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6, 이건 못 참아
* * *
일관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은 세월의 흐름을 한층 빠르게 가속시키기 마련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단조로운 일상은 결국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뇌는 새롭고 인상적인 일에 좀 더 기억력을 발휘하는 편이었으니. 새로운 자극이 없다면, 결국엔 뇌도 지난 일들을 별로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당장 그제 점심밥으로 뭘 먹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루에도 2~3번씩 꾸준히 챙기는 식사를, 굳이 뇌가 일일이 기억해서 용량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별로 쓸데도 없는 파일들은 자동적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분명 길고 긴 하루를 살았던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하면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으니까.
우리가 많은 경험, 새로운 일들을 도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내 뇌속의 폴더들이 많아지면서 결국에는 생각의 범위가 넓어질 테니까.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은 조금씩 바꿔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이런 말을 왜 하냐면.
지금 내 단조로운 일상이 스킵 되었기 때문이다.
“데뎃··· 내 2주가 어디 간 데스······?”
학교 앞, 나는 마지막 시험을 앞둔 채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나는 벌써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주변에서 오는 시선 강간들에 젠더적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지나니까 어느덧 2주가 훌쩍 지나있었다.
마치 시간 조정을 귀찮아하는 작가가 내용 전개를 위해 시간을 스킵 해 버리듯. 마치 니알라토텝님께서 내게 기억 조작이라도 가한 듯이.
내 금쪽같은 22살의 2주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는 이마를 탁 집었다.
나는 사라진 기억의 편린을 기억해 내기 위해 중얼거렸다.
“내가 며칠 전에 뭘했지···?”
등교이후 가볍게 암기과목을 외우고···시간이 나면 금태양 만화를 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심지어 평소에 하던 대화와 장난도,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극단적으로 줄어들어 있던 상태였다.
은별이도 꽤나 바빠보였고,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상기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생각해 보니 스킵 당할만 하군.’
굳이 시험공부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래도 오늘은 좀 자극적인 날이었다. 오늘은 무려 그 망할 놈의 시험이 끝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 뿐이랴, 대학은 보통 기말고사가 끝남과 동시에 종강에 들어가게 된다.
즉, 나는 다시 새벽 4시에 자서 오후 1시에 일어나는 한량같은 삶을 살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동안 아침 8시에 일어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제는 그런 활발한 삶을 잠시 접어도 된다 생각하자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크흡!’
나는 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며 자신을 다독였다.
‘오늘 하루만 버티자.’
그럼 나는 자유의 몸이 될지니.
그렇게 나는 오늘 시험을 보러 들어갔다. 오늘은 총 2개의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최근 이은별에게는 근심이 있었다.
“후···.”
별로 커다란 근심은 아니다. 작다면 작은, 그저 한 사람에게 한정된 자그마한 근심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 작은 근심이 그녀의 머릿속에 부유 섬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은별은 약간의 후회가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다가가지를 못했네···.”
그 근심이란 간단하다. 최근에 이세원과 별로 가까워지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저번에 했던 고민의 연장선이라 봐도 될 것이다. 다만 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그가 철벽을 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으으··· 진짜 왜 이러지?”
분명 다가갈 기회는 많았다. 아무리 시험 기간이라고는 해도 무려 2주나 시간이 있었으니까.
공부라는 명분을 내세워 같이 카페를 찾아갈 수도 있었고,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 노래방을 권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이은별은 딱히 이세원과 대화를 해본적이 없었다. 하던거라고 해봤자 가벼운 인사들 뿐.
이유는 간단했다. 항상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하면 자동으로 자신의 몸이 굳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다가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괜히 자신의 행동거지가 신경 쓰이는 느낌.
거기에다가 가끔씩 자신이 신청했던 그림의 모습과, 이세원이 겹쳐지니··· 거기서 나오는 꼴림과 죄책감 때문에 다가가기 힘든 것도 있었다.
‘그걸로 7발 정도 뺐지···.’
치킨도 하루 3끼 먹으면 질리는 마당에, 고작 그림 한 장으로 7발이면 엄청난 일이었다.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그 그림 하나를 반찬으로 삼았다는 것이니까. 자신은 3번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았는데, 그림 한 장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아무튼 그런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서 이은별은 최근 그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시험 때문에 바쁘기도 했으니, 자기합리화할 명분도 충분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태도를 고수하지는 못하리란 건 분명했다.
시간은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고, 어느덧 종강 시즌이 찾아와 버렸으니까.
그래, 종강 시즌.
평소라면 기뻐서 팔짝 뛸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종강을 하면 학교에 나와 지 않아도 될 것이고, 나오지 않는다면 그와 만날 일도 줄어들게 될 테니까.
원래 물리적으로 멀어지게 되면 마음도 멀어지게 되는 법이다. 이러다가 언제 다시 사이가 서먹서먹해지지 않을까 그녀는 불안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그래서 그녀는 오늘 한 발자국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술 권유를 건네는 것이다.
마침 오늘이 시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 명분은 충분했다. 원래 힘겹게 달린 뒤에는 한 번 자신을 풀어줄 필요가 있으니.
성실한 전교 1등들도 시험이 끝나면 피방으로 달려나가는 법이었다.
아마 그도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으리라.
‘···좋아.’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굳히며 걸음을 옮겼다.
*
모든 시험이 끝나고, 나는 중얼거렸다.
“김혜선 교수님 어째서···.”
설마 시험문제를 전부 서술형으로 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답형 문제도 아니라 5문제 전부가 자세한 풀이를 요구하는 문제였다.
새하얀 백지를 봤을 때 얼마나 막막하던지··· 덕분에 내 머리도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좆만한 지식을 꺼내서 개소리를 끄적여놓긴 했다.
‘최소한 부분점수는 주겠지.’
내 개소리를 분석하면서 정신적 어이없음을 느낄 김혜선 교수는 고려하지 않았다. 꼬우면 서술형을 내지 말았어야지.
나는 진심으로, 이번엔 교수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딱딱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의를 잠시 돌아본다.
시험이 막 끝나서 그런지, 의자에서 스프링처럼 일어나는 학생들이 보였다.
아무리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갔다 해도 시험의 끝이란 항상 기쁜 일이었으니까. 어느 한구석에서는 그걸 명분으로 사람을 구하는 인싸도 보였다.
“종강 기념으로 파티에 참석하실 분을 모집합니다! 이따 6시에 OO 역 아웃치킨으로 오시면 돼요!”
이름하여 종강 파티란 것이었다. 채팅방에서도 공지했던 내용을, 저 인싸는 이곳에서도 공지하고 있었다.
그걸 들은 학생들 몇 명이 친구와 떠드는 게 들려온다.
“야, 너 갈거냐?”
“스읍, 애매한데. 솔직히 요즘 술 너무 많이 먹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종강 파티라···.’
솔직히 끌리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최근 바빠서 술을 자주 못 마시기도 했으니까. 이제 한 번쯤은 진탕 취할 차례가 오긴 했다.
뇌도 가끔은 쉬어줘야 했으니. 간에 들이부어지는 알콜은 바쁘게 돌아가는 뇌를 식혀주는 쿨러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술자리는 나름의 재미가 있는 장소였다.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라도 일단 술이 들어가면 무슨 개소리든 꺼내게 되기 마련이니까. 남녀끼리하는 개소리 배틀은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빠지는 게 맞겠지.’
솔직히 술자리가 끌리긴 해도, 내가 가봤자 어색하기만 할 것 같았으니까.
다 같이 서먹서먹한 사이라면 모를까, 이들은 이미 2학년 1학기까지 동고동락한 상태. 그런 만큼 이미 서로 무척 친해져 있을 게 뻔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무리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찾아간다?
서로 자기들끼리 떠들고, 나는 목석처럼 술만 홀짝이는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졌다.
‘어우.’
상상만 해도 서글퍼지는 광경을 굳이 현실에서까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은 미연에 방지하는 게 좋은 일이다.
남들 다 노는데 나 혼자 집간다는게 살짝 억울하긴 했지만, 뭐 나중에 성아린과 대작이라도 즐기면 해소되겠지.
생각해보니 아린이와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섹스는 그렇게 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며 강의실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어? 있다! 세원 오빠!”
높은 톤의 목소리가 내 쪽을 향해 쏘아진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저쪽 강의실 앞문 쪽에 이은별이 서 있었다.
체교과에서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숨결이 내쉬어질 때마다 몸에 딱 달라붙은 흰 티셔츠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그 왕복운동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자, 그녀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말했다.
“하아, 아직 계셨네요. 다행이다···.”
“어··· 이제 가려고 했는데. 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여기 왜 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평소 노는 걸 좋아하는 인싸인 그녀는 곧바로 동기들과 술을 먹으러 간 줄 알았다. 아마 저기도 종강파티니 뭐니 시끄럽게 이야기가 나왔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이렇게 나를 찾아왔다는 건?
‘잠깐.’
순간 내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오.’
어쩌면 나 혼자 서럽게 집을 가지 않아도 될 지 몰랐다. 나는 기대섞인 눈으로 은별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별 건 아니고 그냥··· 혹시 일정 없으시면 저랑 술 마시러 가실래요?”
다행히 다음 말은 내가 원하는 말이었다. 나는 짐짓 고민하는 척하다가,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야 좋지.”
시험이 끝난 당일 이성과 마시는 술?
이건 못 참는 일이다. 니알라토텝님도 망치를 땅땅 두들기며 인정해 주실 게 뻔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게 보였다.
이번에 느낀 건데, 뭔가 전보다도 감정 표현이 많아진듯한 그녀였다.
“휴우··· 좋아요! 그러면 조금 있다 헌신포차 앞에서 봐요!”
은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래, 돌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우리들 곁으로 여자 몇 명이 다가온 건.
“오, 뭐야. 너희끼리 술 마시러 가게?”
“야 거기 비싼데 다른 데 가지.”
“···응?”
익숙한 녀석들이었다. 그나마 이반에서 말 좀 섞어본 몇 안 되는 여자애들이었으니까.
유보람과,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그녀들은 잠시 장난기 어린 얼굴로 은별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 또 혼자만 재미 보려고.”
“흑흑, 은별아 나 소외감 느껴.”
그러더니 나에게 묻는다.
“오빠 저희도 따라가면 안 돼요? 재밌을 것 같은데.”
“저희가 좋은 술집 알고 있어요! 그쪽으로 가요!”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오.’
여자 한 명과 벌이는 대작이 아니라, 여자 여러명과 벌이는 술 파티···?
이건 못 참는다.
우리의 부처 석가모니도 참지 못하고 술자리에 끼어들게 틀림없었다!
무릇 남자라면 여성들 틈에 둘러쌓여 술을 마셔보는 게 꿈인 법.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상관없어.”
“캬! 쿨하시네.”
“그럼 좀 있다 시내에서 보는 걸로 하죠!”
그렇게 나는 종강 파티와는 또 다른 파티에 끼게 되었다. 여자 여럿에 남자는 나 혼자만 있는 파티였다.
“야··· 너네가 갑자기 왜 껴······.”
이은별이 잠시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 * *