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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69화 (69/125)

〈 69화 〉 69, 단추

* * *

누가 시무룩해있든 말든, 일단 술자리 자체는 꽤나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어찌 되었든지 술의 힘은 꽤나 위대했으니까.

적당량 들어온 알코올은 뇌의 불필요한 제어장치를 망가뜨려주었으며, 사람을 대하는 데에 거리낌을 없애준다.

실수를 저지를 확률도 높아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먹서먹한 사이를 풀기에는 제격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방 안의 이들은 빠른 속도로 말을 트고 있었다.

“아하, 그니까 너는 원래 경영학과를 가고 싶었다는 거네?”

“네, 근데 재영이 저게 경제 쪽으로 가고 싶다고 해가지고. 사실 마케팅 쪽이면 상관없을 것 같아서 그냥 따라왔어요.”

“하긴 이름은 비슷하니까···.”

이세원은 앞의 송재은의 말을 들어주면서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먹었다. 짭짤고소한 감자튀김의 맛이 입안에서 맴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튀김이 약간 눅눅해졌긴 했지만, 그래도 입에 묻어있는 쓴맛을 진정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덕분에 울렁거리는 속에 약간의 느글거림이 추가되긴 했지만, 그 정도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몇번 정도 손짓을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감자튀김도 바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걸 본 유보람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스읍, 안주 다 떨어졌네. 뭐 하나 더 시킬까요?”

“아, 그래.”

“나 화채 먹고 싶어!”

“화채 이지랄, 너나 송재영 저 새끼나 똑같이 빌런이야 시발.”

“화채 막상 시키면 잘 먹으면서 뭘.”

결국 다음 안주는 화채로 결정되었다.

술자리는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보통은 이렇게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가끔 술이 줄어드는 속도가 감속된다면 간단한 술 게임을 돌리면서 분위기를 띄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이 꽤나 많이 쌓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4병으로 시작했던 병들이 6병, 7병 천천히 늘어나더니··· 이제는 어느새 11병의 소주병이 테이블 한구석에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총 11개··· 대충 나누자면 한 사람당 최소 소주 2병은 들이켰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적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뻗어버릴 수 있는 양이었다.

실제로 초반에 술부심을 부리던 송재영은 이미 테이블에 기댄 채 자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초반에 나대는 녀석들이 가장 빨리 뒤지더라. 어쩌면 인생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세원은 다시 술잔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원래 누구 한 명이 잔을 들었으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K­술자리 예절이었으며, 그건 비슷한 또래 애들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가 건배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송재은이 당황하면서 물었다.

“아니, 마신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마셔요?”

“···쫄?”

“아니, 쫄이 아니라··· 안 어지러워요?”

그녀는 지금 진심으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도 이미 한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녀는 송재영과 비슷한 쌍둥이었고, 그만큼 주량도 비슷했으니까.

만약, 술을 마시기 전에 안주를 충분히 섭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자빠져있는 사람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지금쯤 위장은 안주 반, 소주 반으로 정확히 5:5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되는 정도였다.

‘무슨 남자가···.’

그래도 평균 이상으로는 마신다고 자부하는 그녀였는데··· 자신보다 잘 마시는 남자를 보자니 그저 신기한 기분밖에 안 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건배를 해주긴 했다. 이곳에서 빠졌다가는 언제 레즈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까. 세원은 저 차가운 외모와 다르게, 적당히 빡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짜앙!

다시 한번 잔이 부딪치고 알코올이 목으로 넘어간다. 어지럼증이 한층 더 강화되며 속이 좀 더 매스꺼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아직 버틸만하다. 재은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후우, 덥다.”

이세원이 중얼거리며 위에 옷을 흔든 것은 말이다. 위에 입은 셔츠가 꽤나 갑갑한지, 그가 검지로 갈고리를 만들고 옷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옷이 움직일 때마다 창백한 살결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가슴팍은 꽤나 감질맛이 났다.

‘···!!’

송재은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의식적으로 행한 짓이 아니다. 본능에서부터 기인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옆에서 조용히 술을 홀짝이던 이은별, 굳이 화채를 시켜야 했냐고 투덜대던 유보람까지 그의 상체 쪽으로 시선이 끌려 있었다.

사소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고, 순간 적막감이 룸 안에서 감돈다. 마치 한 편의 은꼴gif 짤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오, 오우야···.’

송재은은 그 모습이 꽤나 야하다고 생각했다.

*

날씨가 여름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여기가 공기가 잘 안 통하는 밀실이라 그런 걸까.

분명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불구하고 룸 안은 마치 찜질방처럼 더웠다. 위장에 들어간 술이 머릿속을 꽤나 어지럽히기도 했다.

더위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술 때문에 멍청해진 머리를 한 층 더 멍청하게 만들어주니까.

몸에 열이 많아지면 자동으로 머리도 느려지기 마련이다. 컴퓨터가 열을 받으면 느려지듯, 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럴 때는 시원한 공기가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시원한 바람을 쐐주면 머리는 금세 제정신을 되찾아 줬으니까.

내가 비록 이런 어지러운 상태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정신을 유지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후우.”

그래서 그냥 가볍게 옷을 털은 것뿐이었다. 가벼운 바람이라도 만들 겸, 무의식적으로, 무자각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엉?”

갑작스러운 적막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인지, 내 상체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성 3명이 보였다.

마치 감상이라도 하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들의 눈은 꽤나 노골적이었다.

물론 내가 고개를 들자 그 시선들이 흩어지기는 했다.

“야, 야. 생각해 보니까 화채 맛있을 거 같아.”

“으응? 아, 아하 그치? 봐봐! 나름 괜찮은 선택이라니까.”

“······.”

끊긴 필름을 잇기라도 하듯, 다시 대화를 나누려는 녀석들이 보인다.

비록 찰나의 정적이었으나 내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요것들 봐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냥 생각 없이 휘두른 것뿐인데, 설마 그게 뭔가 어필이 될 줄이야.

내심 속에서 장난기가 일었다. 이미 저들도 허리고, 어깨고, 가슴골이고 조금씩 노출 중인데 나도 조금은 노출해도 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더위 때문에 슬슬 옷 안에서 땀이 나려고 하던 참이었다. 나는 갑갑함 좀 풀 겸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아, 여기 에어컨이 고장 났나?”

마치 너희 따윈 지금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오직 더위를 식히려는 목적만 있다는 듯 눈을 아래로 내렸다. 이걸로 쟤네들도 편히 집중할 수 있겠지.

툭, 투둑.

셔츠의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분산되었던 시선이 다시금 몰리는 게 느껴진다. 단추가 실크에 튕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만큼 주변이 조용하다는 뜻이리라. 나는 이 상황을 즐기듯 천천히, 여유롭게 단추를 풀었다.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셔츠를 갑갑하게 감싸던 단추들이 모두 풀리고 그 안에 숨겨두었던 무언가가 나타난다.

나는 그것을 망설이지 않고 그녀들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아······.”

하는 탄식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셔츠의 안쪽에는 새하얀 반팔 티가 자리하고 있었다. 때 하나 타지 않은 듯 깔끔한 백색의 반팔 티가.

설마 얇디얇은 셔츠를 입으면서 속에 티 하나 안 입었을까.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다들 기대했던 게 배반당한 얼굴이었다.

*

“나, 나 담배좀 피고 올게.”

“나는 화장실!”

그렇게 잠깐의 해프닝이 끝나고, 보람과 재은은 마치 도망치듯 룸을 나갔다. 당황이라도 한 건지, 둘의 얼굴은 약간 빨개져 있었다.

아마, 이세원이 옷을 푸는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야릇한 상상을 한 것이리라. 그것 때문에 머리에 열이 올라 급히 식히러 가는 것이고 말이다.

이은별 자신도 똑같이 이상한 상상을 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결국 속티를 입었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은별은 당황을 최대한 숨기며 잠시 앞을 쳐다보았다. 두 여자가 나가자 자꾸 킥킥대는 이세원이 보였다.

꽤나 재밌어하는 얼굴이었다.

‘저거, 백퍼 일부러 그랬어···.’

그러니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일부로 단추를 푸는데 시간을 끈 것도, 시선을 내려 눈치 없는 척한 것도 전부 연기일지도 몰랐다. 어디서 저런 여우 같은 짓을 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당장 자신도 반응하지 않았는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

“······.”

어쨌든, 그 일은 지나갔고··· 이렇게 룸 안에서 둘이 있자니 방안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몇 평짜리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송재영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밖에 없었다. 애들이 나가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찾아오는 것이다.

은별은 이 침묵이 상당히 불편했다. 그래도 애들이 있었을때는, 대화에 잘 끼진 못해도 시끌벅적해서 좋았는데.

이렇게 둘이 남으니 어색함만이 맴도는 것이다.

‘뭔가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데···.’

정작 은별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없었다. 막상 둘만 남으니 슬슬 몸이 굳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침묵을 깨뜨릴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술을 먹어서인지 잘 굴러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지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연 것은.

“···오빠.”

어떻게든 이 침묵을 지워보겠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짓거리일 수도, 마침 애들이 나간 최적의 타이밍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장에 가득찬 알코올이 머릿속 제어장치를 망가뜨려서 그런걸지도 모르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서 그런걸 수도 있고.

술은 사람을 꽤나 과감하게 만드니까.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찌되었든 그녀는 말했다. 다소 과감하게. 어떻게 보면은 뜬금없이.

“친구가 아니라 이성으로서요.”

“···응?”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안엔 적막감이 맴돌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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