상태로 입을 꾿 닫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곤란한 질문을 한 것이니.

마치 교류 한 번 나누지 않았던 찐따가 갑분 고백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자신은 절대로, 이런 초라한 상황에서 그런 고백 비스름한 말을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어느새 입을 연 후였다.

‘미, 미친··· 방금 내가 뭐라 한 거지?’

술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술 때문이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 건, 알콜이 제 머릿속 필터망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술에 취하면 자주 함부로 입을 열어젖히던 그녀였다. 그 버릇이 결국 일을 그르친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욕했다.

‘야이 미친년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분명 자신은 방향상으로 에어컨을 정면으로 맞는 위치인데, 이상하게 목 위로는 뜨겁기만 했다.

그래도 일단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 아하하··· 별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물론, 별로 도움 되는 변명은 아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렇게나 직관적으로 물어봤다면 그 또한 알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의 입에서 무언가 고민하는듯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흐음······.”

손에 든 술잔을 흔들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그가 보인다. 아무래도 그는 뭔가 고민하는 게 있으면, 손에 있는 것을 돌리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오히려 부정적인 감각만을 더 키울 뿐이었다.

물리적 시간으로는 찰나인, 그러나 은별의 체감상으로는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났다.

세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그녀의 난감한 질문에 돌아온 건, 똑같이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음, 어떻게 생각할 거 같냐고.”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자신을 향한다. 그의 검은 동공 뒤에는 당황하고 있는 은별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일단 웃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질문으로 되돌아올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그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자 저절로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은별의 입에서 나온 건 대답이 아닌 단순한 말꼬리 늘어뜨리기였다.

“그······.”

머릿속은 여전히 굴러가지를 않고 있었다.

‘뭐라 말해야 하지?’

솔직히 말하면 별로 좋은 감정은 안 느낄 것 같았다. 자신이 그와 친하게 지낸 것과 달리, 자신은 꽤나 많이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좋게 생각해 봤자 그냥 친한 친구 A 정도가 아닐까, 이은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고, 또 그렇다고 자신을 올려치기 할 수도 없으니···.

여러모로 진퇴양난의 상황인 것이다. 그녀의 말문이 막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으······.”

째깍째깍.

다시금 시간이 늘어진다. 1초였던 시간이 쪼개지며 수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별은 속이 갑갑해지는 걸 느꼈다. 차라리 누가 나서서 이 상황을 망가뜨려줬으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드르륵!!

룸의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제 친구들이 들어온 것은 말이다. 그 둘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시끄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야, 은별아! 이새끼 원래 담배 6미리 피냐?”

“어, 어? 응. 아마도···.”

“와 빨리 뒤지려고 발악을 하네.”

“아니! 1미리랑 6미리랑 별 차이 없다니까?”

아무래도 둘이 밖에서 뭐라 뭐라 떠들다가 온 모양.

갑작스러운 주정꾼들의 등장에 사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공기가 재빠르게 흩어졌다.

단단하기 그지없었던 침묵이 개박살나는데에는 5초면 충분했다.

이은별은 그녀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은별은 지금만큼 제 친구들에게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

이후 술자리는 뭐··· 적당히 이어졌다.

비교적 활발한 유보람과 송재은에 의해 분위기는 다시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세원은 잠깐 은별을 힐끔거리기는 했지만 딱히 뭐라 말을 걸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애들이 많다 보니 따로 은별에게 말을 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위기 자체는 아까까지와 별 차이 없어 보였다.

마치 알록달록 색채를 넣고 있던 그림에 다시 발랄한 노란색을 덧칠하듯. 분위기 자체가 발랄하게 변한 것이다.

그러나 도화지에 노란색을 덧칠했다 한들, 그 아래에 있던 그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발랄한 분위기 아래에서는 여전히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주로 이은별의 심리가 그랬다.

분명 여기는 재밌게 놀아야 할 술자리인데 자신만 별나라에 가 있는 기분.

어색한 공기가 자신의 목을 옥죄는 듯했다.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한 은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나 잠깐만 화장실 좀···.”

“응? 아, 그래.”

옆에 있던 송재은에게 말을 건넨 후 룸 밖으로 나간다.

은별은 그대로 화장실까지 걸어들어가 가볍게 물세수를 했다.

찰팍! 찰팍!

차가운 수돗물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머릿속의 그 기억도 점차 또렷하게 상기되었다.

그녀는 세수를 마친 뒤, 대충 아무 화장실 칸에 들어갔다.

그리고 쪽팔리다는 듯 제 얼굴을 감쌌다.

“아으으··· 야이 미친년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진짜 개븅신짓을 한 것 같았다. 좀 더 친해져서 고백을 해도 모자랄 텐데, 그렇게 개찐따스럽게 고백을 해버리다니.

물론 직접적인 고백은 아니었긴 하지만, 제 마음은 분명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그는 생각보다 눈치가 좋았으니까.

그걸 의식해버린 순간 이미 평범한 친구 사이는 물 건너간 것이다. 원래 남녀 사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끝인가.’

아마 오늘 일로 확실하게 관계가 서먹서먹해질 것 같았다. 오늘 낮부터 저기압을 달리던 기분이 지금 최저점을 찍는 기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만 마치고 집 가서 평소처럼 자위나 하고 싶었다.

그러면 오늘 하루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어질 것 같은데 말이다.

이미 그에게 반쯤 차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차라리 미련도 풀 겸 오늘도 ‘그 그림’을 이용해 실컷 성욕 해소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고 은별은 생각했다.

한껏 급발진을 한 다음에, 집 가서 음습하게 그의 그림을 보고 딸치는 자신이라···.

“흐··· 이런게 패배자위인가···.”

그녀는 그런 실없는 농담을 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물론 별로 재밌지는 않았다.

그래도 꽤나 괜찮은 방법 같기는 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 이 기분을 풀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변태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반찬 삼는 것도, 이제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니, 근데 그 그림도 슬슬 질리는데···.’

껌을 계속 씹으면 단물이 다 빠지듯이, 슬슬 그 그림도 뽕빨이 떨어지는 것이다.

하긴 그림 한 장으로 무려 7번이나 넘게 빼냈는데 한계가 찾아오는 것도 당연했다. 이럴 때는 보통 새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주머니 속 핸드폰으로 향했다.

‘···다시 신청해야 하나?’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긴 했다. 확실히 그를 반찬 삼아 딸딸이 치는 것은 꼴리긴 했지만, 확실한 배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번에 신청했던 그림이 타르탈로스에 게시되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 일을 경험했던 그녀는 웬만해서는 신청을 미룰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이라는 게 있다.

인간의 행동을 주로 추진시키는 건 이성보다는 감정이었고, 그러한 감정은 보통 어느 한구석에 몰렸을 때 더욱 잘 발동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특히, 지금처럼 술을 마셔서 이성의 어느 한 부분이 마비된 상태라면. 그까지 도덕심 정도야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이번만···.’

그녀는 그렇게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띠링!

한창 유보람과 함께 화채를 코박죽하여 먹고 있을 때였다.

예상외로 화채는 시원 달달하니 맛있더라.

양이 좀 적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름에는 화채만큼 괜찮은 후식이 없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처음에 그리 투덜거리던 유보람도 저렇게 잘 먹는 것이고.

나는 특히 화채의 내용물 중에서도 코코넛 젤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왜,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을 보면 정육면체의 새하얀 젤리 있지 않은가. 코쟁이들 피부처럼 새하얀 그것들 말이다.

마치 서양백마의 살결같이 새하얀 젤리를 보면, 내가 저것을 꼭 먹어야겠다는 충동이 들기 마련이었다.

쫄깃한 식감의 코코넛 젤리를 씹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서양눈나의 젖꼭지를 씹고 있는 느낌이기도 했다.

서양눈나의 젖꼭지도 이렇게 달달한 맛이 날려나··· 그렇다면 나는 당장 유럽으로 이민 갈 생각이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화채를 먹고 있을 때였다.

띠링! 띠링!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으로 연속되어 알람이 울린다.

덕분에 나는 화채 먹방을 멈추고 핸드폰을 볼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채팅창을 보니 어느새 ‘글러먹은나’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방금 전의 화장실을 간 이은별의 또 다른 이명이었다.

[글러먹은나: 안녕하세요..ㅎㅎ]

[글러먹은나: 그 커미션을 신청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글러먹은나: 혹시 저번에 했던 캐릭터로 다시 한번 가능할까요?]

“···응?”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화장실에서 사고회로가 어떻게 돌아가면 갑자기 커미션을 넣는 건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이었다.

‘오늘따라 재밌는 반응이 많네.’

아까는 갑자기 곤란한 질문을 물어보질 않나, 혼자 시무룩해 있지 않나. 오늘 하루 꽤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였다.

솔직히 아까 물어봤을 때 평범하게 대답 해줄 수 있었다.

대충 예뻐서 좋다든지, 애는 착해서 괜찮을 것 같다든지 등 무난한 답변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 아마 그녀도 그런 방식으로 넘어가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조금 놀리다가 평범하게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뭐, 결국 애들이 들어와서 말은 못 전했지만.

나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나 나에게 호감을 표현해주는데.

‘나도 대답해주는 게 맞겠지.’

드르륵!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화장실에 갔다던 그녀가 다시금 룸 안으로 들어온다.

얼굴에는 꽤나 침울한 기색이 깔려 있었다. 평소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꼬리가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축 처진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걸터앉더니 그대로 테이블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 모습이 마치 침울한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아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를 잠시 보다가, 이내 주위를 살짝 살폈다.

“야, 야. 화채 존나 맛있다.”

“그치? 봐봐. 이게 후식으로는 미쳤다니까.”

마침 송재은과 유보람은 화채에 관한 토론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내 옆에서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송재영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니까 즉, 지금 우리에게 신경 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말 두세 마디 건네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나는 맞은편에 있는 이은별의 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톡톡.

갑작스러운 자극에 그녀가 움찔하는 게 보인다. 테이블에 꽂혀있었던 시선이 이번에는 나에게 향했다.

나는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소곤소곤 말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너네 집에 놀러 가도 돼?”

화요일이면 대충 4일 뒤다. 대충 종강도 했으니 거리낄 것은 없겠지.

그 말에 그녀는 참 여러 가지 반응을 보여주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다는 듯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당황하며 거세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넵!”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어우, 한 번만 끄덕거리면 되는데 저러다 목 부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래도 방금 내 말로 조금은 안심했는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는 그녀가 보였다. 침울했던 얼굴에 약간의 밝은 빛이 되돌아온다.

그걸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4일 뒤에 보자.’

4일 정도면 네가 신청했던 그림도 다 완성되겠지.

그렇게 술자리가 저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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