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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야짤작가-68화 (68/125)

〈 68화 〉 68, 자리 배정

* * *

영어사전에 명명되어 있듯이, 룸(room)이란 곧 방을 뜻한다.

그러니 룸 술집이라고 하면 평범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방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가끔은 오픈형의 술집이 아닌, 칸막이가 쳐진 술집에 가고 싶은 날도 있을 수 있었으니까.

우리들의 썩어빠진 뇌가 생각하는 그런 야하고 음탕한 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술집으로 위장해서 실상은 성 접대를 하는 룸 술집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대부분의 룸 술집은 정말 건전하게 술과 음식만 팔았다.

음지는 결국 양지보다 작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이은별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어디 이상한 룸 술집으로 간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제 친구들이 선을 줄넘기 타듯 넘어대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착한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마 ‘남자’를 데리고 호빠에 가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룸 술집이라 말했을 때 그리 당황한 이유는.

뭐가 되었든 룸은 ‘룸’이었기 때문이다. CCTV 따윈 하나도 없으며, 주변의 시선조차도 없는, 사방위가 전부 막힌 밀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으며, 그런 만큼 대범하게 행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후···.’

은별은 그게 걱정이었다. 물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고, 아직 이세원과의 관계가 서먹하기는 했지만.

혈기왕성한 나이와 술이라는 부스터는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좁디 좋은 밀실에서 술에 진탕 취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술에 만취한 친구들이 이세원에게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서 굴릴 때면, 묘한 불안감이 속에서 들끓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원망섞인 눈으로 잠시 이세원을 쳐다보았다.

‘으으··· 옷도 왜 하필 저렇게 입고 와서는···!’

여름으로 인해 ‘여자’들의 옷이 바뀌었듯이, 이세원의 옷도 여름에 맞게 진화한 상태였다.

허벅지에 달라붙는 연회색의 반바지와, 얇은 천 재질로 이루어진 긴팔의 검정 셔츠가 보인다. 옷의 노출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셔츠에서 나오는 특유의 맵시는 오히려 평범한 노출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채도를 가진 옷의 조화는 그의 특유의 분위기를 한층 더 업 시키는 듯했다.

특히, 가슴 중앙에 사소하게 풀어진 단추 하나는··· 뜻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시선이 돌아가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과연 저 안에는 속티를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주제였다.

힐끔, 힐끔.

자신뿐만 아니라 제 친구들도 저쪽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 분명 자신만의 궁금증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은별은 걱정과 질투심이 섞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예약했던 방에 도착하자 이세원이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방의 내부는 꽤나 깔끔했다. 나무로 둘러싸인 벽지와, 천장 위에서 은은하게 내려오는 주황색의 조명, 일자형 의자 위에 붙은 부드러운 쿠션까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듯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마 예전에 갔었던 이자카야의 분위기와도 비슷할 것이다.

아무튼 꽤나 괜찮은 분위기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5명이서 아담하게 술을 마시기에는 적당하리라.

이은별은 여기서 잠시 두 눈을 빛냈다.

‘차라리 기회다.’

현재 인원수는 총 5명. 둘이서 먹던 때와 달리 지금은 합법적으로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기회였다.

앞에서 얼굴을 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의 옆에 딱 붙어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맞은편에 앉는 건 이미 여러 번 해봤으니까.

이은별은 한 발자국 뒤에서 누가 어떻게 앉는지 살펴보았다.

먼저 앉았다가는 요상하게 자리가 꼬일수도 있었다.

“난 이상하게 안쪽이 좋더라.”

우선은 유보람이 오른쪽의 끝으로 들어갔다. 어깨에 걸친 파우치를 책상 위로 올려놓는 그녀가 보인다.

“나도.”

그다음은 송재은이었다. 그녀는 발랄한 얼굴로 왼쪽의 끝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왼쪽 오른쪽 각각 한자리씩 찬 상황.

자, 이제부터는 이세원의 움직임이 중요했다.

오른쪽에 앉느냐, 왼쪽에 앉느냐? 아니면 좀 더 기다렸다가 맨 가장자리에 앉느냐?

지금 이것은 이은별의 최대 관심사였다. 만약 지금 교수가 연락해서 시험 점수가 나왔다고 말해도, 그녀의 집중력을 끊을 수는 없으리라.

“···음.”

이세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오른쪽 좌석에 앉았다. 별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유보람의 가슴이 좀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세원이 오른쪽에 앉자 이은별은 쾌재를 불렀다.

‘됐다!’

이제 자신도 오른쪽에 따라 앉으면 된다! 그가 가장자리에 앉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이미 자리가 정해진 이상, 원하는 곳에 앉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우니까.

그때였다. 자신의 앞으로 송재영이 끼어든 것은.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려던 이은별을 제치고 그녀가 몸을 들이밀었다.

“그럼 난 여기!”

그러더니 그 버르장머리 없는 말총머리 새끼는 그대로 이세원의 가서 옆자리에 앉았다.

“아···.”

순간 이은별의 입에서 공허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허무함과 아쉬움이 반반씩 섞인 탄식이었다.

분명 내가 저기 앉으려고 했는데······.

“뭐해? 얼른 안 앉고.”

“······앉을게.”

하는 수없이 은별은 송재은의 옆에 가서 앉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원하는 대로 잘 안 풀리는 날인 모양이었다.

*

그렇게 대충 자리를 정한 후, 우리는 메뉴를 정했다. 다행히 선택 장애 없이 빨리 정할 수 있었는데, 메뉴판에 추천 메뉴가 예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킨 음식은 대중적인 어묵탕과, 오돌뼈볶음, 감자튀김···

···그리고 은행 꼬치였다.

나는 식탁 위에 올라온 은행 꼬치를 보고 이마를 문질렀다.

“이걸 진짜 먹는 놈이 있었네···.”

3,500에 무려 6피스나 담아서 주는 음식.

나름 혜자스러운 양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시키고 싶지는 않은 그 음식이, 현재 식탁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내 옆에 앉은 포니테일 크롭 셔츠 년이었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은행 꼬치를 쳐다보자, 송재영이 보란 듯이 꼬치 하나를 집어서 먹었다.

“왜영? 나름 맛있는데요?”

“그래··· 너 많이 먹어.”

나는 은행을 와작와작 씹어먹는 그녀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컨셉이 아니었는지 은행을 꽤나 맛있게 먹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지, 보통 청년들 술자리에서 은행 꼬치를 시키려고 하면 욕부터 처먹었던 거 같은데. 역전 세상이라 좀 다른 건가···?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 친구들 또한 그녀를 질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쌍둥이 자매인 송재은은 아예 경멸의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상한 건 내가 아닌 모양. 특이한 식성을 가진 건 송재영 하나뿐이었다.

“저 새끼는 술집 오면 꼭 은행 꼬치부터 시키더라···.”

“걱정 마세요. 그래도 쟤가 자기가 먹은 건 철저하게 계산하니까.”

“그렇다면 뭐···.”

자기가 먹고 자기가 돈 내겠다는데 내가 뭐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신기했을 뿐이지,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우리는 그 뒤로 가볍게 술을 깠다. 시킨 술은 우선 소주 4병이었다.

이제부터는 저 초록색의 병이 어디까지 늘어날지가 하나의 관람 포인트일 것이다.

먼저 들어가기에 앞서, 유보람이 입을 열었다.

“설마 자기 어지럽다, 속아프다 이런 걸로 빼는 쫄보 레즈년은 없겠지?”

“야야, 선배 있는데 말 좀 가려 하자···.”

“아냐 괜찮아. 나도 씹게이는 되기 싫어.”

“푸흡, 화끈하시네. 그럼 건배!”

그렇게 쫄보선언문이 낭독되고,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다.

짜앙!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액체 몇 방울이 공중에 튄다. 맑고 투명한 액체는 잠시 공중에 유영하면서 화려한 주황색 조명을 반사시켰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대로 목구멍에 소주를 쏟아부었다. 쓰디쓴 액체가 정신을 살짝 흩트려놓는 기분이었다.

“크으­”

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실로 달콤했다.

아니, 맛이 쓰긴 쓴데. 솔직히 맛대가리는 더럽게 없어서 당장 입을 청소하고 싶긴 한데.

그럼에도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장 양옆에 여자를 끼고, 앞에서도 두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어찌 안 기쁠 수 있을까.

심지어 다들 한창때의 여대생들이었으며, 얼굴도 꽤나 반반한 이들이었다.

아아, 나는 어쩔 수 없는 남자인 것이다. ‘남자’가 아니라.

덕분에 가끔씩 나에게로 흘러들어오는 시선들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신경을 끊은 척, 술잔을 들이키다 보면 아래쪽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호감과, 욕망이 두루 섞인 눈빛들이었다.

그걸 느끼고 있다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예쁜 여자들이 은근 얇게 입는다던데.’

어째선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신체 하나로 사람의 감정을 조작할 수 있다니.

이게 뭐야··· 너무 중독적이잖아. 굳이 맨 위쪽에 단추 하나를 푼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솔직히 단추를 풀 때는 약간 자괴감이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풀길 잘 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기분이 좋다고 해서 남들까지 같으리라곤 할 수 없는 법이다.

“야, 얼굴 좀 풀어라. 뭐 이리 굳어있어?”

“굳어있다니······.”

대표적으로 이은별이 그랬다. 그녀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줄곧 저기압인 상태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가끔씩 애매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 보면 아마도, 저 기분의 주체는 나일 것 같았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뭐가 그리 불안한지 나를 흘깃거리는 모습.

‘흐음···.’

솔직히 뭐 때문에 저러는지는 대충 예상이 가고 있었다. 아마 이 술자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겠지.

애초에 먼저 그녀가 만들려 했던 술 약속에 그녀의 친구들이 끼어들은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내가 현재 떠드는 이들도 그녀가 아닌 대부분 그녀의 친구들 뿐이었으니.

질투심 또는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까.

‘모르면 안 되지.’

무려 나를 캐릭터로 야짤까지 신청했는데, 그걸 모르면 둔감한 게 아니라 병신이었다.

솔직히 이런 예쁘장한 애가 나를 상대로 좋아해 준다는 것은 꽤나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애가 약간 중요할 때 겁을 많이 집어먹고,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여럿 있긴 하지만 일단 심성 또한 고운 편이었고.

그러니 나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술 파티를 수락한 건, 단순히 진짜 재미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여자4, 남자1의 구성이라니. 이건 진짜 못 참는 일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런 시무룩한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언젠가는 답해줄 일이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묵탕 국물을 떠먹었다. 과연 추천 메뉴인 이유가 있었는지 어묵탕 국물은 얼큰하면서도 시원했다.

16도짜리 알콜로 메스꺼워진 속이 한층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시 국물을 떠먹고 있자, 유보람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럼 분위기 좀 올릴 겸 술 게임이라도 하실레요?”

그러면서 소주 꼬다리를 돌돌 마는 그녀가 보였다. 술 게임 중 가장 간단한 꼬다리 튕기기 게임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우선 이 자리를 즐기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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